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위협하는 두 번째 적(3)
둘은 차를 들이켰다.
“그녀는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해건은 태자의 국혼보다도, 오히려 조상의 상황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존재의 정신적 안정은 국가로서도 몹시 중요한 일이라, 항상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할아버님은 이제는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해서는 아예 학을 뗀 것처럼 보였다.
상민은 텁텁한 차 맛에 혀를 찼다.
이 비싼 찻잎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달이는 방식이 잘못된 것도 더더욱 아니었고.
“그녀에게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내게 있는 문제라고 봐야 하겠지.”
세상 모두에게 속내를 감추는 가면을 뒤집어쓴 루크레치아.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며 알맞은 표정을 도출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가끔 그의 얼굴에 심한 가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가려움은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가 아닌 상민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가련한 여인입니다. 먼 곳까지 와 의지할 사람 없이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중전 헬레나의 이야기와 닮았다.
해건은 그녀를 직접 상민에게 보냈음에도 처지만큼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를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해건은 대응책을 촉구했다.
루크레치아는 어찌 되었든 교황의 서녀였고, 이권이 달려 있는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온 신분이며 따라서 그녀의 문제가 국가의 문제였기도 하였기에 상민의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했다.
상민은 정녕당에 기약 없이 머물고 있는 여인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잔인한 것 같구나. 그녀에게 적당한 살 곳과 재물을 주어 알아서 살아가도록 권유해야 되겠어.”
정답이 아닙니다!
해건은 어이가 없어 말을 하려고 했으나, 상민이 먼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이 가지 않아. 마음이 맞지 않는 여인에게 내 옆에 일평생 붙어 있으라는 것 또한 잔인한 일이다. 그녀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겠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정략결혼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처사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후우…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이탈리아가 화내면 뭐 어쩔 건데.
아쉬운 건 지들 아니겠어?
속 편한 생각을 한 해건은 부드러운 담요가 깔린 의자에 등을 깊숙하게 기대었다가, 이윽고 입을 열고 말했다.
“그래도 그녀와 시간을 좀 보내시지요.”
어떻게, 시간을 좀 같이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까?
정이라도 붙지 않을까?
상민은 애절한 해건의 눈동자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지만.
“뭐, 축구경기라도 같이 봐야 하나?”
상민은 운동경기 관람에 상당히 빠져 있었다.
그는 허락된 여가시간마다 창양의 축구 경기장에 가서 축구를 보는 것을 즐겼다.
정해진 시간, 상대방의 그물망 안에 공을 차 넣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경기.
공정하면서도(대체로) 직관적인 경기를 볼 때만큼은 스트레스가 풀리곤 했다.
상민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팀은 청해 축구단.
그의 도시를 대표하는 팀이었다.
황실이 후원하는 창양의 축구단과 함께 최고의 두 팀으로 꼽히며 매년 우승을 거의 번갈아 하면서 하고 있기도 했고.
해건과 유일하게 진심으로 언성으로 높일 때가 있다면, 아마 서로의 팀을 헐뜯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여인들은 대체로 축구를 딱히 남자들만큼 미치도록 좋아하진 않았기에 그의 말은 다소 농담조였다.
해건이 고개를 흔들며 슬쩍 웃었다.
“소손이 재미있는 것을 좀 압니다.”
* * *
우생학이 날뛰는 상황, 상민 또한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당연하게 해야 할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학자들을 결집시켜 체계적인 반론을 준비했다.
아무리 전염성 있는 생각이라도 현 상황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은 충분히 많이 있었다.
제대로 학문을 쌓은 식자들일수록 더더욱.
지식인들은 이 사상의 무서움을 어렴풋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순수한 혈통에 대한 숭배가 연방의 결속력을 흔들리게 하고 황실에 대한 모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연서궁에서는 본격적인 반증 논의가 시작되었다.
상민은 음지와 양지로 정치력을 행사하여 우생학적 논리를 파쇄하라 명령했다.
그가 뿌린 자금도 자금이지만, 학문적 의심도 생겨나고 있었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이제는 확연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박도상의 사촌이자 종원론의 저자인 박래광 또한 그 반론의 대열에 참가했다.
[뇌의 크기가 개체의 우등함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코끼리는 인간보다 세 배가 넘는 뇌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어찌 설명하겠나?]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을 충분히 고려했는가? 개체의 평소 영양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는가?]
