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80화 (180/653)

아프리카

운하의 서쪽 끝, 태평양 쪽에 설치된 마지막 거점에서 출발한 범선은 돛을 아예 내리고 견인선에 의지해서 운하를 통과하고 있었다.

견인갤리선은 운하를 만들자마자 바로 건조에 착수된 함선이었다.

짐을 싣는 곳 등의 다른 부가적인 기능은 아예 없는 이 함선은 순전히 노를 젓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듯 설계되어 있었다.

거의 백 명에 달하는 노꾼들이 큰 노에 매달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배는 바람이 없어도 상당히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뒤에 그 덩치가 큰 범선을 매달고도.

범선 스스로가 운하를 통과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삼각돛을 펼친다 하더라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좁고 일직선의 운하에선 바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오도 가도 못 하게 된다.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대각선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운항법을 할 수조차 없던 것.

덕분에 이런 견인갤리선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견인선의 도움으로 몇 번의 갑문을 통과한 범선은 마침내 운하의 동쪽 끝에 도달했다.

겨우 오십여 리의 길이를 파내는 공사.

그러나 실로 힘든 여정이었다.

호수와 태평양 사이를 가로막는 조그마한 산맥(사실 산맥이라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고도였지만)을 파내는 공사는 만만치 않았다.

산맥을 수원으로 삼고 태평양과 호수로 흘렀던 자그마한 내천은 사람의 힘으로 더욱 깊이 파여져 결국은 이렇게 범선까지 운항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통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만한 노력을 투사할 수 있는 제국에 대한 경외로 부풀어 올랐다.

심지어 부동심이 강한 승려까지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실로 대단하구나.’

한 승려가 배의 갑판 위에서 인간이 빚어낸 시대의 걸작을 바라보았다.

오십 리의 운하가 마침내 끝나자, 그의 눈에 거대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호수 가운데 섬에 뾰족이 솟아있는 산까지.

범선은 호수에 도착하자 정든 견인선과 작별하고는 돛을 편 채 주변을 잠시 둘러본 후, 동쪽으로 가는 강의 입구를 찾아내었다.

니카라오강.

호수에서 발원하는 이 강은 아직 하천정비계획이 실행되지 않아 구불구불했지만 폭은 꽤나 넓었다.

수원지인 호수의 수량이 원체 거대해서 그런 걸까, 혹은 비가 자주 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덕분일까.

어찌 되었든 이제 삼각돛과 대각선운항으로 충분히 역풍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범선은 느긋하게 구불구불한 강에 진입했다.

배 주위에 다시 펼쳐진 주변의 풍광은 오로지 수림뿐.

익숙하지만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다시 볼 인연이 되진 않을 것이다.

승려는 갑판 위에서 강을 보다가 품에서 나뭇조각을 꺼내었다.

인연이 닿았던 아즈텍인 아이가 마지막으로 선물해 주었던 것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승려는 그들의 평안을 빌었다.

이 공사의 건설에 동원된 아즈텍인들은 고려 조정에 의해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삼십 년이 흐른 지금, 예전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생존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즈텍인 포로들과 그 후손들은 이제 새롭게 만들어질 니카라오 자치령, 즉 연방의 일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주변에서 농사를 짓거나 혹은 저렇게 품삯을 받고 견인선의 노꾼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아직은 운하의 통행 자체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일개 만종 승려 또한 앞으로 이 운하의 존재가치는 더욱 부각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즈텍 포로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 그리고 계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만종의 승려들은 임무가 끝나고 배를 타 다시금 그들의 작은 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종도 나름대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교리가 변화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무장주의 교리를 가진 불교.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잔혹해지게 된 계기 두 가지(타완틴수유와 아즈텍)는 모두 사라졌다.

게다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계도가 효험을 보여 포로들이 옛 업과 과오를 벗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격한 이후 만종 승려들의 살기 또한 많이 희석되었다.

약간 인종차별적이라 해석될 여지가 있었던 옛 교리가 사라지고 오히려 거시적인 포용론이 대두되었다.

― 천인공노할 죄업을 저지른 아즈텍인들 또한 이렇게 교화된 것을 보라.

― 그리고 저 포르투갈인들이 서아프리카에서 저지르는 짓을 보라.

― 악인은 출생과 피부 그리고 문화권과 쓰는 언어가 아닌, 하는 행동으로 구분 지어지는 것이다.

순화된 그들의 교리와는 별개로, 만종교국은 고려 조정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예전의 시중부터, 지금 새롭게 자리에 오른 시중까지.

