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무타파 동쪽의 거대한 섬.
이 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계 일주를 한 탐험가 신원길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곳을 조금 탐험하여 칭하길, 두 부족이 가운데의 고원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다 기록했다.
무타파를 이루는 쇼나족과 비슷한 반투계 부족이 서쪽 해안에 살고 있었고, 그와는 조금 이질적으로 생긴 자들이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킬와 술탄국의 스와힐리 혹은 북쪽의 아랍 상인들은 서쪽 해안의 부족들을 공격하여 노예로 팔아넘겼다.
무타파만큼의 구심점이 없던 섬의 주민들은 이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고 아픈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고려의 개입 전까지는.
아주 예전부터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은 충분히 인지된 상태였다.
어쩌면 내륙인 무타파보다도 더욱 중요할 수도.
따라서 만종의 선교승들은 이곳에도 발을 디디기로 했다.
신원길이 수집한 정보에 따라,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섬의 중앙부에 도착한 승려들은 의외로 환대를 받았다.
서쪽 해안 부족들의 일은 그들의 일이었고, 중앙과 서쪽의 부족들은 다른 이들과 서로 평화롭게 어울리고 동화되며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같은 시기 무타파에 파견된 승려들보다는 여건이 훨씬 좋았다.
만종 승려들은 무타파와 비슷하게 이곳에서도 그들의 지식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외지인으로부터 불교와 농법을 도입하며 중앙집권의 실마리를 얻게 된 이들은 가장 강성한 세력인 바짐바족을 중심으로 새롭게 뭉쳐나가기 시작했다.
본디 이전까지 고려의 대외 문명 전파란, 고려에게 위협이 안 될 정도로 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
북려 원주민들을 생각해보면 명백했다.
그러나 무타파와 이곳 바짐바, 앞으로는 메리나(Merina)라 불릴 섬이자 왕국의 경우에는 달랐다.
자립이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지원을 한 것.
아직은 그들이 쌓아 올린 경험과 지혜가 고려의 것만 못하기 때문에 따라잡는 속도는 더디겠지만, 이미 한 번 제시된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은 훨씬 쉬울 것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돋움해야 했다.
* * *
고려가 남아프리카에서 대유럽 모략 활동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고려와 잉글랜드 양국의 외교 관계는 한동안은 상당히 괜찮았다.
에드워드 4세는 고려 황족과의 결혼을 했고, 얻은 권위와 돈, 그리고 왕비의 아름다운 미모에 상당히 만족했었다.
둘은 처음 몇 년간은 상당히 금슬이 좋게 지냈다.
하지만 세상일은 항상 이성적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특히 시대가 시대인 만큼.
군주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역으로 군주가 모든 것을 말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도덕 규범으로 자신을 스스로 속박해 놓지 않는 이상 이상적인 군주란 거의 보기 힘드니까.
세숫대야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을 적어놓고 항상 그것을 보며 반성하는 왕은 별로 없다.
문제는 분명히 에드워드 4세에게 있었다.
그의 능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전의 후유증으로 너덜거리는 잉글랜드를 수습하고 개신교를 통해 백성들과 신교회의 민심을 챙기면서 다시금 랭커스터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에 몹시 큰 공을 세웠던 것은 사실.
귀족들은 국왕의 권위에 조아렸으며, 롤라드파의 목사들 또한 왕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성정은 빈말로도 좋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첫째로 그는 상당히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 왕들의 대부분은 그러했으니 이는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둘째로 그는 어릴 적부터 상당히 잔혹했다.
장미전쟁의 참혹함으로 유년기를 보낸 영향이었던 것일까.
요크 가문의 포로를 잡았을 때 어머니나 다른 귀족들과 상의 없이 함부로 포로를 잔인하게 처형해버리기도 했으며 이제 소수 세력으로 전락한 가톨릭 신자들을 음지에서 박해하며 그들을 불태워 죽이고 고문하기도 했다.
내전 도중 자신의 편으로 전향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에 성공하도록 도와준 장인 리처드 네빌과 그의 딸이자 자신의 전 아내였던 앤 네빌을 정치적으로 숙청하며 주저 없이 목을 베어버린 것도,
참수는 외도를 벌인 것도 아닌 자신의 전 왕비에게 하기에는 상당한 극형이다.
셋째로, 그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했다.
