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84화 (184/653)

에린

무적함대는 유럽에 도달했다.

함대의 파견 구실은 어디까지나 해적에 대한 무역로의 보호였지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은 아니었다.

상민은 이번엔 능력과 인품 모두 믿을만한 제독 변흠규(邊欽規)에게 모든 작전의 통솔권을 주고 자신은 직접 동행하지 않았다.

테네리페에 도착한 이들은 지도를 보며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적 해적들의 거점이 브리튼 제도 주변에 있는 이상, 카나리 제도는 그곳까지 원활하게 가기에는 너무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는 위도상으로 더 북부에 있는 항구가 필요했다.

일단 포르투갈이 항구 정박권을 문의할 첫 번째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잉글랜드와 끈끈한 동맹국이라는 명목을 든 것.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온 우리를 아예 잉글랜드에 대한 공격군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해적의 배후에 잉글랜드가 있다는 것을 아예 국가적으로 공인해버리는 꼴이 따로 없었다.

‘진정한 동맹국이라면 잉글랜드와 연합하여 아국과 전쟁을 하든가.’

그건 또 싫은 모양.

이리저리 붙어서 간만 보는 놈들이라는 것은 꽤나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두 번째 후보는 카스티야.

말할 것도 없이 기각이다.

하루라도 빨리 카디스를 되찾길 원하는 사생아왕이 다른 항구에 대한 정박권을 나누어 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명분을 어떻게 세웠든, 고려의 무적함대가 대서양을 건넜다는 사실은 유럽에게 거대한 공포를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고려가 성공회를 공언하고 정교회를 보호하겠다 선언한 이상, 오스만같이 유럽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지는 않겠지만, 이베리아반도의 국가들은 아직 정신적 외상이 남아있었다.

변흠규는 혀를 차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흐음….”

이베리아의 국가들이 안 된다면 잉글랜드를 싫어할 만한 다른 나라들에게 말을 해 보는 것이 좋겠지.

고려는 일단 대동양과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프랑스에게 항구의 정박권을 문의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가 공교로웠다.

한창 봉건영주들의 연합(공익 동맹)이 일으킨 반란으로 정신없는 샤를 8세는 반란을 주도한 숙적 부르고뉴 대공국을 이 기회에 쓰러뜨리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확전을 전혀 바라고 있지 않는 상황.

서로에 대한 악연으로 충분히 수월하게 항구 정박권을 얻어 낼 생각이었던 흠규는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칼레 해협(도버 해협)을 넘어가면 토벌 함대의 주둔지로 선정하기에 전혀 매력적이지가 않다.’

말이 해적 토벌이지, 지금 이 행위는 잉글랜드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자 경고의 행위였다.

물론 해협 너머에는 지금까지 해적에 시달린 한자동맹과 저지대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잠재적 적성국의 코앞에 주둔지를 만들자는 계획은 무모한 것을 넘어 멍청한 행위와 다름없었다.

브르타뉴에 대한 접근은 오히려 프랑스를 자극할 수 있고, 어찌한담.

‘코앞… 코앞이라….’

그렇다면 남은 곳은 오직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흠규는 지도를 보면서 대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이곳도 따지고 보면 잉글랜드의 코앞이라 볼 수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섬의 백성들이 잉글랜드를 그 누구보다 싫어한다는 것.

프랑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동양 건너 유럽에 지속적인 영향을 투사하기 위해선 현지 세력의 우호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지 세력은 ‘왕조’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고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왕가와 왕가와의 결합은 외교 관계에 분명 상당한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이 두 나라 간의 영구적인 협조를 의미하진 않는다고.

우호적 관계는 양국의 공동 이익이 일치하는 경우에만 성립된다.

즉, 고려는 그들을 간절하게 원하는 현지 세력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그들이 없다면 독립의 유무가 불확실할 정도의 나약한 세력.

잉글랜드에게 언제라도 집어삼켜질 만큼.

* * *

에린(Éirinn)섬.

잉글랜드어로 아일랜드라 불리는 이 땅은 그레이트브리튼섬 바로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다.

