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사람들과 새로운 시대
개천 196년(CE 1470) 2월.
앙주
동래미
의원은 조심스럽게 깃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고인의 코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인은 옛날의 흑발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회색빛의 머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숨은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
깃털은 한 치의 미동도 없었고, 사람들은 조금씩 흐느꼈다.
의원은 몸을 가지런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승하(昇遐)하셨나이다.”
어머니는 영면에 드셨다.
무표정하셨지만 아주 살짝 미소를 짓고 계시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쿵.
마치 거세게 자신을 누르는 듯한 압력감.
고인의 머리 위에 올려진 왕관이 거대한 돌이 되어 자신 머리 위로 올려지는 감각.
그래서 그녀는 제대로 슬퍼할 수가 없었다.
― 딸, 너는 해낼 수 있어. 엄마는 널 믿어.
한 번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절제해 낸 마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국장을 치를 준비를 하세요.”
착 가라앉은 왕세녀의 말에 신하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언니…….”
동생 엘루아즈와 에드몽가르드가 그녀의 옆에 와 흐느꼈다.
울음을 전파하려는 건지, 위로를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다.
“괜찮아.”
저 멀리 삼촌 자크, 진과 피에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고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들은 별말 하지 않고 다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분명히 천국에 들어갔을 거니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크흠, 네 어머니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자 누나였다.”
“음… 애도를 표한다.”
마고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고마워요, 삼촌들.”
이 먼 친척들은 잔의 즉위와 비슷한 시점에 프랑스에서 앙주로 건너왔다.
잔의 어머니와 아버지, 즉 마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물론 그들의 자식, 외숙부들까지.
잔은 이들을 무척 환대했으며, 원칙상 영지를 줄 수는 없었지만 동래미에 큰 저택과 풍족한 재물을 주어 편히 지낼 수 있게 배려했다.
아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작은 마을의 조세징수관(이라고 해 보았자 일개 농부나 다를 바가 없었다)의 딸에서 장군 겸 성녀로.
구국의 영웅이자 성녀에서 다시금 이단자 혹은 마녀로.
이단자 혹은 마녀에서 이제는 머나먼 땅의 여왕으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인생의 변곡점을 지난 잔 덕에 상당히 많은 고초를 겪었던 드 아르크 가문은 그래도 나중에는 풍요로운 새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발루아 가문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일약 고귀하고 고귀한 가문이 되어서.
‘그러나 엄마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지.’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 큰외삼촌 자크.
마고는 큰외삼촌과는 사이가 몹시 좋았다.
하지만 자크를 제외한 외삼촌인 진과 피에르는 처음 그렇게 영지를 달라며 어머니에게 비굴하게 간청한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표리부동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남매들에게 토지와 세습 작위를 봉해 달라고 얼마나 떼를 썼는가.
그 추악한 외삼촌들은 지금은 친지보다는 괴물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근래에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지자 이 늙은 외숙들의 권력욕은 한층 더 흉측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자신들은 앙주의 왕가 드 아르크 가문의 유일한 남성들이라고 동래미를 들쑤시며 개소리들을 지껄이고 다닌다지.
그녀가 걱정해야 하는가?
딱히.
마고는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장례와 대관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고려 황실 및 조정과의 여러 의전과 안건 조율로도 그녀는 이미 충분히 바빴다.
‘게다가…….’
어머니는 죽었으나, 의지할 만한 다른 존재는 아직 살아계시니까.
그리고 그분은 내가 늙어서 죽는 순간까지도 나보다 먼저 가시지 않을 테니까.
* * *
진과 피에르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어찌 여자가 일국의 국왕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의 옛 조국 프랑스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여자를 배제한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살리카법에 따라.
살리카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에서 기원하여 지금까지도 여성 황족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
진과 피에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여동생 잔이 비록 고려의 황족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세 명의 딸밖에 보지 못했다.
만약 아르크 가문의 남자들이 조금 더 열심히 고려의 황제에게 빈다면 고려의 황제는 익숙한 고려의 법도에 따라 진이나 피에르에게 황가의 여인들을 맺어주고 아르크의 가문을 이어나가게 해 주지 않을까?
게다가 잔의 남편이라는 해우석은 잔의 승하 직전에 이미 훙하였다고 들었으니, 그쪽 친왕계에서 올 일말의 방해 요소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망상은 계속 재생산되며 사방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권력은 그만큼 향기롭고 달콤해 보이는 과실이었다.
