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04화 (204/653)

풍자와 해학, 관용

꼭두(놀이패의 대장), 하종길이 이끄는 ‘창수놀이패’들은 본래, 창양 근교에서 민중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공연들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유랑 무리들이었다.

다른 놀이패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하지만 인생은 한 방에 바뀐다.

창수놀이패 역시 인생이 격변하는 순간을 맞았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랐지만 황상께서 미복잠행(微服潛行)을 하실 때, 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으셨단다.

그 이후, 그들은 종종 궁궐로 불려가 지체가 높은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최고 존엄이신 황제와 황후의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는 엄청난 영광을 받았었지.

상민은 이들이 꾀죄죄하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의 처지 자체는 단연코 다른 놀이패들보다 훨씬 더 양호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공연을 즐겁게 본 황상께선 주먹 하나만큼 큰 금화 주머니를 내리셨다.

이 금화는 실로 몇 년을 유리걸식하며 벌어먹고 살 수고를 덜어줄 만큼 상당한 금액이었다.

만약 꼭두인 종길이 금화를 받은 이후 패거리들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쳐 산다면 아마 일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종길은 야심이 있었다.

그는 이 금화 중 일부를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대부분의 돈을 다른 곳에 투자했다.

“이 돈만 있으면, 우리는 고려에서 제일가는 놀이패가 될 수 있어!”

더욱더 화려한 탈과 의복들, 좋은 악기들과 튼튼한 기구들.

그들은 투자라는 선순환을 이루며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 * *

그러나 정작 꼭두 종길은 오늘의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창수놀이패는 지금 큰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한동안 공연을 쉬고 정비할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다. 오늘의 공연은 세상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황실에서 떨어진 명이었는데.

죽은 사람보고 놀이 공연을 하라고 해도 부름을 받은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 나와야 할 판이었다.

패거리 중 경험 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고민을 늘어놓았다.

“꼭두, 어떻게 할 거요?”

“…유남이 이놈이 다친 게 정말 크구나.”

창수놀이패는 전형적인 나희(儺戲, 규식지희)패에서 시작했다.

나희란 기예적인 놀음을 일컫는다.

줄타기(踏索, 답삭)와 방울놀이(弄鈴, 농령), 솟대놀이(長竿戲, 장간희)와 땅놀이(筋斗, 근두), 불놀이(吐火, 토화)와 춤놀이(舞童, 무동, 풍물놀이의 원형)까지.

그중 창수놀이패는 줄타기와 솟대놀이, 그리고 춤놀이를 잘하기로 소문난 패였다.

전부 다 할 수는 있었지만, 저것이 관중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쉬웠다는 말이지.

그리고 이것들은 놀이패에서 중추적인 일을 맡고 있는 장유남이라는 재인의 덕이 컸다.

개인적으로 그는 종길의 사위이기도 했지만, 창수놀이패에서는 없어서도 안 될 중요한 인물이었다.

발재간과 민첩성, 균형감각과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과장된 행동이 몹시 출중하여 창수놀이패가 줄타기와 솟대놀이를 할 때마다 관중들을 구름같이 모이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지난달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다가 다친 상황.

생사가 오락가락할 정도로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한동안 꼼짝없이 병상에 드러누워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줄타기와 솟대놀이 둘 모두를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인데 이를 어쩐다.”

황제 해건의 눈을 만족시킨 것은 분명히 그 두 공연이었다.

다른 놀이들은 제각기 그것들로 유명해진 놀이패들도 있었으니까.

저기 남천놀이패나 경산놀이패같이.

‘행여, 당하께서 폐하께 우리의 공연이 시원찮았다고 말씀이라도 하신다면….’

종길이 좋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질끈 눈을 감자, 그의 딸이자 유남의 아내이며 그리고 새롭게 만들고 있는 놀이의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아빠, 차라리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어떨까?”

딸아이의 말에 종길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창수놀이패들은 종길의 투자 이후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놀이들을 만들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이류나 하는 법, 그들과 같은 일류 놀이패들은 끊임없이 대세에 맞춰 발전시켜나가야 되니까.

종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기예를 위시한 나희뿐만 아니라 대화를 이용한 조희(調戱, 소학지희)까지 공연 분야를 확장하려 하고 있었다.

조희는 줄이나 솟대를 타거나 꽹과리를 치고 불을 다루는 나희와는 성격이 달랐다.

재담 위주의 놀이라, 맛깔나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서술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종길의 딸아이는 그 모두에 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아이였고.

좋아.

다 좋은데.

문제는 그들이 지금 조희 놀이를 ‘준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이지.