그리고 조정 모두에게.

비록 조정은 만종 승려들의 숙원인 교국을 세울 수 있는 땅을 하사하긴 했지만 은연중에 그들을 마치 장기판의 말로 쓰는듯한 낌새를 여러 번 보였으니까.

* * *

만종 승려들을 실은 배가 마침내 교국의 항구, 대진에 도착했을 때, 승려들은 또다시 시중을 대면해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중의 명을 받은 전령이 대진의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하께서 소승들에게 또 무슨 볼일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배에 타고 있던 승려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적운(赤雲)이 평온하지만 약간 삐딱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의 주청에 대한 답신을 가져 왔습니다.”

“이번에는 꽤 빠르게 답해주셨구려.”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런 적운의 말에 전령이 목을 움츠렸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승려들, 그리고 그들의 허리춤에 있는 둔기를 보면 일반인들은 항상 주눅이 들곤 했다.

― 촤르륵

“…….”

서신을 펼쳐보는 적운의 표정이 흔들리자, 다른 승려들이 궁금해했다.

다른 스님들을 위해 적운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우리의 청을 승낙하셨습니다.”

“북중려에 대한 포교를 허락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대사(大師), 정확히 말씀해 주시구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적운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대륙에 대한 포교를 허락하셨소.”

* * *

개천 206년(CE1481).

민간의 주도로 처음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칙허회사(황제의 공인을 얻은 회사)라 볼 수 있는 북유럽회사와 서유럽회사와는 별개로 이 남아프리카회사는 순수한 민간의 자본이 모여 만든 회사였기 때문에 상징성이 꽤 컸다.

물론 이름부터 조금 이상했다.

포르투갈과 맺은 무관심조약에 따라, 고려는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을 꺼야만 했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사절이 꽤나 화가 난 얼굴로 고려에 방문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들 또한 고려의 황제가 사실상 통치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없음을 알고 있기에, 시중과 만나기를 청했다.

씩씩대던 포르투갈 사절이 상민의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

고려의 재상을 칭하는 정식 용어는 그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겠지만, 그의 입에선 그런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듯 폭포수같이 분노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재상 각하, 예전의 약속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상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갸우뚱했다.

“뭐가 말이오?”

천연덕스러운 말에 사절이 가슴을 두드렸다.

“아프리카에 대한 아국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예전 시중께선 우리에게 희망곶을 건네주시기도 했지요.”

“…그래, 그렇지.”

“아국은 그동안 고려에 대해 몹시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해상십자군에서도 발을 떼었으며 외교적 노력을 다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와의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오늘의 처사를 보니 그 모든 것이 실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흐음.”

상민은 턱을 쓸어내렸다.

“그대들이 해상십자군에 노후화되었더라도 범선을 판 일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오.”

“…그 일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닙니까?”

“그래, 굳이 끝난 일을 그대들이 지금 다시금 들추고 있군.”

여전히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보며 상민이 말했다.

“단순한 민간 상단들의 연합체일 뿐이오. 우리는 이들에게 어떠한 사사로운 개척의 권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너무 근심하지 마시오. 게다가 비자야나가르(남인도)나 구자라트(북인도), 바흐마니 술탄국(중인도)을 들러 희망곶을 돌아오는 그대들의 상단과 더욱 짧은 거리에서 교역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 아니겠소? 우리 민간 상단의 동부 진출이 그대들에게 더욱 많은 부를 가져다주겠지.”

“…….”

“게다가 제국 또한 그대들이 생산하는 작물들에 관심이 많은 바. 충분히 돈을 쓸 의사가 있다오.”

상민의 해명에 사절의 표정이 꽤나 누그러졌다.

“…노예는 사지 않으시구요?”

어림도 없지.

상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쉬움을 털어낸 사절이 이윽고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말했다.

“…확답을 받아도 좋겠습니까? 고려가 여전히 아프리카에 어떠한 개척지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사항을?”

상민은 피식 웃었다.

건방지긴 해.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고,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림이니 상민은 꽤나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새롭게 조약을 갱신해 줄 수 있소.”

그리하여 새롭게 체결된 개천 206년의 테네리페 조약.

이 조약은 다시금 포르투갈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아프리카 방면에 대한 사무역을 승인했다.

카나리의 회의장에서 마주한 두 나라의 실무자들은 기꺼이 서로 악수를 하였지만 그 사이에는 약간의 불화의 기미가 감돌기 시작했다.