진과 피에르는 동래미에 있는 프랑스계 고려인들 중 권세가 있는 자들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친분과 우호를 다지기 시작했다.
앙주에는 그들의 권리상 주지사가 파견되지 않지만, 여전히 중앙 중서성에 파견될 의원들은 선출하고 있으니. 이 중서성 의원들을 어찌 잘 구워삶는다면…….
* * *
늦은 밤.
― 쿵쿵쿵
고려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이자 촉망받는 정치가, 젊은 중서성 의원 황도해의 집 문을 두드린 진과 피에르는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어색한 고려말로 연신 행랑아범을 불러대었다.
“게에 아아무도 어없느냐?”
그러나 황도해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설마 이 밤에 마음 편히 자고 있는가?
그러나 계속된 그들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는 걸 보니, 어쩌면 집 안에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진과 피에르는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자택 말고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이 시국에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형, 다른 의원을 찾아가 봅시다.”
“그래! 그래 보자.”
그러나 그들은 다른 중서성 의원에게도 와병을 핑계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번 의원도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히 지난주까지만 해도 술을 같이 마셨을 정도로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왕가의 큰 문제에까지 관심 가지지 못할 정도로 앓아누웠다?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들은, 여태껏 진과 피에르가 만들었던 수많은 인맥들, 즉 상인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심지어 장다름들에게까지도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쌓아놓은 정치적 영향력이 일순간 거세된 것처럼 느꼈다.
동래미와 정북행성의 모든 요인들은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진과 피에르를 피했다.
심지어는 성직자들마저도 그들의 접견을 거부했다.
아마 고해성사조차 거절당할지도 몰랐다.
“이게 무슨…….”
사람들은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예전, 그들이 잔의 진노를 샀을 때에도 비슷한 일을 겪긴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단순한 분노와 실망보다는, 이번에는 저 냉대 안에 숨겨져 있는 살기가 번뜩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날카로운 단검과, 아주 강력한 독약을 품은 채로.
저택과 골목,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잠을 자는 순간부터, 식사를 하는 순간, 심지어 용변을 보는 순간까지!
무언가 꽉 그들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손에 힘을 쥐면, 퍽 하고 온몸의 혈관과 장기, 뇌수가 터져버릴 만큼 강력한 압박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으으으…….”
잠 못 드는 불안한 나날들.
진과 피에르는 어둠 속에서 표출되는 노골적인 위압과 협박에 못 이겨 동래미의 저택을 팔고 새롭게 개척되고 있는 앙주 북부의 작은 도시로 도망가야만 했다.
누군가 그들의 귓가에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옛 인연의 혈육일 뿐이니.
내가 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내리는 이 자비를 알아차리고, 다만 조용히 살아가거라.
* * *
달이 밝은 밤.
동래미 앞에 흐르는 미시시피강.
한 남자가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드리워진 낚싯대에는 바늘과 찌 모두 없다.
앞 물결은 뒤 물결에 의해 밀려나며 앞으로 흐른다지만.
영원토록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물줄기에 낚싯대를 던지란 말인가?
그는 몹시 슬펐다.
제대로 된 신분으로, 아내의 죽음을 나서서 애도할 수도 없다.
단지 그녀가 매장된 무덤을 바라보며, 이미 딱딱해져 딱지가 앉았다고 느꼈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낼 뿐.
― 후우
깊어가는 밤만큼이나 한숨도 깊어졌다.
― 자박자박
근처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상민은 등 뒤를 보지도 않고, 단지 옆에 있는 간이 가죽 의자를 펼쳤다.
― 털썩
아름다운 흑발의 여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잔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이 여인은 혼혈 특유의 이국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 그리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축복받은 강건한 신체.
상민은 문득 웃음 지었다.
그래도 자식 하나는 잘 길렀구나.
“…….”
“…….”
간이 의자에 비슷한 자세로 앉은 부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빈 통을 보고 아버지를 약간 놀리는 듯 물었다.
“물고기를 잡는 거예요, 마는 거예요?”
“잡아보았자 무얼 하겠느냐?”
흘러가는 듯한 말이었지만, 여인은 그 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맛있게 먹겠죠.”
“이미 다 즐겨본 것들이고, 다 경험해본 것들이니라.”
“…그렇다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네 말이 맞다.”
자식에게는 항상 져 주는 것이 좋았다.
