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e Britons, Must, in turns, to fall.
1489년 9월 10일.
후대에 가장 가까운 해변의 이름을 따, 더블린 해전이라 불릴 전투가 막을 내렸다.
두 국가의 해군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단종진을 통해 맞부딪힌 이 해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해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물론 그 격렬의 기준은 고려가 아니었겠지만.
로열 네이비는 조그마한 소선 두 척만이 도주에 성공했고, 나머지는 나포되거나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간악한 해적, 잭 디건 또한 침몰하는 함선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시신을 끌어내어 경고의 의미로 효수하거나 혹은 유럽의 관습에 따라 앙상한 해골이 될 때까지 잘 보이는 곳에 목을 매달아 놓으려 했던 고려군은 아쉬움에 바다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적 진형의 선두, 에드먼드의 기함 채텀호와 몇 개의 함선들은 돛대의 돛이 전부 불타버리는 큰 수모를 겪었으나 그 덕분에 배가 완파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전투를 준비하려 한 에드먼드는, 단종진의 후열들이 포격전에서 고려의 함대에게 무자비하게 박살 나는 것을 보고는 전의를 상실했었다.
포탄만으로 배를 침몰시키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은 선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 뒤 전열의 배들은 떠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몰골로 겨우 숨만 붙어있었다.
온몸에 나무 파편이 박힌 선원들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열심히 백기를 흔들었다.
고려군은 가라앉은 배에서 탈출한 잉글랜드 선원들을 작대기로 건져낸 뒤 굴비 엮듯이 포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에드먼드도 백기를 올렸다.
“항복… 항복하겠소.”
쓰고 있던 선장모는 어디로 갔는지.
초라한 중년인이 변흠규의 기함으로 와 고개를 조아렸다.
* * *
대승을 거둔 이후, 살아남은 적 함선들을 거두고 에드먼드 제독과 포로들까지 포획한 변흠규는 포격전으로 인한 함대의 손상을 간단히 수리하고는 계속 작전을 이어갔다.
한 번의 회전으로 완벽하게 제해권을 잃어버린 잉글랜드.
그 결과로 이 에린해에서는 감히 그 어떤 이도 성 조지의 십자가를 달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에린섬에 떨어진 이만 명의 군사들은 본토에서 오는 지원이 차단된 순간부터 말라죽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정복군은 필요한 군수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적대 세력도 모자라 이제는 친잉글랜드파 영주들의 영지와 재산까지 몰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약탈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믿었던 군주(친잉글랜드파 영주들은 모두 봉건 계약상 에드워드 4세의 봉신이었다.)에게 뒤통수를 거나하게 맞은 친잉글랜드파의 영주들은 삽시간에 에드워드 4세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당시 자신이 게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잉글랜드를 지지하고 있던 킬데어의 영주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이 같은 사태에 크게 격노했다.
약탈 이전에도 불화의 조짐은 있었다.
그 전, 파견된 사령관은 전형적인 잉글랜드 꼴통이었으며 탐욕스럽고 잔혹했다.
게일인들을 저급하고 천박하게 모욕하는가 하면, 잉글랜드를 도와주고 있는 게일인들에게도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을 스스로 자행하고 다니기도 했었지.
결국 원정군 사령관과 잉글랜드군의 만행을 보다 못한 제럴드는 적이었던 콘초바 오브라이언과 내통했다.
“나는 에드워드 4세가 우리의 섬에 질서와 규율, 그리고 통합과 번영을 가져다줄 거라 생각했었소.”
제럴드는 리머릭에 가 콘초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옆, 지금까지 격렬하게 싸워왔던 게일인 영주들은 제럴드를 보고 당장에라도 씹어먹겠다는 흉흉한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그러나 콘초바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저들은 게일인을 위한 지역사회를 건설할 생각이 없소. 분명히. 저들은 게일인을 ‘피부가 희고 머리가 붉은 아프리카 토인’이라고 말하며 마치 우리를 가축처럼 취급하니까.”
