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73화 (173/653)

소치기, 그리고 보안관(3)

안섭은 국가의 군수물자를 사사로이 쓰고, 그것들로 무력단체를 조직했다.

결과는 무척이나 좋았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들도 있기 마련.

위정자가 편협하다면 좋은 말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알았다. 채비하도록 하마.”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을 안심시킨 그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괜찮을 게다.”

안섭은 예전부터 시중과 인연이 있었다.

시중과 관련된 말은 대부분의 것들이 비밀이라 함부로 타인에게 그분을 곁에서 모셨다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때문에 가족들은 그 높디높은 존재가 파견한 조사관이라는 말에 벌벌 떨었지만, 안섭은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그분의 성품을 알고 있었으니까.

― 똑똑

“들어오시구려.”

가족들은 조사관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내는 문밖으로 나가면서도 조사관을 향해 애원하는 어투로 하소연해 보려 했지만 장남의 만류로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조사관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더니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구려.”

정중한 조사관의 태도에, 침상에 걸터앉은 안섭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더군요.”

“변방에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 떼들이 있다 했더라도 피치 못하게 나라에 죄를 저질렀으니 그저 송구할 따름이오.”

조사관은 딱히 별말을 하진 않았다.

“시중께서 직접 작성하신 편지입니다.”

대신 시중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내밀었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나 다름없는 자의 서신을 받은 안섭이 약간 떨리는 손길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무리 그가 시중과 약간의 친분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시중 같은 높으신 분의 입장에선 정말 사사로우며 보잘것없는 일일 텐데.

안섭은 서둘러 서신을 폈다.

― 김 정교, 그대가 부상을 입고 전역한 후 또다시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네. 참으로 안타까워 직접 서신을 보내네.

시중이 일개 근위군의 부사관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그는 황공함에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 그대의 용맹은 익히 알고 있었네. 덕분에 백성들의 피해가 미미했으니, 위정자로서 그대의 공을 어찌 치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망극 또 망극하옵나이다, 당하.”

정북행성 방향으로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의 안섭을 바라보던 조사관이 미소 지었다.

“…끝까지 읽어보시지요.”

― 그러나 그대가 사사로이 국가의 물자를 쓰고 민간인에게 총기를 가르쳐 사병을 운용한 것 또한 사실이지. 고려는 법이 지엄하니 그것은 틀림없는 과오일세.

안섭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 하지만 법은 항상 시대에 뒤떨어지기 마련. 본관은 북려의 여건이 옛 법과 맞지 않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네.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조정이 기민하지 못해서야.

휴우, 안섭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그대도 알다시피, 이 원주민들의 습격은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닐세. 이미 고려가 저들과 관계가 틀어진 이상, 저들은 마치 먼 과거의 북적들, 유목민들처럼 변방을 침탈하고 아국의 백성들을 주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이라 봐도 무방하니.

안섭은 불안한 얼굴을 했다.

― 당금의 고려에는 사람도, 인재도 부족하네. 특히 북려는 더더욱. 그대와 같은 충정과 능력, 그리고 용맹을 가진 자는 황금보다도 소중하지.

“…….”

― 국가의 부름을 받으시게. 그대는 장자와 차자가 있다 들었네. 가정의 일은 아들들에게 맡기고 나라의 일을 다시금 하는 것이 어떠한가?

거봐, 손가락 없어도 잘만 싸우네.

시중께선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젠장.’

조사관이 일그러진 안섭의 표정을 바라보다 이윽고 작은 목함을 내밀었다.

“귀하를 정북행성 소속 연방보안관으로 임명한다는 서신입니다. 이 패는 훈장처럼 의복 밖에 패용하시면 됩니다. 귀하는 항상 총기를 휴대할 수 있으며, 범죄자 및 불량한 무리들, 적대적인 원주민에 대한 선조치 후보고의 권한이 있고, 안보를 위해 민간에 동원령을 내려 임시로 귀하 소속의 의병, 아니 자경대를 조직할 수 있습니다. 이들 또한 총기의 사용이 허가됩니다. 그리고 귀하는 첫 번째로 임명된 연방보안관의 권리로서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을 현지에서 채용할 권한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특권.

그러나 퇴직 희망자에겐 전혀 매력적이지가 않다.

