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열함
1487년 12월.
김홍은 정식으로 파직되었다.
스스로의 마음 정리가 끝난 그는 대외적으로 더 이상 고려의 봉신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이와 동시에 마리 또한 김홍과 결혼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뜬금없는 소식에 귀족들이 동요했으나, 그녀는 결혼을 강행했다.
사실 안 할 수도 없었다.
하늘이 축복하심인지 그토록 아이를 가지기 어려웠던 마리는 혼전에 벌써 임신의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 축복이에요.”
대가 끊길뻔한 발루아부르고뉴가의 명맥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부귀공 마리가 그 기회를 시답잖은 이유로 놓칠 리가 만무했다.
인종이 다른 것?
유럽은 고려인을 동경하거나 두려워할지언정 그들을 업신여기진 못했다.
종교문제?
상관없었다.
종교개혁가 마티외는 개신교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성공회 또한 마찬가지.
정교회는 두말할 것도 없는 근본 종교였고.
두 종교를 받아들인 고려인들은 어찌 되었든 이교도들이라 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홍은 개종하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으니 더더욱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제는 김홍을 살짝 당혹케 했다.
그는 고려의 귀족이 아니었다.
아니, 현 고려에 귀족이라는 개념이 있긴 하던가.
지금의 고려에서 황족을 제외한 세습적 귀족작위는 보기 힘들었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명문가와 부유한 상인 가문은 항상 존재했고 이들의 지위와 능력은 외국의 귀족에 준할 것이었지만, 귀족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봉토는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홍의 가문은 딱히 명문가도, 부유한 상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김홍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부르고뉴의 귀족들 앞에서 답변을 내뱉었다.
“본인은 저 머나먼 고려의 옛 봉신국 신라 왕족의 후예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솔직한 말로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삼별초의 구성원이었던 그의 선조는 가문을 일컬어 옛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계에서 분파한 김씨라 했었다.
지금은 건양 김씨라 불리지만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왕족의 피가 어느 정도 섞여 있지 않을까.
“오…….”
“시… 신라?”
“신비로울 것 같은 왕국의 이름이군요.”
“과연, 제독께서 평소 행동하실 때 기품이 있었던 이유가 다 있었구려.”
김홍의 근거 없는 말 이후 놀랍게도 부르고뉴 귀족들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고려의 위세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
그 봉신국에 신라라는 곳이 존재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귀족들은 그것을 확인할 능력도, 동기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략적인 명분이 갖추어지자 두 명은 혼례를 올렸다.
본래 종교가 없는 거나 다름없던 김홍은 배설주의로 개종했고, 1488년 정식으로 국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마리와 김홍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는 두 부모의 성을 따라 기욤 드 부르고뉴김(Guillaume de Bourgogne―Kim)이라는 이름을 물려받게 되었다.
부르고뉴 대공국의 국서가 된 김홍은 여전히 모국 고려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고려와 부르고뉴의 동맹을 추진했다.
바람 잘 날이 없는 이 소국은 의지할만한 끈이 필요했다.
고려 조정도 긍정적인 회답을 보냈다.
고려에겐 저지대의 국가는 대동양을 위협할 역량을 갖춘 잉글랜드와 프랑스, 이베리아반도의 국가들을 견제하는 대륙의 마지막 퍼즐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고려가 잉글랜드를 적대하고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있는 이상, 이다음 세대엔 잉글랜드의 영원한 숙적 프랑스의 승천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
완전한 유럽의 내륙국가나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면 모르겠지만 프랑스인들이 앞으로 가질 남아프리카에 대한 탐욕을 생각해 볼 때, 유럽 대륙 내에서 그들을 견제할 방도는 필요했다.
김홍은 고려 조정과의 논의 끝에 브레다에 정박한 함대를 몹시 저렴한 가격으로(사실 반파된 함선들이 부르고뉴 덕분에 보수되었던 것이 컸다) 사들였다.
그리고 같이 저지대에 피난한 고려인 선원들 중 가정이 없던 자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삼았다.
프랑스는 적대국 부르고뉴에 귀화한 고려인 선원들을 일컬어, 마치 패잔병들이 거지꼴을 하고 저지대에 도착했다고 프랑스어로 괴(거지, Gueux)라 불렀다.
귀화 고려인들은 그 악의 섞인 조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멋대로 부르라지, 다만 네놈들은 평생 바다로 제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의 괴는 저지대의 언어로 괴젠(Geuzen)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고려인 출신 ‘바다의 거지’들은 그들의 옛 상관이자 현 군주인 대공의 남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서약했다.
중범선의 수리가 끝난 이후, 이들은 전부 사략선단으로 바뀌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해안을 약탈했다.
리머릭에 주둔한 고려함대를 견제하고 병력을 수송하느라 로열 네이비를 전부 리버풀로 이동시킨 잉글랜드와 변변찮은 해군도 아직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프랑스는 고려가 옥죄고 있었던 절제의 끈을 놓아버린 바다의 거지들에 의해 된통 봉변을 당해야만 했다.