제럴드가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소.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니 이제야 보이는구려. 저들은 이 섬을 정복한 이후에도 우리의 식량과 우리의 가축을 수탈해 갈 것이고, 우리가 위기에 빠져있을 때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 놈들이오. 우리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니까.”
게일인의 땅은 게일인이 다스려야 한다오.
콘초바는 제럴드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과거의 과오는 잊고 새롭게 나아갑시다.”
이후 제럴드는 검을 거꾸로 쥐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영주들을 규합한 후, 잉글랜드 세력과 친잉글랜드 세력을 공격했다.
내부에서부터 찌르는 비수에, 탐욕스러운 사령관은 물론 그 휘하의 부하들은 무방비상태에서 죽었다.
리머릭을 넘으면 함락되었을 에린은 잉글랜드인들이 자행한 행동으로 인해 다시금 게일인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1490년 1월, 먼스터와 우스터가 다시금 게일인들의 품에 돌아왔다.
킬데어의 영주가 검을 거꾸로 쥔 당사자였으니, 잉글랜드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동부 랜스터의 일부분인 더블린뿐이었다.
그러나 더블린에 있는 마지막 잉글랜드군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다.
앞에는 성난 게일인들, 뒤에는 고려의 함대.
제아무리 견고하게 지어댄 요새라도 의욕이 넘치는 공성군과 심심할 때마다 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를 견딜 수는 없었다.
백기를 내건 잉글랜드군이 무너진 요새의 틈 사이로 나오자, 게일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내 에린섬이 온전히 그들의 품 속으로 들어왔다.
“와!”
“콘초바 대왕이시어, 모든 게일인의 숙원을 따라 아르드리 너 에린(Ard Rí na hÉireann, 에린의 지고왕)의 지위에 오르소서!”
결혼으로 끈끈하게 결속된 버크 가문은 물론 한때 잉글랜드에게 땅을 빼앗겼던 영주들도, 그리고 제럴드를 위시한 친잉글랜드파에서 전향한 세력들도.
두 번 다시 잉글랜드를 위시한 외지의 침입에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게일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통합된 하나의 왕국이 되길 원했다.
마침내 그들의 뜻에 따라 콘초바 나 소르나 오브라이언이 통일 에이레(Eire, 에린의 원형) 왕국의 아르드리의 지위에 오르니, 이때가 마지막 아르드리가 죽은 이후 무려 삼백 년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 * *
“이제 막 즉위하신 전하의 수도 리머릭에 아국의 함대가 주둔하는 것은 보기에 절대 좋진 않겠지요.”
에이레 왕국의 첫 번째 지고왕, 콘초바의 즉위식에 참관한 변흠규 제독이 왕을 따로 알현하는 장소에서 말문을 열었다.
고려가 그동안 주둔한 이니스맥노튼 항, 즉 줄여서 이맥항을 다시금 되돌려 주고 떠나가겠다는 말을.
고려 또한 외지인의 세력이 분명했다.
게일인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방적으로 받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까 고민하던 콘초바는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흠규의 말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다소 감정이 북받치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대들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 게일인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의 인품과 포용력, 그리고 결단력.
콘초바는 이 신생왕국의 성군이 될 수 있는 자였다.
그의 아들 또한 문무를 겸비했으니 어찌 이 왕국의 앞날이 밝지 않겠는가?
흠규는 지고왕의 말을 듣고는 미소 지었다.
“전하와 함께해서 저 또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완전히 이 지역에서 철수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제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신생 왕국의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에이레 왕국도 든든한 동맹이 필요했다.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지 않은 두 국가는 적당한 타협지점을 찾았다.
맨섬(Isle of Man).
더블린 해전이 일어난 지역 북동쪽에 있는 이 섬은 에이레,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이 세 나라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사실 따져보면 그리 작지도 않았다.
옛 반도에 있던 큰 섬, 탐라의 면적의 삼분의 일에 달했으니까.
자급자족하기에도 충분한 면적.
