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8화 (178/653)

떠오르는 열강들(2)

그러나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만고의 격언에 따라 상민은 잉글랜드와 통교하기로 했다.

그것도 모자라 북유럽회사의 현지 지사를 런던에 두기로 결정했다.

북유럽회사의 사장(社長) 남상덕(南常德)은 도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상재를 자랑하는 상인이었다.

개천 202년(CE 1477) 10월, 황실에 의해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먼 나라의 수도로의 여정을 떠났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북유럽회사는 상단이었으나, 상덕은 황실과 조정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그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외교사절이기도 했으며, 비공식적인 첩보망이기도 하다는 이야기겠지.

부를 창출하면서도 외교적 관계는 물론 모략적 활동들과 유럽의 소식들까지 전부 전해주어야 했다.

카나리와 카디스에서는 듣기 힘든 북유럽의 정세들 또한.

‘후우.’

예상되는 문제는 많았다.

일단 피부색도 있을 것이고.

오면서 몇 달간 짤막하게 잉글랜드어를 공부했었지만 그것이 충분할지도 잘 몰랐고.

자신이 성공회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적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범선의 선실 안, 설치된 고급 유리에서 거듭 자신의 복장을 확인한 그가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태까지 일이 힘들어서 못 해냈던 적이 있었던가?’

* * *

“환영합니다.”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 런던항에 발을 디딘 남상덕은 꽤나 반갑게 맞이하는 잉글랜드인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를 준비해놓았으니, 경께서는 바로 웨스트민스터로 가시면 되십니다.”

“어… 음, 본인은 경이라고 호칭받을만한 신분이 아니오.”

“고려분들은 겸손하다 들었는데 실로 그러하군요.”

상덕은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마차 안에 올랐다.

거리는 내전의 여파가 훌륭하게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

중세 유럽 도시 특유의 더러움은 여전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는 내전의 종식으로 인해 희망이라는 것이 떠올라 있었다.

“의욉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능숙한 고려어를 구사하는 안내자의 말에 상덕이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환대를 받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소.”

기항을 하고 지금 이렇게 안내를 받는 순간까지.

솔직한 말로 고려인들은 지금껏 유럽인들에게 그렇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카나리는 이미 고려의 땅이 되었으니 제외한다 치고, 카디스에서조차도 그러했다.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고려인들을 침략자로 보았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포르투갈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더 나았으나, 그곳에서도 가톨릭이 주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거부감은 있었던 모양.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달리 생각하는 모양이다.

상덕은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에드워드 4세를 알현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낼 수 있었다.

인사를 주고받고, 만찬을 하는 와중에도 에드워드 4세는 끊임없이 상덕에게 고려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으며 친밀하게 굴었다.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우리 개신교 국가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지 않겠소?”

상덕은 먹던 음식을 뿜어낼 뻔했으나, 가까스로 삼켜냈다.

음식들이 하나같이 더럽게 맛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언제부터 고려가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지.

‘설마 이거를 보고 하는 말인가.?’

상덕은 자신의 목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에는 고려 성공회의 십자가 걸려있었다.

그러나 상덕은 가끔 목욕을 할 때나 그 존재를 상기하곤 했다.

외조부가 프랑스인, 어머니는 청해 출신으로 나름대로 태어나자마자 성공회의 세례를 받았으니 모태 종교라 칭해도 무방하다지만 그는 아주 세속적이며 바쁜 상인이었으니까.

가장 최근에 성당을 간 적이 대체 언제였는지.

어찌 되었든 이유는 제대로 짐작한 것 같긴 했다.

자신의 목을 흘끔거리는 에드워드 4세를 바라본 상덕이 슬쩍 웃음 지었다.

세상은 참으로 빨리 바뀌는구나.

불과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는 머리에 뿔 두 개가 달린 사탄이 이끄는 이교도 국가라 칭해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를 비롯한 고려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당대의 유럽인들은 고려가 성공회를 공인하고 동로마의 유민들을 수용하며 정교회까지 받아들이자 서서히 이들을 이교도 제국이라는 편협한 이름으로 불러대지 않고 있는 모양.

이해는 갔다.

성공회의 초대 총대주교 마티외는 개신교들의 사상적 성인이라 불릴 수 있었으니까.

동쪽의 메흐메트 2세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휘둘러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는 충분히 대조적이었다.

충분히 대화가 통하는 같은 종교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전하께서는 포르투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드워드 4세는 상덕의 반문에 잠시간 말이 없다가 한 방 먹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렇소. 잘 보았구려. 우리 양국의 동맹은 끈끈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가문과 결혼으로 이어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장미전쟁의 시작부터 그들을 지지해온 충실한 동맹, 종교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쉽사리 틀어질 사이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4세는 은근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와 포르투갈이 좋은 관계를 이어가듯, 고려와 우리 또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겠소?”

에드워드 4세는 국혼을 제의했다.

상덕은 놀라서 그만 포크를 떨어뜨렸다.

“…전하께서는 이미 혼인을 하셨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고려는 대다수의 신민이 일부일처의 풍습을 띠고 있었으나 황실은 예외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예 축첩제가 불가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에드워드는 상덕의 반응에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집안일이라 내밀히 말하기는 좀 그렇군. 그러나 곧 정리될 것이오.”

에드워드 4세가 갑자기 냉랭한 기색을 품자, 상덕은 말실수를 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화제를 전환할 겸 가져온 선물 중 하나를 열기로 했다.