전 왕비와의 결혼 생활 동안에도 하녀들과 수차례 관계를 가진 것도 모자라, 사생아까지 불쑥불쑥 낳아대었다.
사교계에서 그의 이러한 여성 편력은 몹시 유명했으며, 프랑스 국왕은 에드워드를 빈정거리며 ‘발정 난 영국산 종마’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
고려인 왕비를 들인 이후 조금은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웨일스계 여인이 사교계에 등장했고,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한눈에 빠져버렸다.
* * *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한 쌍의 남녀가 마침내 서로 떨어졌다.
방 안에는 둘이 흘린 땀 냄새가 가득했다.
이윽고 숨이 조금은 진정되었는지 여인의 옆에 누운 남자가 일어나며 침대 옆 탁상에 놓여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가 문득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Your highness), 그간 쌓인 게 많았나 봐요?”
에드워드 4세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다가 그녀의 짓궂은 말에 부드러운 살결을 약하게 때렸다.
― 찰싹
“아야!”
여인은 심술궂게 에드워드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깔깔거리며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에드워드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의 정부(情婦, Royal Mistress), 세실리아 위그모어의 다채롭고 매력 넘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몹시 흐뭇했다.
눈치가 빠르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항상 애교를 부리기도 했고.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여자인가.
서로의 궁합은 물론이고 태도까지.
방금 전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는 왕의 쾌락을 위해 힘썼다.
사랑하는 여인이 선사하는 아득한 황홀경을 맛본 뒤의 노곤함은 몹시 기분 좋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수많은 여인들을 품어왔던 그라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인 창양 해씨는 달랐다.
“왕비는 이리저리 떽떽거리기만 하지. 참 재미없는 여자라오.”
불쑥, 에드워드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세실리아는 난처한 듯 웃으며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으음, 그런가요, 정말 아름다우신데.”
빈말로도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긴 했다.
이국적인 고려인 왕비의 외모는 런던에서 엄청난 화젯거리였지.
왕비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젓가락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런던에 불붙은 듯 퍼져나간 것도 왕비 덕분이었다.
“게다가 지혜로우시잖아요. 그렇게 빨리 우리말을 배우시다니.”
왕비는 근면성실했으며 지혜로웠다.
에드워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야.’
거기에 더해, 왕비는 도덕적으로 몹시 엄격했다.
조금 상대하기 짜증 날 정도로.
유교적 사상이 많이 사라진 고려였으니 부부의 관계는 상당히 평등하게 올라왔고, 아내는 남편에 대해 마땅한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외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그러나 가진 지혜와 근면에 비해 눈치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은 여인이라, 가끔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 몇 번인가.
게다가 부부관계를 맺을 때, 마치 목석처럼 반응조차 없는 것을 보며 얼마나 정이 떨어지던지.
실로 대접받고 자라오기만 했던 고귀한 혈통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싶어하는 모양.
가장 결정적으로, 첫째 딸 이후 부부는 후사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왕가 여인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직계 중 상속 가능한 남성이 없을 경우(Male―preference primogeniture)에 한해서였다.
결국 왕권 자체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남아를 생산하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왕비 본인의 입지를 제대로 다지기 위해서도.
그녀는 둘째를 계속 유산하자, 상당한 부담과 중압감을 받는 모양인지 임신 동안 성관계 거부는 물론이고, 주변에 극소수의 하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졸지에 몇 개월간 홀아비가 되어버린 에드워드는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볼 때 당연하게도 참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한미한 귀족 가문의 부인, 아름다운 세실리아에게 홀딱 반해 그녀의 남편에게 적당히 사례한 후 그녀를 정부로 삼았다.
그래, 왕비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은 그의 카나리아가 자신의 품속에서 재잘거리고 있으니까.
“후후, 칭찬을 늘어놓다니, 당신답지 않아.”
왕의 면전에서 왕비의 뒷담에 동참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
세실리아 위그모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 왕의 표정과 말을 세심하게 관찰했었다.
그러나 이미 에드워드는 왕비에게 상당히 마음이 상한 모양.
그리고 반대로 자신에게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혀가 자신의 귓불에서 어깨, 그리고 가슴으로 내려가자 세실리아가 뾰족한 교성을 내질렀다.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다시금 내려가는 에드워드.