“…거절할 수는 있소?”

“권해드리진 않습니다.”

단호한 조사관의 말에 안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서신을 읽다가 아차 싶었다.

시중의 인재 탐욕은 상상을 초월한다.

얼마나 많은 관리들과 무장들이 호호백발까지 부려먹혔는가?

‘이런… 젠장.’

한적한 곳에서 소를 치고 말을 기를 생각이었는데.

낮잠도 푹 자고 이제 게을러질 수 있었는데.

손가락을 잃어버린 것은 시중의 탐욕 앞에선 어떠한 방패물도 되지 않아 보였다.

‘…….’

안섭은 악마에게 은퇴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고야 말았다.

* * *

앙주.

동래미.

상민은 파견한 조사관으로부터 택주 북부와 앙주 서부에 발생한 누무누의 공격에 대한 피해 결과를 보고받았다.

‘장전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법이라.’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빠른장전(탭로딩)을 개발한 안섭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누무누족을 격퇴했다 한다.

감탄성이 나오는 일화였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단순히 총기를 바닥에 내려치는 것으로 장전의 단계를 일부 생략하다니.

물론 다소 천운이 따르는 일화였겠지만, 상민은 이것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고는 총병대의 전술로 채택할 수 있는지 군부에 연구를 맡겼다.

탄환의 크기를 조금 줄여보면 되지 않을까?

김안섭.

상민은 자경대를 조직해 누무누의 공격을 막아낸 그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

일개 병사라고 치부하기엔 꽤 오랫동안 같이 있었지.

그가 무공훈장과 상이훈장을 받고 전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상민은 아무리 여건이 열악한 북려라 하더라도 총기가 만연하는 것을 여전히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수정헌법 제2조가 현대까지 살아남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정치력으로는 나중에도 충분히 그 법을 철폐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민간의 총기 휴대 자체가, 어쩌면 연방 구성원들의 완전한 독립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권한을 일부로 한정하면 된다.

잘 교육을 받고 국가를 배신하지 않을 믿을만한 자들에게 암행어사와 비슷한 권한을 주고 변방을 정돈토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조직한 자경대 이외에는 총기를 쓰지 못하도록.

보안관의 개념 자체는 너무나 익숙했다.

한동안 생각을 이어가던 상민은 밖에서 아련히 들리는 소리에 물었다.

“과트라체 경기병들은?”

부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준비가 다 되었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정하도록 하라.”

“예.”

상민은 이번 일을 주도한 누무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복수를 명했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유목민이란 것들….’

누무누는 고려를 일컬어, 외부에서 그들의 땅을 침탈한 민족이라 칭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은 항상 동쪽의 원주민들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한 유목민들이었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라고 모두가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민족은 아니었다.

특히나 약탈을 일삼았던 평원의 부족들은 더더욱.

그들도 서로에게 활을 쏘고 도끼를 던졌다.

밑에 있는 아즈텍과 같은 괴물들과 비교가 되는 면은 있어도, 북려인들 또한 특출나게 도덕적이지도, 특출나게 포악하지도 않았고 구대륙인들과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 봐도 무방했다.

말갈과 거란, 몽골, 그리고 여진.

이들이 이 북려 원주민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북려의 원주민들이 만약 처음부터 말을 가지고 있었고 철기에 진입했다면 아마 이들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겠지.

비록 고려는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변방은 넓었다.

기마를 얻은 유목민들은 잠재적 위협이다.

만약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할 수밖에.

선택지는 오로지 두 개뿐이다.

연방제국의 일원이 되거나, 혹은 죽거나.

* * *

젊은 축에 속하지만 상이군인이 된 이후까지도 부려먹히는 안섭.

하지만 그 말고도 인생의 황혼기에 고생을 하는 이는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기술선도국의 장인으로 일하는 장영실이 있겠고.

그와 같은 시기에 건너와 연서궁에서 사전을 편찬하고 학문을 가다듬는 정인지, 미주의 주지사로 있는 김종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도 또한.

정북행성으로 떠난 시중의 빈 자리를 잘 메꿔주고 있는, 아니 오히려 특정 분야에서는 더욱 잘해주고 있는 상서령 이도는 그가 쌓아 올린 계몽주의와 학문의 성취 이상으로 탁월한 행정력을 보여주는 희대의 천재였다.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단점은 있었다.