유전적으로 머리 크기가 작은 학자들은, 대두를 찬미하는 미친 논리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머리 크기가 클수록 지혜롭다니, 이게 말이라고!’
체계적인 반박이 계속되자 ‘학문’으로서의 우생학의 입지는 진전되지 않았다.
가설의 상태에만 머무르고 정설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내용의 중독성과 자극성에 비해, 그 주장의 증명이 너무 어려웠으며 자료가 정확하고 명쾌하지도 않았으니까.
또한 아직까지 인체는 사람들의 인식으로 확인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기관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반격은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진 못했다.
요인이니, 개체니, 사회적 배경이니 과학적 논파는 자극적이지도 않았고, 듣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훨씬 자극적이며 효과적인 선전 문구를 가진 우생학이 대중들 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이리저리 짜내고 짜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 * *
학문적 공격 이외에도, 당연히 범법행위 의심자에 대한 수사 또한 시작되었다.
책을 편찬하고 한적한 농원에 은거하고 있었던 박도상은 결국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시신들을 구했단 말이냐!”
“네놈, 진주에서 음흉한 짓을 하고 다녔다지. 어서 썩 털어놓아라!”
“네놈에게 노예를 공급했다는 상인이 이놈이냐? 포르투갈에 귀화를 택한 이 변절자 쓰레기 놈?”
그러나 도상은 미치광이 과학자였지만 신념을 품은 자였기도 했다.
그것이 괴상하고 그릇되었더라도.
도상은 서슬 퍼런 조사관들 앞에서, 태연자약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를 학문적으로 핍박하는 것은 태조께서 남기신 유훈을 거스르는 것이오. 모름지기 학문의 자유성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셨잖소?”
“진리란 그대들이 핍박하더라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태조께서 친히 쓰신 불비불문이라는 명패가 연서궁에 아직도 소중히 달려 있는 상황.
그의 말대로 학문적 논쟁이 이렇게 뜨거운 상태에서, 이론의 주장자를 이리 심하게 핍박하는 것은 태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았다.
조사관들은 취조실 앞에서 탁상을 치고 을러대었지만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와 한숨을 쉬어대었다.
“폭풍의 눈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되었소.”
폭풍의 눈을 헤집고 박도상을 처벌하기 위해선 아주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저 멀리 진주에서 자행된 증거들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으며 노예를 팔아 재낀 공범자는 외국으로 도망한 모양이니 제대로 된 증언 또한 나올 리가 만무했다.
“상부에서도 몸에 직접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수단은 사용하지 말라시더군.”
그래도 상부가 마음만 제대로 먹는다면, 강력한 제재를 할 수 있을 텐데.
“…퉷, 저런 쓰레기에게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니.”
“저놈은 내버려두고, 다른 놈들을 잡아야지.”
조사관들은 이를 갈며 취조실 밖으로 나섰다.
박도상이 아닌, 정말로 위법행위를 저지른 놈들을 심판할 시간이었다.
* * *
세상 모든 곳에는 음지가 존재한다.
관권이 강력한 고려도 마찬가지.
오히려 너무나도 넓은 땅에 급속도로 팽창해나가면서, 고려는 바다에서는 해적, 육지에서는 강도 떼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지금의 국토는 평야와 농지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태백산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태동산맥은 말할 것도 없고, 울창한 태수의 열대우림이나, 아타카마사막, 남부의 황무지와 같은 지형은 헬기나 위성이라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사람이나 단체를 추적하는 것에 난관이 있었다.
그래도 고려는 꾸역꾸역 최선을 다해 이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북려에서 연방보안관 제도가 실시됨과 거의 비슷하게 남려 본토에서도 치안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추밀원이나 어사대, 사헌대는 제각기 맡은 주 업무가 따로 있었다.
군과 감찰단체, 정보단체와는 달리 치안과 수사 업무에 대해 전문적인 근대적 치안조직을 새롭게 설립해야 했다.
결국 개천 180년, 기존의 치안대나 순라대, 그리고 금오위와 같은 기존의 치안단체들은 제각기 내무부 산하에 신설된 경찰청(警察廳)이라는 조직에 통합되었다.