왕의 얼굴이 자신의 하복부로 내려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세실리아는 신음을 참는듯한 교성을 내지르며 천장을 보았다.
벌린 입에서 연신 터져 나오는 달뜬 신음에 비해 그녀의 눈은 쾌락에 잠겨있지 않았다.
서늘한 그녀의 눈이 마치 미래를 보는 듯 천장을 헤집었다.
* * *
북유럽회사의 사장, 남상덕은 근래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이 잘돼도 너무 잘되고 있었다.
전쟁특수는 여전해 유럽은 지금 식량과 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반대로 고려의 상류층들은 이국적인 유럽의 사치품들과 미술품들을 원하고 있었다.
질 좋은 북해의 목재들을 원하는 상인들도 있었고.
‘런던은 정말 좋은 곳이다.’
거의 대부분 우중충하고 지랄 맞게 변덕스러운 날씨를 제외하고는 북유럽 상단이 머물기에는 입지가 너무 좋았다.
런던이라는 아주 큰 대도시가 템스강을 통해 바다와 왕래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요리만 더 개선되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아참.”
상덕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 진상품 목록.
사업을 계속 진행해 나가기 위해선 잉글랜드 왕실과의 우호적 관계는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상덕은 매 분기마다 의례적인 진상품을 바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고려와 잉글랜드의 국혼이 성사되며 왕실에 강력한 끈이자 후원자가 생겨났다는 것이겠지.
여왕께서도 고려인 상인들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뒷배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번 분기에는 무슨 진상품을 드려야 만족하실까?’
여러 가지를 고민하던 상덕은 자신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들어오게.”
젊은 직원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어딘가 평소의 행색과는 달랐다.
“사장님, 웨스트민스터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상덕은 직원에게 작은 편지를 받았다.
정말 꼼꼼하게 밀봉되어 있구나.
“전하께서?”
시종에게 물어보면서도, 상덕은 자신에게 이렇게 작은 밀서를 줄 사람이 오직 한 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는 대놓고 편지를 보내셨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은밀하게 주셨을까.
주위를 물리고 편지를 뜯어 내용을 살펴본 상덕은 이윽고 탄식을 내뱉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런 젠장.”
저번 진상품은 임신에 효과적이라는 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특별히 왕비께서 요구하신 것은?
“독약…이라니.”
큰일 날 소리.
상덕도 나름대로의 정보망을 꾸리기 시작한 지 오래.
사교계에서 떠도는 소문을 수집하고 있긴 했었다.
왕과 왕비가 불화가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는 소문 축에도 못 끼는 상황.
재작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말이었으며 이제는 기정사실화가 되어 있었지.
그리고 최근 들어 나오는 소문은….
왕이 자신의 정부에게 홀랑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부가 저번 달에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것이고.
위험하다.
상덕은 싸늘하게 식는 등줄기의 땀을 느꼈다.
왕비께서도 눈이 뒤집히신 것이 틀림없었다.
왕의 외도와 계속된 자신의 유산.
그리고 차기 왕이 될 수도 있는 남자아이.
본래 로열 미스트리스, 정부란 존재는 유부녀가 대부분이었다.
사생아를 낳아도 원래의 남편에게 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군주들의 행동을 묵인해주었지.
그러나 에드워드는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만약 왕비가 남아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 사생아를 적법한 사생아라 공인할 수도 있다는 뜻을 측근들을 통해 넌지시 말하고 다니고 있었다.
측근들은 반으로 갈라졌다.
이것이 고려와의 국혼인 이상, 외교적 파장을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고 남편도 있는 정부 출신의 사생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오히려 고려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여왕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위신이 손상될 것이라 간언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자들은 왕의 의중만을 살폈다.
차츰 정치적으로 고립되어지는 왕비의 상황은 고려인 상단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암살을 꾸미시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당연하게 왕에 대한 암살을 꾸미는 것은 아니겠지.
그 정도로 분별없진 않으시니까.
하지만 정부와 그 아이를 암살하는 것은 왕을 크게 자극할 것이다.
왕을 직접 암살하는 것만큼이나.
“빌어먹을….”
상덕은 대양 건너편에 있는 고려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신비하게도 고려의 황실에서는 이런 추잡스러운 짓들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마치 모든 화근을 전부 다 잘라버리고 있는 것마냥.
설령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알 리가 만무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