해양에 영향을 투사하는 강대국끼리의 필연적인 불협화음이기도 할 것이며, 이제부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사무역에 의한 갈등이 생겨날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 * *

이후 남아프리카 주식회사는 고려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빠르게 발전했다.

희망곶으로 가는 직통 항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

해풍과 해류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선박이 건조되고 그에 맞는 항해술 또한 충분히 발전하니 드넓은 거리의 바다는 예전보다 확실히 좁아졌다.

바다를 왕래하는 상인들은 다시금 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부도덕적인 일로 만들어진 재화라도, 재화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민간은 상민만큼이나 도덕적이며 거시적이진 않았다.

남아프리카회사에 소속된 고려의 상인들은 앞다투어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만들어진 상업작물들을 역으로 수입해오고 있었다.

값은 폭락하고 시장은 요동쳤다.

상민은 이 현상의 근원이 자신의 통제범위하에 있는 이상 별로 대응하지 않았다.

정부의 경제정책이란 대개 득과 실이 공존했다.

항상 이득이 되는 정책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경험 누적 또한 아국의 경제를 단련시킬 것이니까.

‘다만….’

상민은 집무실에서 한동안 설탕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았다.

아직 정제기술이 발전하진 못했는지 이름 그대로 눈처럼 희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맛은 달겠지.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다.

사탕수수는 세계일주 당시 저 먼 아시아, 톤도 왕국에서 고려가 가져온 작물이었고.

본토에서 기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재배되는 상업작물이 되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들의 피로써 만들어진 재화이기도 했다.

상민은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설탕을 뒤적거리다 내려놓았다.

삶은 확실히 윤택해졌다.

이제는 집무실에서 카카오와 바닐라 향이 나는 달달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 순간이 도래하자 그의 입맛이 바뀌었는지, 이젠 단 것이 그리 땡기지 않았다.

혹은 그저 이 순간 어떤 생각이 들어 커피와 설탕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커피 대신 녹차를 들이킨 상민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서아프리카는 늦었다.’

그곳은 이미 포르투갈의 땅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전면전을 치를 생각도, 그럴 명분도 없었던 고려는 조약을 어김으로써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고 싶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먼 미래나 나라 간의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권위 하락을 불러온다.

게다가 서아프리카는 너무나도 많은 부족들이 살아가던 땅이었으며 구심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동아프리카는 다르지.

아직은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작았으며, 꽤나 큼직큼직한 부족왕국들이 존재해 있었다.

이 부족왕국들의 가진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어찌 외국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15세기의 초.

고려에 의해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하더라도 모두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상민은 먼 미래를 보았다.

지긋지긋한 인종차별.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갈등들.

증오는 누적되고 꼬리를 물었지.

보편적 인간들의 행복은 아주 단순하고 어이없는 차이에 의해 훼손되어지는 것이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두 번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시간은 금이라지만, 지금 현시대의 시간은 감히 금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하게 값이 비쌌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단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지.’

개척지를 만들진 않겠지만, 현지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들의 조약은 이에 관한 바를 전혀 규정하지 않고 있다.

고려는 동아프리카를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다만 남이 먹어서 배를 두드리는 것을 볼 생각도 없었다.

마침 알맞은 자원자들도 있다.

모든 종교는 팽창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만종은 항상 북려와 중려에 대한 세력 확장을 꿈꿨다.

조그마한 섬을 하나 주고 그곳에 마치 격리를 하듯 내버려 둔 고려 조정이었으나, 아쉬울 때 마치 용병처럼 써먹은 만종 교단에 대한 청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갈등거리를 만들 이유는 없단 말이지.

만종은 부려먹기 좋은 패였으나 그 특유의 성질로 인해 다른 불교들(천태종, 조계종)처럼 다른 종교와 공존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브라함계의 종교는 그 배타성이 강한데, 만종도 그러했으니 강 대 강의 갈등은 꽤나 자주 일어났다.

상민이 짜고 있는 북중려의 구도에서 만종은 항상 제외되어 있었다.

앙주와 진주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택주는 완충지.

그 밑의 중려는 쿠쿨칸교의 몫.

본토와 다른 개척지들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놔둘 것이었고.

그러나 여전히 빚은 있었기에 상민은 그들을 동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 승려들은 용맹하며 도전정신이 뛰어나고 하나하나가 불굴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압제자나 불의에 항거하려는 저항정신도 뛰어나다.

딱 알맞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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