부르고뉴 대공국에게 좋은 소식은 육지에서도 들려왔다.
김홍은 패장이라 자책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고려에서 고급 군사교육을 받은 덕분에 기본적인 군사적 능력이 꽤나 뛰어났다.
해군 장교라 하더라도 육전을 완전히 도외시하진 못했고 필수적인 교육은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했으니까.
해전의 연장선인 백병전과 상륙전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육지나 해상이나 병력 운용의 이치는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았기도 했고.
백년 전쟁을 치른 프랑스의 역전의 노장들은 전부 늙어 죽은 상황.
그에 반해 김홍은 총창방진과 전열보병의 전술과 개념에 대해서는 상당히 통달한 자였다.
월등한 기량을 선보이며 한순간에 부르고뉴 대공국의 전 군권을 쥔 김홍은 서쪽에서부터 숨통을 조여오는 샤를 8세의 군대를 뤽상부르(룩셈부르크)에서 크게 패퇴시켰다.
그는 이 승전을 기념하여 아내에게 정식으로 대공이 아닌 여왕으로 즉위하라 간언했다.
프랑스, 그리고 교황청과 완벽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갈라선 이후, 차라리 칭왕을 통해 국내외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좋았다.
부귀공 마리도 절망적인 전황 속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남편의 승전에 한층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부르고뉴, 뤽상부르와 림부르크, 로티에르와 브라반트 및 구엘데르의 공작이시자, 플란데런과 아르투아, 홀란트와 질란트, 주트펜과 에노의 백작이시자, 나무르의 변경백이신 마리 전하께 네덜란드의 왕관을 바치니. 오 주여, 우리의 여왕을 보우하소서.”
배설주의파로 개종한 리에주의 대주교가 그녀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니, 부귀공 마리는 정식으로 ‘네덜란드’의 여왕이 되었다.
국명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었다.
이전의 국명은 부르고뉴였지만, 이미 부르고뉴 대공령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녀의 현 영지에 있는 백성들이 부르고뉴의 국명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외적으로 실소유하지 않는 영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마리의 선조, 필리프와 샤를이 꿈꾸던 로타링기아의 명칭도 물망에 언급은 되었으나 이 이름은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이었고, 로타링기아의 근본이 되는 상(Upper), 하(Lower)로렌 또한 마리의 아버지인 용담공 샤를 때 점령당했기에 마리의 핵심 봉토라 부르기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저지대 언어로 저지대의 나라라라는 뜻의 네덜(Neder, 낮은)란드(Land, 땅)를 국명으로 채택했다.
마리의 남편 김홍은 핵심 영토 브라반트 영지를 수여받으니, 고려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에 정식 봉토를 가진 대귀족이 되었다.
* * *
선(船)과 함(艦)은 다르다.
전자가 일반적인 배를 일컫는 말이라면 후자는 전투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 군함을 칭했다.
고려의 선박을 따져보면, 현재 강을 따라 이동하는 곳에 쓰이는 개량된 평저선인 초마선과 탐험용 및 연락선으로 쓰이는 협저선, 완벽한 상위호환인 중범선의 등장으로 그 입지가 축소되어 더 이상 건조되지 않고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누범선 등이 쓰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칼리나해에서는 상인들과 고려인 해적들이 쓰고 있는 지백선 등도 포함할 수도 있겠고.
반면 중범선은 대표적으로 함이라 칭해질 수 있는 선박이었다.
물론 그 특유의 안정성으로 인해 누범선을 밀어내고 상업용으로 개조되어 쓰이는 추세가 자리잡혔지만 애초에 중범선을 개발하라 명령했던 상민의 의도는 전투가 주목적인 함선을 만들라는 것이었으니까.
고려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소모된 함선의 개수를 포함하면 백 척이 가뿐히 넘는 중범선들을 찍어냈었다.
이들은 그동안 온갖 바다를 누비며 해상에서 고려의 이권을 수호했다.
사실 그동안은 이 중범선들로 충분했다.
돈 먹는 하마와 같은 군함들은 한 척 한 척 생산하는 것 자체가 국가 경제에 상당한 무리를 안겼다.
배 한 척을 건조하는 것에 웬만한 작은 도시 하나의 세수가 들어간다.
생산한 후에도 유지비용이 크게 들었고.
선박을 이루는 나무뿐만 아니라 대포와 화약, 심지어 그 안의 선원들을 운용하는 비용까지.
적극적 무역이 없었다면 자금을 충당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군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었으며, 너무 적은 것도, 너무 과한 것도 좋지 않았다.
대전략을 짜는 상민의 입장에선 한창 멀티를 펴고 확장을 할 시기에 병영을 세 개, 네 개 올린 뒤 병력을 뽑고 있는 짓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개천력 2세기의 후반(CE1376~1475)에서 3세기의 초반으로 넘어가는 시점, 고려는 드디어 군비경쟁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인식했다.
혁신은 경각심에서 비롯된다.