섬은 크게 네 부분, 즉 얼스터(북부), 렌스터(동부), 코노트(서부), 먼스터(남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잉글랜드는 더블린이 위치한 렌스터의 일부분을 약간 점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에린섬의 소왕들(petty kingdom, 영주들) 즉, 버크, 오브라이언, 오코넬, 오페렐, 오닐, 오도넬, 맥도넬 그리고 맥카시 같은 가문들은 유구한 세월에 걸쳐 그들의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게일인’들은 노르드인과도, 앵글로색슨인과도, 그리고 노르망디공이자 정복왕 윌리엄 이후 잉글랜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앵글로―노르만인들과도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자랑했다.

지긋지긋한 바이킹의 위협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잉글랜드의 야욕에도 거칠게 저항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꾸준했다.

노르드 바이킹들은 약탈자였을 뿐, 문화적, 경제적 침략자들은 아니었지만 잉글랜드는 동쪽에 둥지를 틀고 앉아 서서히 이곳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

그레이트브리튼섬에 있는 잉글랜드의 역량은 분명히 잘게 나누어진 에린의 영주들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었다.

심지어 한때는 잉글랜드인들이 섬의 대부분을 장악했었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잉글랜드에 거대한 내전이 터진 틈을 타, 에린의 영주들은 잉글랜드 세력을 동쪽으로 몰아내고 다시금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전 이후 잉글랜드는 사라진 그들의 영향력을 조금씩 다시 복구시켰다.

1483년, 에드워드 4세는 삼백 년도 더 된 먼 옛날, 선조 헨리 2세가 교황에게 받은 ‘라우다빌리테르(Laudabiliter) 교서’를 들먹이며 스스로를 아일랜드의 군주라 칭한 후 아일랜드 병합을 준비했다.

많은 가톨릭계 잉글랜드인들도 롤라드파 잉글랜드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아일랜드로 도망치고 있는 상황.

아일랜드 병합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성립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4세는 킬데어의 영주 제럴드 피츠제럴드를 위시한 친잉글랜드파의 영주들을 규합하고 난립한 소왕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침략에 따라 에린의 영주들도 하나의 깃발로 뭉치기로 했다.

에린섬 서쪽의 코노트 지방의 강력한 소왕 콘초바 나 소르나 오브라이언은 인접한 가문 버크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먼스터의 맥카시와 얼스터의 영주들을 규합하여 반잉글랜드 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미 두 세력 간의 차이는 심각하게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친잉글랜드파와 맞대고 있었던 영주들은 제각기 항복하거나 아니면 영토를 잃은 채 코노트로 도망쳐 와야 했다.

1486년, 이미 섬의 절반은 넘어가 있는 상태.

콘초바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 리머릭에서 기적적인 수성 승리를 거두어 냈으나 오히려 에드워드의 진노를 샀을 뿐이었다.

‘이 강대국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승리를 거두고도 게일의 영주들이 모두 침통한 얼굴로 앉아있는 원탁, 유일하게 서 있는 콘초바는 주변을 둘러보며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저들은 쓰러지고 쓰러져도 계속 밀려온다.

에린의 영주들은 감히 잉글랜드 국왕이 지닌 그 무시무시한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젊은 청년이 손을 들었다.

콘초바의 아들, 돈차드의 말에 좌중의 이목이 주목되었다.

젊은 청년이 영주들의 회의에 나서는 것은 심히 무례한 경우였으나, 반잉글랜드 연합의 수장인 오브라이언과 버크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청년은 그럴 만한 혈통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침략은 우리들만의 힘으로 이길 순 없습니다.”

“…동맹이라도 구하잔 말이냐?”

버크의 가주이자 돈차드의 외할아버지가 꺼낸 말.

그러나 돈차드의 아버지 콘초바는 그 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알바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게일어 명칭)은 이미 에드워드 그놈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영주들 또한 그에 동의한다는 듯 제각기 수긍했다.

그들이라고 왜 가장 큰 잠재적 동맹국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공동으로 잉글랜드의 야욕에 저항했던 알바 왕국은 지금 막 제임스 3세 치기에 벌어진 내전과 그들 내부의 종교전쟁으로 상당한 혼란기에 있는 상황. 오히려 잉글랜드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내정에 골몰하고 있었다.

