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비밀
개천 176년(CE 1451) 5월.
[테오도라 아사니나는 앙주의 선례를 따라 새롭게 만들어질 진주(秦州)의 여왕이자, 아센 가문의 가주로 임명한다. 그녀의 부군 복성공(福城公) 해승원(解承源)은 여왕의 국서이자 진주의 왕이 될 것이나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카디스에서 출발한 첫 번째 그리스인 정착지 탐사대가 북려에 닿았다.
그리고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려의 함대와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중은 새롭게 지어질 진주가 정북행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어느 위도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말라는 명을 내렸지.
그러한 정치적 여건과 지리적 여건 그리고 기후적 여건을 모두 종합한 탐사대는 마지막으로 몇몇 후보들만을 추려놓고 군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주의 데스포이나(Despoina), 즉 여왕으로 임명된 테오도라는 이제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자줏빛 망토가 없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딸은 더 이상 그녀의 옆에 있지 않았다.
헬레나는 고려 궁정에서 고려인들의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태자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로 성장할 것이다.
그녀는 재혼했고, 상대는 고려인 황족이다.
남편은 상당히 학자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중하고 배려심이 넘쳤다.
이제는 그의 자손들이 그의 성씨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상관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 뭐, 가문의 혈통은 다른 형님들이 알아서 잘 이어나가시겠지요.
필왕의 아들이라는 그는 형제들만 다섯 명이라 후손에 대한 걱정 자체가 없어 보였다.
사실 성씨만 못 따르는 것일 뿐이지, 아직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은가.
“이곳을 뭐라 부르시겠습니까?”
탐사대의 지휘관이 테오도라에게 말했다.
‘…….’
로마 바실렙스의 가문은 끊겼다.
이제는 로마의 땅도, 로마의 핏줄도 없는 자들.
이들은 이제 그저 그리스인으로밖에 불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한 줌의 긍지와 미련을 담아 테오도라가 말했다.
새로운 땅을 바라보며.
“테르샤로마(Tertia Roma).”
혹은 네아(Néa)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녀는 자신이 이름 붙인 세 번째 로마가 다시는 멸망하지 않길 기도했다.
* * *
“진주의 여왕이 보낸 서신입니다.”
상민은 아센 가문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받았다.
뭐, 정착을 잘하고 있다는 보고인가?
그러나 상민은 서신과 그 안에 동봉된 내용물들을 보고 기함했다.
“…이런 미친.”
테오도라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납작 엎드리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만들 정착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고 새로운 주군이 변덕스럽다면 말라죽을 가녀린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조공으로 바쳤다.
그녀가 가진 가신들 중 빼어난 재주를 가진 장인들도 정북행성에 합류했다.
로마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비밀들도 딸려왔다.
“…….”
한동안 서신에 쓰인 그리스어를 해석하던 상민은 감탄사조차도 터트릴 수 없었는지 입을 벙긋거리다 머리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기대었다.
“미쳤구나.”
과연, 동로마의 난민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들의 기술력은 상상외였다.
상민은 그 자료들을 곱게 접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복도에서 보이는 넓은 마당에는 편지와 같이 온 그리스의 온갖 기술자들이 불안한 얼굴로 삼엄한 경계가 오가는 정북행성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따라오게.”
그는 동래미 외곽의 한적한 장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스인 기술자들도 어미를 따르는 오리마냥 그 뒤를 쫓았다.
엄중한 경호를 지나쳐 간 곳에는 이제 예순이 된 장영실과 그의 아들이 있었다.
기술선도국은 상민이 정북행성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그를 따라 이곳으로 전부 이동한 상태였다.
여전히 이곳은 여러 장인들로 북적북적하다.
기술은 몇 가지 특정한 분야에서 빠르게 진보하고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곳의 수장, 장영실처럼.
그러나 장영실은 이제 시대의 천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그의 네 아들 중 막내, 장성재(蔣成材)는 그 형들과 심지어 아버지의 재주까지 월등히 능가하는 세기의 천재였다.
라고, 장영실이 항상 취중에 주장했지.
상민은 일이 바빠 그 재주를 곁에서 진득하게 감상하진 못했지만, 비범함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는 늙어버린 장영실이 한참 노안에 허덕일 때, 그의 아들 성재는 척척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 당하께서 오셨다. 모두 예를 갖추게.”
늙어버린 만큼이나 사회생활의 관록이 쌓인 영실이 노구에도 벌떡 일어나며 예를 갖추자 장인들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괜찮네, 일들 보게.”