“소신이 조그마한 선물을 하나 가져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보여주시오.”

상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이 잉글랜드 기사들의 감시하에 목함을 열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상덕은 꺼낸 것들을 정돈한 뒤, 에드워드 4세의 시종에게 끓인 물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시종이 마침내 끓인 물을 가져오자 상덕은 그 온도를 확인한 후, 괜찮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4세는 흥미롭게 상덕의 행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끓이는 일련의 우아하며 정중한 행위는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윽고 완성된 녹빛의 투명한 차.

상덕은 외국 군주에게 자신의 작품을 대접했다.

“차(茶)라 하옵니다.”

“차(Chaa)?”

명확하며 직관적으로 부를 수 있는 말에 에드워드 4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의 염려스러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입에 그것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순간 잉글랜드 기사들이 분노하며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시종들이 우왕좌왕했다.

“난 괜찮네.”

에드워드가 데어버린 혓바닥과 입천장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하자, 상덕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흘릴 수 있었다.

대범하다는 성격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전하, 차는 그렇게 드시는 것이 아니오라….”

상덕은 차근차근 그에게 차를 달이는 법과 그 예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명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불교 전통 덕분에, 고려의 다례 또한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몹시 차를 사랑했다.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로 쓰이는 차(茶)례와 흔히 쓰는 일상다(茶)반사라는 말 자체가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이라는 뜻에서 기원했을 정도였으니까.

차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중려에서 발견한 카카오와 백란.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커피까지.

이들 모두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고려인들은 여전히 아주 먼 과거 반도에서 가져온 전통차 또한 즐기고 있었다.

차나무는 현재 남북려의 많은 곳에서 길러지고 있었다.

외국인이 차를 좋아할까?

윗선이 꼭 이들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강권하여 어쩔 수 없이 따르고는 있지만 상덕은 의구심을 품었다.

차의 진미를 모르는 저 표정을 보라.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이 복잡해 보이고 경건한 의식이 마음에 쏙 들었다.

있어 보이지 않는가?

게다가 수준 높은 고려의 문화라니.

더없이 매력적이다.

물론 그 결과물은 처음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려에서 최고로 꼽히는 건양의 차라 하긴 했지만 여전히 텁텁하고 썼다.

‘하지만 국왕은 모름지기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법.’

이국적인 다례는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4세는 차를 달인 쓴 물을 꿋꿋하게 마셨다.

언젠간 익숙해지겠지.

* * *

회담 이후, 상덕은 순조롭게 런던에 둥지를 틀었다.

잉글랜드는 엄밀히 따지면 북유럽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북유럽회사의 시장이 된 것.

상덕은 회사의 상인들로 하여금 잉글랜드는 물론 신성로마제국 북부와 부르고뉴 및 저지대, 그리고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및 발트해의 국가들에게까지 상로를 확장하라 지시했다.

‘어쩌면 이 잉글랜드에 둥지를 튼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종교전쟁의 광기가 한 번 흐르고 수습된 잉글랜드는 제일 좋은 여건의 땅이었다.

런던의 위치도 무역을 하기에는 몹시 좋았다.

국왕부터가 고려에 우호적이다.

게다가 내전을 치른 먼 지방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들섹스 지방은 이미 확고한 롤라드파의 기풍이 들어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상황.

상덕은 런던에서 유럽의 상황을 관찰했다.

실로 난리도 아니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은 서로를 이단으로 몰며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잉글랜드의 롤라드파화가 이들에게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1470년, 신성로마제국은 거대한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다.

저지대와 프랑스까지도.

북이탈리아 일부까지도.

그리고 저기 스칸디나비아의 왕국들까지도.

불길은 미친 듯이 번져 나갔다.

상덕은 여러 업무를 하면서도 이 사실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기로 했다.

마녀사냥이라며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는지.

죽이는 방식이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했는지.

꼬챙이, 화형, 말뚝, 관, 도르래를 이용한 능지형과 톱질형.

그리고 기타 수십 가지 잔인한 처형법.

이 시대 이 유럽의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잔인했는가.

책을 만들면서 상덕은 거듭하여 한탄을 내뱉었다.

정말 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것 말이지.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니로구나!”

한탄과는 별개로, 북유럽회사는 전쟁특수를 제대로 노렸다.

런던에 자리 잡자마자 엄청난 이윤을 창출해내기 시작했던 것.

고려에서 밀과 품질 좋은 철제 병기를 가득 실은 함선이 런던에 도달했다.

런던에 온 한자동맹과 저지대의 상인들은 미친 듯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그 물자들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도시들로 서둘러 돌아갔다.

저 종교전쟁의 지속력은 이러한 물자공급일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직 개신교들을 믿는 영주들의 세력은 크게 약했으니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대국 프랑스의 왕이 모두 가톨릭을 수호하겠다 천명한 이상, 신성로마제국 북부와 저지대의 일부 제후들로는 그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북유럽회사는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을 제공했다.

돈이 없다면, 심지어 어음까지 받았다.

이유는 뻔했다.

어찌 보면 가장 나쁜 존재들은 이러한 아비규환에서 이득을 취하는, 그리고 심지어 그 불길을 부채질하고 있는 고려인들이 아닐까.

상덕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식량을 대가로 온갖 종류의 보석과 귀금속, 그리고 수만 가지 물품들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지불을 할 능력이 없었다면 어음으로, 그리고 정치력으로도.

금에 환장한 놈들이라는 경멸은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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