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5화 (175/653)

첫 번째 열강

상서령 이도가 졸한 이후.

상민은 해광과의 약속대로 다시금 도성에 돌아와 정무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윤허를 받아 몇 년간 휴식기를 지냈다.

새로운 신분으로의 전환 기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민은 막연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는 없었다.

그는 한동안 여러 지방을 순방하기로 했다.

자신의 일이 책상물림이 되지 않게 스스로 돌아보며 경계하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고귀하여 운신의 폭이 좁았던 자신의 옛 아내들과는 못했던 여행을 연화와는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말 못 할 아주 사소하고도 중요한 일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당장 어떠한 파급력을 가져올 것은 아니었고.

잔은 세상을 먼저 떠났지만, 연화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기 왕성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이미 진작 독립을 했기 때문에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둘은 3년에 걸쳐 바다와 대륙을 여행했다.

둘 모두 자유를 구속할만한 특정한 신분이 없었기에 여행은 평화로웠다.

태평양과 대동양을 모두 돌아보는 거대한 여정.

꽤 많은 진전을 이루어낸 운하였지만, 아직 개통은 다소 요원해 보였기에 상민 일행의 여정은 남부항로를 이용하는 대장정이었다.

심지어 저 멀리 고려제국의 최서단이라 부를 수 있는 하와이까지 갔으니 삼 년이라는 세월은 어찌 보면 당연한 기간이었을지도.

하와이는 미주의 지방으로 편입된 지 오래였으나, 관리는 몹시 미흡했다.

이제는 미주도 나름대로 규모가 커졌으니 하와이 같은 태평양의 중요한 섬들에 대한 통치권을 확실하게 세우라는 당부를 남긴 상민은 본래 이곳에 온 목적을 이행하기로 했다.

“저 배들은 왜 남는 거죠?”

연화가 물었다.

“각기 할 일이 있다오.”

상민과 함께 온 배들은, 그의 명령대로 태평양 이곳저곳의 섬들로 흩어졌다.

뭘 잔뜩 실은 것 같긴 한데.

연화는 그 정체가 뭔지 몰랐으나, 흔히 있는 상민의 비밀이라 여기고 딱히 질문하지는 않았다.

* * *

여행 기간 동안 상민은 배에서 책을 읽었다.

위정자라면 학문의 발전이 어떤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아야 했다.

여러 가지 학문을 다룬 책들을 읽던 상민은 별생각 없이 다음 책을 펼쳤다.

이번 책은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에 관한 책이었다.

재미가 있겠군.

그리고 상민은 정신없이 그것을 읽어내렸다.

단순한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도가 남긴 유책(遺冊)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겠구나.”

상민은 그 과학책을 읽은 뒤 천천히 내려놓았다.

지식의 발견에 따른 찬탄과 예상되는 파급효과에 따른 약간의 불안함이 공존했다.

그는 수염을 매만졌다.

‘이제까지 내가 했던 정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또 상민이 버릇처럼 하는 겸양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민 본인은 진실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부의 적이 아닌, 고려 내부의 적은 그동안 변변치 않았다.

주제도 모르는 정적들은 오직 하나의 단순한 원리원칙에 의해 움직였다.

권력을 쟁취하고 싶다는 욕망.

정체도 모르는 가면을 쓴 시중을 제치고 스스로가 일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하는 자들.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

혹은 황금을 얻고자 하는 욕망.

수많은 사업들, 그것이 설령 불법적인 일들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여기며 탐욕을 부리는 자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대단한 정치적, 경제적 감각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상민은 이미 출발선부터 다른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아득히 먼 옛날부터 달리고 있던 자.

이미 끝도 없이 벌어져 있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과 그동안 달리면서 단련된 정치적 역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중년의 정치인도 감히 상민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일반 백성이 아닌 국가의 지도계층, 위정자나 거상들에게는 더없이 엄격하며 잔혹했던 상민은 역모 또는 대규모 범죄가 획책되거나 시도되었다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그 근본과 배후, 동료들까지 전부 박살을 내었으니까.

처형당한 자들.

먼바다에서 수장당한 자들.

독약으로 암살당한 자들.

이미 그 시신조차 썩어 문드러졌을 수많은 정적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모두 실로 사특하고 음흉하며 간계와 악의가 넘치는 자들이라 평가받았었지.