아직 관중들에게 보여 줄 만큼 제대로 된 준비는 미흡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관중이 창양의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내로라하는 관리들조차 고개를 숙이며 따라야 하는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이니.

황상이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라면, 시중은 모든 대소신료를 지배하는 통치자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감히 당하께 우리가 제대로 된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종길은 덜덜 떨면서 그렇게 물었다.

주변의 경험 많은 이들도 제각기 긴장이 되는지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게다가… 조희는 대체로 밤에 하는 것인데, 낮에 그 분위기를 제대로 이입시킬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그 재밌는 말이라는 것이 높으신 분들에게는 실로 시덥잖은 것인데.”

시덥잖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오히려 시덥잖은 것을 넘어 불쾌해질 수도 있었다.

서민들의 유흥거리인 만큼 속된 언어유희와 노골적인 음담패설이 들어가니까.

“괜찮아. 내가 조절할 수 있어.”

딸아이는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지만 이 패거리를 전부 이끄는 종길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아 섣불리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꼭두. 그냥 정이 말대로 합시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잖소?”

어렵긴 했지만, 다른 방책이 없었다.

부하의 말을 들은 종길은 딸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번 마음껏 해보거라.”

그나마 시중께서는 평소 성정이 그들과 같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하시다 하니, 설마 죽지는 않겠지.

* * *

무대가 완성되었다.

상민과 루크레치아는 물론이고, 고용인들의 자리까지 전부 마련해 놓으니 널찍한 정녕당의 마당이 꽉 차 보였다.

본래는 둘만을 위한 자리였으나, 상민은 그들의 수발을 드는 고용인들에게 인색한 상관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연이라는 것이 관중들의 호흡과 같이하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고 판단한 상민은 이왕 이렇게 된 것, 고용인들까지 이렇게 많이 즐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상민이 먼저 앉아있는 자리에는 이미 북적북적 사람이 많았다.

이윽고 한참 뒤에 있는 정녕당 안채의 문이 열리자 시녀들이 제각기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목상 부부 사이임에도 꽤 오랜만에 보는 루크레치아가 다소곳하게 발걸음을 옮기더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탈리아의 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입은 그녀의 자태가 실로 아름다웠다.

처음 루크레치아가 정녕당에 올 때, 그녀는 불과 열여섯과 열일곱의 경계선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열여덟이다.

앳된 느낌을 주는 볼살이 빠지고, 조금 늘씬해진 그녀는 예전의 미모마저도 자신의 최대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더욱 만개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절로 화려하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치기 어리고 순진함을 감출 수 없었던 지난날보다 이곳에 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느끼는 비극적 감각이 그녀에게 수심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는지, 루크레치아는 과거보다는 더욱더 보기가 좋았다.

상민은 마음을 먹었다.

적당한 배필을 이어주어야겠구나, 하고.

이러한 아름다움도 언젠간 시들 것이고,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예전의 삶보다는 더욱 행복한 삶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과거의 삶보다는 더욱 행복하게 해주겠소.’

체사레와 알렉산데르 6세의 희생양이 되었던 과거보다는 그래도 그가 주선해주는 미래가 더욱 괜찮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하는 미래?

상민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

분명히 성적 매력은 압도적이겠지.

젊고, 건강하며, 건장하고 강인한 남성.

그도 세월에 누적된 자연스러운 이성과의 경험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매력 또한 있을 것이다.

열강의 수위에 놓인 최고의 강대국을 이끄는 권력 또한 쥐고 있는 존재.

세계에서 감히 누구와 견줄 수 없을 만큼의 황금을 쥐고 있는 사람.

솔직히 말해, 체사레는 자신에 비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남자로서나 남편으로서나.

시선에 담긴 루크레치아의 감정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신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동자는 원망 대신 동경과 그리움, 슬픔을 담고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루크레치아에겐 참으로 미안하지만, 자신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잔 드 아르크와 연화가 죽은 이후부터 계속.

정을 주게 된 여인이 맞이하는 필연적인 최후를 세 번이나 겪었던 그는 그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더 이상 느끼기 싫었다.

굳이 그가 사서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마돈나(Ma Donna), 이리와 앉으시오.”

이탈리아어로 귀부인을 호칭하는 말.

그 안에 미안함을 담은 상민의 정중한 손 입맞춤에, 루크레치아는 오래간만에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이 공연이 해건의 권유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그녀는 상민의 이러한 행동이 자신과의 관계 개선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

그는 절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따 말해야겠군.’

지금은 적어도 즐거운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배려해 주자.

* * *

공연이 시작되었다.