게다가 1315년에 벌어진 알바―잉글랜드 전쟁에서 패배했던 알바―에린 동맹의 경우를 보면 두 세력이 합친다 하더라도 잉글랜드의 저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알바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차드의 엉뚱한 말에 영주들이 제각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넓히시지요. 이 섬들과 유럽 대륙의 국가들 너머로.”

돈차드는 하인에게서 받은 지도를 펼쳤다.

아일랜드 변방의 영주들은 아직 이런 자세한 지도를 보는 경우가 꽤나 드물었기 때문에, 돈차드가 가져온 지도를 보고 크게 놀랐다.

“상인에게 실로 거금을 주고 산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위해 얼마를 지불해야 했던가.

그러나 돈값은 한다.

돈차드는 지도의 오른쪽을 풀어 펼쳤다.

지도는 유럽과 에린섬, 그리고 브리튼 제도를 상당히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구도.

이 수많은 이해세력들 중 에린의 영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교황청 또한.

영주들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거나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 반응을 본 돈차드가 접혀있는 지도의 왼쪽 부분을 펼쳤다.

둘둘둘 펼쳐지는 지도는 처음에는 마치 백지마냥 공백이 죽 펼쳐져 있었으나 어느 순간 이후로 엄청난 크기의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은….”

영주들이 크게 놀랐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륙.

물론 고려에서 만든 지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해안선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았고 상당히 많은 왜곡(상당히 많은 축소)가 이루어진 지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려대륙이라는 곳은 압도적으로 넓은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다.

“고려라는 곳이 이렇게 큰 곳이었다는 말인가?”

영주들은 놀라 수군거렸다.

고려에 대한 소문 자체야 많이 들었다.

아무리 에린이 정치적으로 변방의 섬이라 하나 지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북유럽회사의 상인들도 많이 오갔다.

덕분에 지도를 살 때 고려의 금화를 지불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군소영주들이 이렇게 실제적인 묘사를 본 적은 실로 처음이었다.

그들이 한참 눈이 빠져라 지도를 바라볼 때, 한 영주가 입을 열었다.

“이 먼 나라를 이렇게 보게 된 것은 정말 개안을 한 것과 다름없으나, 지금 이들이 우리의 일과 무슨 상관이오?”

그 대답은 먼스터의 영주 타드 맥카시가 대신했다.

“…요 근래에 잉글랜드와 고려 간의 불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

돈차드는 그에 호응했다.

“맞습니다. 잉글랜드 해적 놈들이 우리의 해안을 약탈하다 못해 고려 상인들도 공격했지요.”

“…지긋지긋한 해적 놈들!”

영주들이 제각기 분통을 터트렸다.

요 근래 해안가를 공격하고 재물을 빼앗아가는 잉글랜드 해적들이 난동을 부렸다.

잉글랜드의 사략함대는 약탈에 관해서는 에드워드의 지령을 충성스럽게 이행했기 때문에, 에린섬의 해안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

심지어 골웨이나 리머릭 같은 큰 항구 또한 몇 번 해적들의 포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게일인들도 섬의 민족,

그러나 해적 놈들 때문에 바다에 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려의 대함대가 카나리 제도에 기항했답니다. 잉글랜드 해적의 토벌에 대한 명목으로요.”

돈차드의 말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저들은 너무 멀리 있기에 해적을 제대로 토벌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더 가까이 와야 할 겁니다.”

“…….”

돈차드는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읽었지만 계속 자신의 주장을 말해나갔다.

“우리의 항구를 저들에게 빌려주시지요.”

영주들은 그 말에 기함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 외지의 세력에 대해 저항했소!”

“새로운 외세에게 수그리자고? 섬을 팔아넘길 작정이오?”

“반대! 우리는 단 한 치의 땅도 저들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

돈차드는 시끌벅적하게 주장하는 영주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들의 시선을 받은 아버지 콘초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믿을 만한 자들이던가?”

돈차드 또한 그에 확답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잉글랜드인들보다는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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