그러나 상민은 단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뻔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이는 다 큰 어른이 아이의 치기 어린 장난을 보는 것과 같았다.

대중매체가 묘사하는 천재적인 크리미널 마스터마인드?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제국이 가진 가장 짙은 그림자가 자신일진대, 어떤 어둠이 그에 감히 견주려 하는 걸까.

상대가 하나의 인간이라면, 그는 정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상대가 소규모의 조직이라도 무서워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수많은 지식인들, 수많은 군중들과 백성들이라면?

그래.

상민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

세상 어떠한 위정자도 그들을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림자요, 저들은 빛이다.’

상민은 그 빛이 자신이 애써 피운 계몽의 빛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가냘픈 촛불이었으나 이제는 제법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과 같았다.

나중에는 점차 크기가 커져 거대한 모닥불이 되겠지.

그래서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그림자의 크기가 줄어들어도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문제는.

‘불똥이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는 것이지.’

바람에 날린 불똥이 엄한 곳으로 날아가 화재를 일으키는 것처럼 본래 문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춰야 할 횃불이 이미 세운 문명을 불태우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미래에서 온 인물로 그와 같은 일들을 익히 배우고 알고 있었다.

상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으로 인해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와, 앞으로 해야 할 정치, 그리고 그다음으로 해야 하는 정치는 다를 것이다.

후자가 명백하게 어려울 것이며, 훨씬 파급력이 클 것이다.

대중들은 그 덕분에 이제 깨어나고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했으며, 당연시여기던 것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사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하나하나가 마치 지뢰밭처럼 느껴졌다.

상민은 책을 서랍에 넣었다.

제목은 다시 보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기억한다.

[원생의 섬, 고종도과 그 생태]

남려대륙 서쪽에 위치한 고종도(孤種島, 갈라파고스 제도).

발달하고 있는 생물학에 위대한 진전을 일으킬 중요한 섬.

고립무원의 땅에는 수많은 대륙과 참으로 이질적이면서도, 유사한 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저자, 박래광(朴來曠)은 생물학자로서 이 섬들의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해낸 모양.

상민은 잠시 깍지를 끼고 서랍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종이를 펼쳐 명령서를 작성했다.

― 연구 목적의 일행을 제외한, 고종도에 대한 모든 출입을 엄금한다.

항상 그렇듯, 그는 발생될 상황을 지레짐작하여 두려워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고 다짐했을 뿐.

‘진화론’의 발견은 언젠가 이루어질 일이었다.

* * *

개천 200년(CE 1474) 5월.

고려가 건국한 지 이백 년이 흘렀다.

인구는 엄청난 성장률을 기록했다.

고려 내방, 즉 남려의 총인구는 1,297만 명에 달했다.

동시대에 활발한 개척사업을 진행시켰던 것을 감안해보면 실로 고무적인 수치였다.

평균 성장률은 연 2푼 위를 웃돌았다

21세기의 아프리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항생제도 없는 시대에서 이 정도 수치란 자연발생적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유입이 있었다는 결과로 해석될 것이다.

정복 원정을 떠난 지 벌써 칠십 년이 지난 지금, 타완틴수유는 이제 거의 흡수되고 동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치안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고, 주민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생각했으며 같은 언어와 같은 문자를 쓰고 있었다.

사민정책의 결과로 개척지들 또한 자리가 잡혔다.

앙주의 인구는 56만 명에 달했고, 미주는 47만 명, 화주는 41만 명, 진주는 39만 명, 기주는 29만 명, 택주는 19만 명, 파주는 12만 명에 달했다.

북려의 우호 원주민 규모는 앙주의 인구와 비슷했으며, 서서히 그 규모를 흡수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개화파들은 무리들을 선동하여 고려에 귀순하기 시작했다.

연방의 일원이 된다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고려는 그들에게 토호의 작위를 내리고 일정 기간 동안의 자치권을 주었다.

중려의 세력 또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틀라카엘렐이 다스리던 테노치티틀란은 도시를 둘러싼 수많은 적들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버텼으나 그의 사후 무기력하게 함락당했다.

수도가 불타고, 어마어마한 수의 아즈텍인들이 살해당했다.

그들의 원수이자,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의 주요 피해자들에게.

그러나 이 중려의 반아즈텍 연합군도 결국 사분오열되었다.