이 섬의 주민들 대부분은 게일인이었으나, 1290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월터 드 헌터컴을 보내 점령하도록 한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국왕의 사유지로서 잉글랜드의 직할지배를 받았다.
섬의 게일인들이 잉글랜드인들에게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고려가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이 작은 섬은 명목상 에이레 왕국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잉글랜드 왕 직할지를 점령한 것은 분명히 고려였다.
고려는 에이레 왕 콘초바 1세와의 협약에 따라 이 땅을 무기한으로 빌리기로 했다.
99년의 제약조차 없었다.
카디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에이레 왕국 스스로가 고려의 주둔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왕과 지도층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둘의 차이는 현격했다.
섬 주민들은 카디스 근처에 거주하는 카스티야인들마냥 고려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반기는 감이 많았다.
한적하고 오직 조그마한 밭을 경작하거나 낚시를 하던 섬이 발달되기 시작했으니까.
그 탐욕스럽고 난폭하며 오만한 잉글랜드 놈들도 전부 쫓아냈던 것은 덤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아래, 맨섬에서 바야흐로 주(駐)에이레 고려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 *
해전에서의 승리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의 중요 해안거점은 이제 충분하게 방비되어 있었고 제아무리 강력한 전열함이라도 요새화된 항구의 해안포와 함부로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으니까.
게다가 무척이나 실리적인 상민이 멀리까지 육군을 파견해 유지되지도 않을 땅을 현지인들의 분노를 쌓아가며 꾸역꾸역 점령할 사람도 아니었고.
상민의 대전략은 아일랜드의 독립과 독자적인 왕국 형성, 그리고 그곳과의 우호적 교류 선에서 멈춰 있었다.
굳이 자원을 더 써가면서 더 나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워드 4세에 대한 복수?
물론 그는 고얀 놈이다.
눈앞에 있다면 아마 몽둥이로 흠씬 두들겼겠지.
그러나 일국의 국왕에게 책임을 묻고 두들겨 패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
지금은 일찍부터 개입한 탓에 아예 그 날개가 꺾이다 못해 잘라나갔지만, 본래라면 서서히 기지개를 피며 전 세상을 호령하게 될 국가의 잠재력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하지만 일은 일반적인 흐름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에드워드 4세는 가장 큰 적을 건드린 상태였다.
그 적은 왕립함대를 바다에 수장시킨 고려도 아니었고, 아일랜드의 미개인들도 아니었으며, 남아있는 가톨릭 이단자들도 아니었다.
1490년 3월 3일.
아직 사순절이 끝나지도 않는 시기에 런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잉글랜드 전역의 농민들이 봉기했다.
잉글랜드 본토에 사는 백성들은 근래에 가혹한 세금을 뜯기고 있었다.
단지 경작하는 땅이나 하루의 품삯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백성들.
사실 이들 중 대다수가 롤라드파로 개종한 이유도 옛 가톨릭 사제들의 비위와 강도 높았던 교회세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세금은 그때와 비교해도 전혀 낮지 않았다.
오히려 높으면 더 높았지.
게다가 이틀 전 에드워드는 템즈강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공표하고 런던의 시민들을 징용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말은 빈민구제의 일환이라고 했지만, 그 허언을 믿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서쪽에서는 잉글랜드의 군대가 바다에서건 육지에서건 대패했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고.
농민봉기는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는 것마냥 갈수록 커져갔다.
이 봉기가 도저히 군대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에드워드 4세는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잠시 베드포드로 피난을 가야 했을 정도였다.
그의 부재중에 웨스트민스터 왕궁에는 큰불이 났다.
농민봉기가 조금 사그라들고, 다시 돌아와 불타버린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바라보게 된 에드워드는 분노하며 폭동의 주모자들을 모조리 죽이라며 강경한 진압을 지시했다.
하지만 다음 날, 오히려 귀족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중에는 에드워드의 측근들도 있었다.
“이 무슨 짓이냐?”
“전하께서는 대헌장(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의 조항들을 어기셨습니다.”