경찰청의 간부들은 군의 무관과 같이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고, 이는 질적인 공무 능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덕분에 창양과 경기, 청해의 핵심 지역에서 이런 불량 단체들은 어느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번 선민당원의 일 또한 경찰청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업무상 당연한 일이었기도 하고, 이 일을 처리할만한 다른 조직인 정보총국은 아무리 강한 나라가 아니라 하지만 자그마치 한 국가의 왕조를 전복시키는 ‘일어서는 거인 작전’을 비롯한 대외 모략에 한창 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단 말일세.”
경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조직은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도 빠르게 성장했어. 그리고 너무나도 빠르게 강경화되었지.”
중서성 의원들에 대한 모욕을 일삼은 선민당원들 또한 본래 그렇게 대단한 자들이 아니었다.
삼삼오오 뭉쳐서 돌아다니며, 험담을 일삼는 정도의 불량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도상의 우생학이 대중들에게 퍼져나가고, 화제가 되자, 이들은 그들의 불법적인 비행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며 범행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안정균이란 자가 조직의 통제권을 손에 쥐자, 이들은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상당히 수완이 좋은 모략꾼이라던데.”
경관들은 안정균과 선민당원들 뒤에 후원자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중서성 의원에 대한 공격이라니.
지방의 수령들조차 중서성 의원의 위세에는 감히 견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주대낮에 위해를 가했다?
비록 오물과 계란 투척에 불과했지만, 일반적인 다른 어중간한 단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선민당원들의 조직 또한 한층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쓰고 버릴 수 있는 패들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혈기가 넘치고 사고뭉치인 불량배들이나 어려서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지기 힘든 소년들이 주된 구성원들이었다.
반면 중심인물들은 전부 음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경험 많은 경관조차도 수사하기 힘들어할 정도로.
‘누군진 몰라도 꽤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 후원자들은 같은 중서성 의원일 수도 있겠고, 상서성의 고관대작들일 수도 있겠지.
정치적 경쟁자를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경관들은 의욕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수도 창양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그들은 황상과 시중에게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수치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미끼를 문다면, 모조리 일망타진해주마.”
이 피에르 의원에게 가해진 공격(이 피에르 의원은 이를 특별하게 공포를 유발하도록 하는 종류의 정치 공격이라 하여, 테러(Terreur)라 이름 붙이고 규탄했다.)이 불과 며칠 전에 벌어졌다.
추가적인 테러 활동이 있으리란 제보를 받은 이들은 이 의원의 옆에서 대기하며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모든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도록.
* * *
‘왕의 사내도 아니고….’
상민은 토요일 휴일의 정녕당에서 다소 당황한 얼굴로 웬 이상한 무리들의 방문을 받았다.
“성상의 황명을 받들어, 삼가 소인들이 위대하신 제국의 시중을 뵈옵길 청하노니, 당내(堂內)에 드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해건이 소개한 ‘재미있는 것.’
분명히 이걸 말할 텐데.
정녕당의 앞마당, 평소에는 잔디밭이 깔려 있어 산책을 하는 용도로밖에 쓰지 않는 공터에 이색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경비병이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황상의 권유로 온 자들인 만큼, 경비병들은 다소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져대면서도 잠재적 위험분자로 보며 업신여기거나 핍박하진 않았다.
재인(才人)들.
다른 말로 하면 광대(廣大), 혹은 수작(水作).
전조 고려시대에도 문화를 주도했던 예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랑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그들의 기예를 팔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양 상태가 썩 좋지는 못한지 비쩍 말라보인 외관이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대변했다.
두 눈은 퀭하고, 옷은 꼬질꼬질하다.
고려는 마음만 먹는다면, 외방에 나가 농사를 지을 땅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저들은 지금의 처지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말이겠지.
하인들의 말로는 시중을 만나 뵙기에 앞서 미리 꽃단장을 한 것이 저런 상태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들이 즉흥공연을 할 무대를 준비하자 그들의 몸에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만 내뿜을 수 있는 열의와 생동감이 번져나갔다.
“자, 여기 줄을 걸고, 거기 마당 풀 사이에 돌이 있는지 잘 고르라구!”
“예.”
상민의 허락을 받은 그들이 정녕당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무대를 준비하자, 시녀들과 하인들은 다소 못마땅한 눈초리를 지으면서도 그들이 상전의 부부(루크레치아는 누가 봐도 그의 아내 신분으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사이에서 감도는 냉기를 풀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