포르투갈은 물론 잉글랜드와 여러 나라들이 자체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범선들을 건조해 나가자, 이러한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당시 건함 경쟁에 따른 배수량을 제국 무게 단위계인 톤(Ton)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학자들은 대체로 이 단위의 어원을 통(桶 Tong)이라는 고려 단어에서 찾았다.) 해상십자군 이후 불과 500톤 정도에 불과했던 고려의 중범선들은 포르투갈이 건조하기 시작한 600톤급 갤리온에 비해 약간은 체격이 왜소해졌다.
심지어 포르투갈은 1480년, 꽤나 대단한 갤리온을 제작했는데, 상 주앙 바티스타(São João Baptista)라는 이 함선은 무려 오백 문이 넘는 대포를 장착한 괴물이었다.
물론 그 오백 문이 고려의 중포에 해당되는 컬버린 등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왜소하여 별 의미도 없는 팔코넷과 베르코스급과 같은 대포(이쯤 되면 대포가 아닌 총으로 봐야 할 수도 있었다)로 구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배수량 1000톤을 자랑하는 상 주앙 바티스타호의 덩치만큼은 진짜였다.
물론 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상 주앙 바티스타는 아쉽게도 세계 최대의 군함이라는 명칭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다.
새벽호는 첫 설계부터 특별하게 1000톤을 상회하는 무지막지한 체급으로 만들어졌으니까.
물론 이것은 고려의 시중이 타는 위용함(Great Ship)이었으니 독특한 경우였고.
어찌 되었든 턱밑까지 추격해오는 경쟁자와 그에 따른 함선 건조 욕구는 에린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려―잉글랜드 전쟁으로 화려하게 폭발했다.
“세상에, 고려 해군이 항구에서 적의 눈치만 본다니. 그런 모순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함대 간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법, 강력한 함선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파견된 제독 변흠규의 주장은 고려 내부에선 상당히 취사선택되었지만 그의 주장 중 몇 가지는 전폭적인 동의를 얻었다.
1>2+3+4의 원칙.
고려는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그리고 카스티야 해군의 합산 규모보다 더 커야 한다는 주장은 국가 기조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함대의 수뿐만 아니라 함선 개별의 크기 또한 시급히 발전시켜야 할 분야였다.
“다른 국가들보다 더 커다랗고 튼튼하며 강력한 함선이 필요합니다.”
시중의 새벽호와 황제의 위용함을 건조했던 기록을 토대로, 해문 조선소의 장인들은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결국 기존의 중범선의 장점은 유지하되 포격전에서 더 강력한 화력을 선보일 수 있는 건함법을 개발했다.
이로 인해 안정성은 유지하고 층을 한 층 더 올린 삼층 갑판 중범선이 탄생했다.
해군은 이 함선을 전열함(戰列艦, Ship of line)이라 명명했다.
말인즉, 단종진으로 포격하기 위해 태어난 함선이라는 뜻이었다.
이 전열함이란 괴물은 과시용으로 건조된 위용함도 아닌 주제에 개별 전함의 배수량이 천여 톤이 넘었다.
적재된 대포를 다 합산하면 육십여 문에 달하는 이 거함은 원거리와 근거리 포격전 모두에서 적에게 재앙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몹시 두꺼운 외벽을 자랑하여 심지어 소구경의 포탄은 심심치 않게 튕겨내기까지 했다.
승선 인원은 오백 명이 넘었으니, 백병전을 거는 것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가히 떠다니는 성채.
최초로 ‘전략무기’라 칭해질 수 있는 병기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장 건조된 전열함은 제국군함 광명호를 위시하여 모두 세 척뿐.
동시기에 건조에 들어간 나머지 일곱 척은 아직 건선거에 있었고 그중 네 척은 용골조차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해군부는 이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완성된 전열함 세 척과 그것을 호위할 함선 다섯 척만을 편성하여 에린으로 올려보냈다.
다소 특이하게 생긴 물건들을 싣고.
[작가의 말]
??? : 거 어데 김씨요?
??? : 부르고뉴 김씹니데.
??? : ?
전열함이라는 것은 조선소 장인에게 소식을 전달한 군무부 관리의 말대로 사실 갤리온과 큰 차이가 없다 봐도 무방합니다.
전열전술(단종진)을 쓸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한 화력을 가진 삼층 갑판 갤리온이면 그게 전열함이겠죠.
실제로 단종진을 구사한 이후부터 동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전열함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니까요.
따로 이거부터 전열함이야! 이런 경우는 잘 없었습니다.
크기가 계속 커지면서 외관은 조금씩 바뀌어가겠지만요.
학계에선 메리 로즈호와 같은 위용함(중카락)도 전열함의 선조격이라 보고 있으니, 고려에서 삼층 갑판 갤리온이 나온 이상 충분히 전열함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전열함도 초기형, 후기형이 나뉩니다.
지금 등장한 전열함은 과도기 및 초기형이니, 나중에 나올 HMS 빅토리 같은 전열함과의 비교는 다소 고려에게 억울한 감이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