딸은 이미 귀여울 정도의 나이를 지났고, 이제는 어엿한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세계 정국에 발을 내디딜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가실 거죠?”
정북행성은 후임자가 인수인계를 받았다.
다만 이제는 그 수장이 시중의 품계가 아닌, 상서의 품계로 격하되었다.
북려가 자리잡힌 먼 나중에는 철폐가 될지도 몰랐다.
상민은 다시금 내려가 봐야 했다.
이는 작별을 의미했다.
“그래.”
“다시 오실 거죠?”
부녀 모두 이 말을 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제국의 시중과 왕국의 여왕.
아버지와 독립한 딸.
앞으로의 접점은 과연 얼마나 될는지.
“…그래.”
그래도 아버지의 앞이라고 억지로 미소를 머금는 딸을 바라본 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맏딸의 손등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여왕 전하, 천세를 누리소서.”
마고는 울음을 터트리며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 * *
개천 196년(CE 1470) 4월.
고려
창양
“늦었군.”
상서령 이도가 졸했다.
그의 시신은 아직 발인하지 않았다.
상민은 다만 죽기 전, 그와 대면하지 못한 것을 심히 안타깝게 여겼다.
잔의 장례 이후 곧바로 배를 탔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상주 이향은 조문객들을 받고 있었다.
상민은 호위를 물리고는 품속에 있는 가면을 만지작거리다, 그것을 쓰지 않고 빈소에 발을 디뎠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리저리 바쁜 이향 대신 삼베 상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물었다.
“정북행성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다른 빈객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고인에게 몇 번 절을 한 상민은 문득 그를 부르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저기,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 *
“이것을 왜 저에게?”
상민은 조용한 방에 들어가 이홍위와 독대했다.
“할아버님께서는…… 이 책을 소손에게 전하며 말씀하셨지요.”
홍위는 잠시 상민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분이 꼭 빈소에 올 것이니, 너는 그분에게 이것을 전달해다오… 라고.”
“…그분이 누구인 줄 알고 그리 말씀하셨답니까?”
홍위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또한 그분은 남들에게 드러내 보여지는 것을 싫어할 것이며, 제 아버님과 숙부님께도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상민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틀림없이 그 비범한 분을 한 눈에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여전히 상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저는 귀공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다만 할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을 받들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상민은 내밀어진 책을 받았다.
꽤 두꺼웠다.
순수이성비판도, 순수종교비판도 아니었다.
“그럼…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홍위는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곤 조금 망설이다가 상주의 아들로서 다시금 바빠지려는 바깥의 상황을 거들기 위해 나갔다.
상민은 책을 소중히 챙기고는 자리를 떴다.
식장을 떠나기 전, 상민은 흘깃 뒤를 바라보았다.
이유와 이홍위가 무어라 서로 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 * *
[중세의 끝, 그리고 그에 이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역사의 기준점은 보통 세 가지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이천 년이 넘도록 존속되었던 로마의 멸망을 꼽을 수 있겠고, 둘째로는 대고려가 북려에 정북행성을 설치한 시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가장 초기의 증기기관이 고려 내에서 발명된 시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으니, 15세기 중반은 분명 두 대륙에 걸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던 순간인 것이다.]
―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프로이센의 역사가.
[우리는 무지(無知)와 몽매(蒙昧)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감정과 신앙의 시대는 우리의 과거에 있으며, 이성과 합리, 그리고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과학과 진보는 우리의 손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사방의 바다는 우리의 바다이며, 거대한 이 대륙은 바야흐로 우리의 손아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나라 또한 감히 우리에 견줄 수 없고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니, 정녕 찬란한 제국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 이홍위(李弘暐), 대고려의 내무상서
[물이 끓으면 증기가 발생하고, 그 증기로 어떠한 힘 또한 생긴다는 사실 자체는 아주 작은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힘이 모여 거대한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마침내 세상을 얼마나 바꾸기 시작했는지를 보라.]
―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Leonardo di ser Piero). 피렌체의 발명가이자 공학자, 혹은 화가.
[작가의 말]
대고려(Greater Korea)는 딱히 고려를 위대하다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에 처박혔던 옛날의 소고려(Lesser Korea)와 구분하여 부르는 먼 훗날(레오폴트 폰 랑케처럼) 외국 학계의 명칭입니다.
고려 내에서는 소고려를 전조라 부르겠지요.
작품 내 서술의 입장에서는 왕씨 고려, 해씨 고려로도 칭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