― 제12조, 오랜 관습에 의해, 과세 혹은 지원금은 귀족들의 자문을 거치지 않고서 부과될 수 없다.
왕의 앞에서 귀족들이 작성한 선언문을 낭랑하게 읽는 옛 측근의 모습을 바라본 에드워드가 치욕에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워드의 실책과 폭정에 지쳐 잉글랜드 의회 또한 봉기의 흐름에 탑승했던 모양.
1215년, 존 왕이 자신의 실책과 무능력, 왕권의 한계를 깨닫고 귀족에게 한 발 양보한 문서를 일컬어 대헌장이라 했다.
연원을 따지면 상당히 유서 깊은 조약이었으나, 사실 지금은 그 전례가 거의 사문화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이 지금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4세의 만행에 개입하고 싶어 하던 의회가 이때의 일을 다시금 뒤집어 까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헌장을 새롭게 조명하여 에드워드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자.
사실 대헌장이 지금까지 사문화되어 효력을 잃었던 것은, 존 왕의 로비에 직접 나선 교황이 잉글랜드의 국왕 편을 들어 감히 군주를 겁박하는 신민들에 의한 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현 잉글랜드는 개신교였다.
야심이 있었던 에드워드는 존 왕의 전례를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도 이미 한번 반기를 든 이상, 어중간하게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귀족들은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런던탑에 유폐했다.
병신왕이라 불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에드워드의 아버지였던 헨리 6세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자,
내전 중 수많은 요크 귀족들이 가두어졌던 곳.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아내가 가둬져 있던 곳.
에드워드 4세는 비참한 꼴을 하고 나서야 후회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 * *
국왕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국왕을 옹립해야 했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왕위에 올린단 말인가?
내전으로 인해 요크 가문은 물론 랭커스터 가문 그리고 나머지 방계들의 씨가 거의 마르다시피 한 상황.
후보는 오로지 두 명이었다.
에드워드와 왕비 해영에게서 난 딸, 마가렛 랭커스터.
그리고 에드워드와 정부 세실리아 위그모어에게서 난 어린 서자 조지.
귀족들은 화재가 한 번 일어나 흉측하게 변한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모여 양원을 개최한 뒤 차기 국왕에 대한 여론을 모았다.
둘 다 장단점이 있었다.
전자는 조금 더 정통성이 있었으나, 하필이면 외국의 왕비인 데다가, 그 외국과의 전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벌어졌다는 사실.
후자는 정부 소생의 서자인 까닭에 정통성에 큰 흠결이 있지만 남아이고 같은 민족권의 아이였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귀족들과 의원들은 그래도 적국의 왕비를 다시금 불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판단해 세실리아 위그모어와 접촉하려 했다.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보낸 비밀 서신들을 입수하기 전까지는.
‘이 멍청이들은 결국 제풀에 지쳐 와해될 것이오. 내 이 치욕을 금방 갚을 테니 그대는 조지와 함께 훗날을 도모하고 있으시오.’
그 멍청하고 무능했던 존 왕 또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귀족들의 통수를 때리려 했던 것을 살펴보면 존 왕보다는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에드워드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했다.
귀족들의 여론은 다시금 분열되었다.
이제는 진지하게 외국의 왕족 중 핏줄이 흐르는 자들을 데려오자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렇게 할 바에, 가장 정통성 있는 분을 다시금 모셔오는 것이 맞지 않겠소?”
“…….”
어찌 되었든 해영 또한 외국의 황족.
전쟁 중이라지만, 이 전쟁은 왕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귀족과 일반 시민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었기도 했다.
그리고 해영은 에드워드와 부부였다지만 전혀 협력할 사이도 아니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그녀를 다시금 웨스트민스터에 와 달라 청했다.
맨섬에서 잉글랜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던 해영 또한 그 초청에 딸의 손을 잡고 다시금 런던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구해주러 오시지 않으셔도 돼요.”
“…부디 무사하십시오.”
변흠규에게 단단히 일러둔 해영은 결의를 다지며 런던으로 향했다.
그녀의 딸에게 적법한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