한때 동료였던 소국들은 서로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적으로 돌변했다.

덩치가 제법 컸던 퓨레페차는 테노치티틀란을 먹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지만 틀락스칼라 공국의 뛰어난 지도자에게 큰 패배를 당하며 테노치티틀란을 빼앗겼다.

이후 틀락스칼라는 고려의 허락을 받고 새로운 왕국을 칭했다.

그 후로도 두 왕국과 세 공국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서로 싸워대었지.

가끔은 마야가 참전하기도 했다.

상민은 어느 한쪽이 우세한 것을 원하지는 않는 터라, 일시적인 평화를 중재하면서도 내심 세력 균형을 꾀했다.

‘전쟁과 같은 갈등이란 대개 고통스럽지만 무엇보다도 빠른 진보를 수반하기도 한다.’

중려는 무척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고려는 그들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 * *

열강(列强, 라틴어: Potestates)이란 말은, 개천 200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고려의 국방백서(國防白書, 군무부에서 발간하는 5년 단위의 국제보고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처음 등장한 용어니만큼 다소 정의가 난립하고 있었지만, 고려의 상황에 맞게 가장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은 다음과 같았다.

― 자국이 위치한 지역 혹은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강력한 국가.

범선의 발달과 대항해시대의 개막.

그로 인해 자신이 있던 조그마한 바다와 동네가 아닌, 정말로 아득히 먼 거리에 정치력을 투사할 수 있는 강대국.

분명히 고려는 단연코 이 시대의 첫 번째 열강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수는 본래부터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현시대의 중원보다는 적겠지만, 가진 역량은 비교가 불가했다.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잠재력은 보고서에 적힌 평면좌표상의 도표가 무서울 정도로 우상향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남북려가 하나의 단일한 대륙이라고 여겨지진 않았고 대신 거대한 두 대륙이 아주 작은 땅에 의해 붙어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비슷하다 생각하였기 때문에, 두 대륙에 걸친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고려는 명실상부한 열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존재였다.

사실 카나리까지 합치면 세 대륙이겠지만.

군사적 영향력은 딱히 말할 필요도 없다.

두들겨 맞은 카스티야가 눈물을 흘리며 내준 카디스가 이를 증명한다.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도 마찬가지.

이미 지중해에는 고려의 원, 환, 냥이 떠돌고 있었으며 조악한 위폐도 보였고(애석하게도 처벌하진 못했다.), 수많은 상인들은 앞다투어 카나리와 카디스에 연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동양적 문명에서 기원했기도 했으며 완전히 새로운 대륙에서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고려만의 문화는 여러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여러 방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고려글은 비유럽권 문자(비라틴어계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 가장 흔하게 쓰이는 문자가 되었고, 고려어 또한 여러 곳으로 파생되어 쓰이고 있었다.

물론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은 있겠지.

그러나 그런 국가들 또한 굳이 나서서 저 위험한 짐승의 코털을 잡아당기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까지.

갈리스토 3세 사후 새롭게 교황의 위에 오른 바오로 2세는 동로마의 멸망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깨달았는지 이제는 반대로 고려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마녀로 여겨졌던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연 바오로 2세는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고는 이미 시체재판을 했던 펠릭스 5세에게 다시 한번 죄를 떠넘겼다.

그리고는 대성당에서 고려의 정교회(동로마, 그리고 살아남은 진주의 정교회를 말한다.)를 형제라 칭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미사를 드렸다.

이단과 한창 싸우고 있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몹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상민은 그 손짓을 받아들였다.

딱히 안될 이유는 없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국제정세라면, 그의 반대도 성립한다.

게다가 상민이 항상 속으로 말하는 것이 있었지.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나만 빼고.

유럽 북부를 휩쓰는 종교개혁이 끝나고 설립될 개신교 국가들을 막연하게 고려의 우방이라 칭할 수는 없었다.

탄력적인 외교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구원(舊怨)은 털어내는 것이 좋았다.

이번 일은 명백하게 교황청이 고려에게 고개를 숙이는 뉘앙스였으니, 손상될 위신도 없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고려와 교황청 간의 관계는 해상십자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며, 교황은 사방의 적들(북쪽의 개신교 이단과 동쪽의 이슬람)에 서쪽의 고려라는 적을 추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