불놀이 등 화려하고도 재미있는 볼거리들이 넘쳐났다.

상민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만을 띠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곁에 앉은 루크레치아는 박수를 치고 깔깔 웃으며 열심히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얼쑤!”

꽹과리와 북, 그리고 타악기를 치며 흥겹게 마당을 밟는 광대의 모습에 누군지 모를 관중 하나가 흥겹게 추임새를 놓았다.

상민도 오래간만에 보는 흥겨운 춤놀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런 놀이패를 몇 번 관람한 적이 있었지만, 즐겨보진 않았다.

그 오랜 세월 중 기껏 한 네 번?

루크레치아는 아예 처음 보는 광경일 거고.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소 단순한 육체적 개그라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원초적이기에 와닿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고려말이 아직은 어색한 루크레치아도 저렇게 금방 빠져들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몸개그는 잘 통한다.

그러나 평소 머리에 쌓아두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고로, 상민은 온전하게 무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순간 그의 의식이 무의식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무의식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집무실에 있었다.

‘도로 예산으로 신설된 항목이 상당하던데.’

고려에 깔려 있는 가도 신설과 재보수 문제가 떠올랐다.

새로운 공법, 무려 로마의 가도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동로마의 기술력을 받아들인 고려는 진작 깔려 있던 도로는 물론이고 앞으로 깔 도로 또한 대대적으로 정비해 나가고 있었다.

기존에 깔린 도로의 규모가 1이라면, 앞으로 깔릴 도로의 규모는 거의 10에 육박했다.

‘비록 어마어마한 자본이 들어갈 테지만, 국가의 단결과 영속성 확보는 해상물류만으로는 부족하다. 육로로도 안정되게 유지해야 해. 적어도 태동산맥을 넘는 세 관문과 남려의 동해안, 그리고 서해안은 수레가 지나다닐만한 가도가 깔려야 한다. 철도가 제대로 발명되기 전까지.’

그리고 먼 미래에 이 수레가 다니던 길이 자동차가 다닐 길로 발전할 것임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사업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길은 고려로 통하리라.’

다른 문제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틀락스칼라와 퓨레페차가 또 싸우는 모양이야. 이놈들은 대체 고려의 앞에서는 중재를 받아들이는 척을 하고 뒤에서는 서로 죽어라 싸워대니 어찌할꼬.’

중려가 어느 정도 불협화음(하나로 통합되지 않을 만큼의)을 내보이길 바라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전면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은 택주의 골칫거리기도 했다.

테노치티틀란 멸망 이후, 공통의 적 틀라카엘렐이 사라진 이들은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두 왕국과 세 공국은 서로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했지만 대체로 두 패거리에 속했다.

퓨레페차냐, 혹은 틀락스칼라냐.

‘누무누가 북쪽으로 올라갔지만 북쪽에서는 색다른 소식들이 내려오고 있지. 북려는 항상 아국 최고의 관심사이니 정북행성의 권한을 조금 강화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혹여나 연방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권위를 낮추거나 유지하는 것이 나을까.’

‘아국의 전략무기이자, 앞으로 패권경쟁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전열함은 매년 적어도 두 척 반은 건조해 나간다고 지침을 내린 상태. 그러나 전열함은 니카라오 운하를 통과하기엔 너무 묵직하고 둔중하며 값비싸다. 태평양 안보를 위해서는 운하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하면서도 적당히 전투력을 갖추고, 또한 원거리 항해능력이 있으며 경제적인 새로운 군함의 규격이 필요하구나.’

‘예주의 작황이 좋지 않아, 올해 커피값은 물론이고 상업작물의 가격은 장난이 아니겠군. 포르투갈산 농산물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좋을까? 부과한다면 얼마나?’

‘사곡에 지진이 났다고 했지. 사람들이 많이 다쳤으니 구호물자를 보내는 안건은 제대로 확인했던가?’

‘새롭게 즉위한 진주의 군왕은 나이가 어리다지. 야심많은 숙부가 호시탐탐 ‘수양’하려 하고. 적당한 선에서 모략을 통해 숙부를 저지해 놓는 것이 좋….’

“와아, 정말 재밌었어요!”

루크레치아의 탄성이 들렸다.

무의식 안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상민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비스듬하게 괴고 있던 자신의 고개를 똑바로 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미 첫 번째 무대가 끝난 모양.

놀이패들은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몹시 재미있었는지 얼굴에 은은한 홍조까지 띠고 있었지만, 정작 바로 옆에서 거의 몇 시간 동안 딴생각에 빠졌던 상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제는 사람이라 불릴 존재이긴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