바로 고기를 너무 좋아하고, 운동을 싫어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나이가 먹어갈수록 풍채가 좋아지는 이도의 모습을 보고받은 상민은 황상에게 일러 늙어가는 신하를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다.

해광은 장인을 친히 직접 단련시키기로 결심했다.

숭무정신이 깊고, 문무겸전을 중요시하는 기풍이 깔린 고려의 황족답게 현 황제 해광 또한 타고난 신경이 있었고, 음악과 예술에 대한 열의만큼이나 정구와 축구 그리고 무술과 같은 운동을 몹시 좋아했다.

“헉, 헉….”

“다섯 바퀴 더!”

자꾸만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위를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이도가 이를 악물고 다시금 연무장을 돌려다 그만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국구, 만약 일곱 바퀴를 더 돌면, 오늘 식사는 특별하게 돼지고기 너비 튀김(돈가스)을 드시는 걸 윤허하지요.”

“…헉… 차라리 헉… 안 먹고 안 뛰면… 헉… 안 되옵니까?”

그새 두 바퀴나 더 늘어난 목표치 때문인지 고기애호가 이도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말이 나왔다.

“안 됩니다.”

그럼 선택지를 왜 준 거야?

이도는 표정을 구겼다.

“황후… 전하…께서도 헉… 이 일을… 아시옵니까?”

이제는 숫제 협박까지 하는 장인을 바라보던 해광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중전도 운동을 몹시 바람직하게 여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도의 딸 정의공주는 태어나기는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고려에서 사춘기를 보내었으니, 고려인이라 할 수 있었다.

유학을 적게 배웠으니 이렇게 경박하게 뛰어다니는 것에 대한 멸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소신은… 후우, 아무래도 몸을 쓰는 일을…….”

“국구께서도 위대한 장군의 혈통을 지니셨지 않습니까?”

이성계.

고려를 멸망시킨 위대한 장군.

그는 무예로는 현 고려 태조 해민과 버금갈만한 인물이라 들었었다.

고려의 황제 앞에서 대꾸하기 상당히 난처한 말을 들은 이도는 속으로만 나지막하게 불평을 내뱉은 뒤 숨을 고를 시간만 달라 간청했다.

무릎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던 이도에게 누군가 은제 잔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여기 물.”

외손자이자 태자인 해건이 내민 물을 두 손으로 받아든 이도가 체면과 예의도 차릴 새 없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해광은 이도의 호흡을 확인했다.

확실히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장인과 사위는 한바탕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왜 뛰는 거야?”

해건은 자신의 자리인 차양막에 돌아와 앉았다.

옆에 앉은 예쁘장한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로라하는 보모들과 교육자들이 붙은 덕에 헬레나는 몹시 빠르게 고려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로마의 귀족들, 그리고 장군들도 배에 기름이 낀 자가 많았는데.

기름이 끼지 않더라도 저렇게 열심히 신체를 단련하지는 않았다.

해건은 짐짓 어디선가 들은 어른의 말투를 흉내냈다.

“오늘 연병장에서 흘린 땀 하나가 훗날 너희들과 백성들이 흘려야 할 피를 줄여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헬레나가 갑자기 울먹거렸다.

그 모습에 내심 멋있게 보였을 거라 기대한 해건이 당황했다.

“왜… 왜 그래?”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해건의 등을 떠밀었다.

“너도 가서 뛰어.”

그로부터 육 년 뒤.

개천 183년(CE 1457)

환갑을 맞은 상서령 이도가 황상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황상께선 윤허하지 않으셨다.

개천 184년(CE 1458)

진갑을 맞은 상서령 이도가 황상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으셨다.

개천 193년(CE 1467)

칠순을 맞은 상서령 이도가 황상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으셨다.

황상께선 다만 노신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시며 궐과 관청에서 쓸 수 있도록 하셨다.

[작가의 말]

이제 시간이 조금씩 스킵될 것 같습니다.

상민의 개인적인 이야기, 예를 들면 잔과의 이야기는 나아아아중에 외전으로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역사 흐름에 방해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