다시금 공방이 이런저런 생활 소음들로 뒤섞이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본 상민이 영실에게 말했다.
“인원이 부족하다 했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지요.
영실은 공손함과 불손함이 공존하는 굉장히 독특한 태도로 툴툴거렸지만 상민은 이 사람 앞에서는 정말 유구무언이었기에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하께서는 정말 정정하십니다.”
영실은 가면 뒤의 사내를 본 적이 없긴 했지만,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비슷한 골격과 비슷한 음성과 비슷한 건강함을 자랑하고 있는 재상을 보며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상민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어느 정도 인연이 쌓인 자들을 다룰 때가 제일 힘들었다.
‘과학과 기술밖에 모르는 이러한 둔감한 노인네도 알아차릴 만큼 불멸자가 독특하긴 하지.’
상민은 영실의 말에는 대답을 회피한 채, 주제를 돌렸다.
“마침 새로운 노예… 아니 우수한 재목들이 왔으니, 기술선도국에서 먼저 쓸 만한 인재들을 추려보게나.”
― 우당탕탕
영실은 시중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는 불경을 저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인들도 모두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엄선된 장인들이 보충되었다.
출신 조사와 성품 조사 및 보안 교육, 그리고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서약을 받는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았지만 그래도 채용된 수가 꽤 많아, 기술선도국의 장인들은 모두 기쁨을 금치 못했다.
다만 아직은 수련 기간이 필요했다.
고려인들과는 명백히 다른 이국적인 얼굴을 한 이 그리스인 장인들은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했으니까.
다행인 것은 고려인 장인들 중 라틴어에 익숙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
철제 기구, 주로 공성용 무기를 만들던 젊은 그리스 장인 하나가 고려인 꼬마 장인이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윽고 더듬거리고 어색한 고려어로 질문을 했다.
“이게 뭐야?”
영실의 늦둥이 아들, 장성재는 힐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버지는 되도록 이들이 빨리 적응할 수 있게 이것저것 알려주라고 말했지만 어린 나이의 소년은 대체로 어딘가 치기 어린 내면이 있기 마련이다.
“말해줘도 모를 거 같은데?”
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뉘앙스가 있다.
그리스 장인도 나이가 꽤 젊었고 천재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끈하며 복잡한 기구를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이윽고 입가를 씰룩였다.
“이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든 아에올리스의 공(Aeolipile). 맞지?”
성재는 그것이 뭘 뜻하는지 몰랐지만, 거들먹거리는 그리스인 장인의 표정을 보자 일단 부정부터 하고 싶었다.
그러나 천재 특유의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굴복했다.
“…그게 뭔데?”
젊은 그리스 장인, 니키포로스는 손짓으로 필기도구를 가리켰다.
성재는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필기도구를 빌려주었다.
니키포로스는 손에 받아든 정교한 구리 펜에 감탄하고는 잉크에 찍은 후 흰 종이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끓는 물에서 나온 뜨거운 공기를 동력으로 회전하는 공이지.”
니키포로스가 그린 도안을 본 성재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아주 원시적인.”
“그 말이 맞아. 내가 그린 아에올리스의 공보다 네 게 훨씬 더 복잡해 보이네.”
니키포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성재가 만든 기구를 감탄하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특히 이거, 이걸 뭐라 하지? 처음 본다.”
묘한 눈초리로 니키포로스를 바라보던 성재가 어딘가 풀어진 얼굴로 설명했다.
“충배(衝扒, 피스톤).”
“그러니까 이 물이 끓으면, 이 바퀴가 회전하고 이 츄웅배애가 움직인다?”
“눈은 있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성재는 니키포로스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친절한 설명에 니키포로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결국 이걸 움직여야 할 만큼 강한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
“아니, 이건 단지 작은 모형에 불과하지. 진짜는 엄청나게 커야 해.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을 만큼.”
니키포로스는 팔짱을 꼈다.
눈앞에는 충배가 달린 아에올리스의 공(성재는 이것을 증기기관이라 칭했다.)이 어떤 기다란 것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성재가 설명해 주었다.
“철도(鐵道). 이건 철도라는 거야.”
“…….”
한참을 고민하던 니키포로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뭐가 떠오르지는 않네.”
성재는 약간 실망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대단한 해법을 주었다면 약간 더 기분이 안 좋았을지도.
이윽고 성재가 입을 열었다.
“배고프니 밥이나 먹자.”
니키포로스는 헤벌쭉 웃었다.
이 나라는 식사 하나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밥? 좋지, 한번 안내해 줘.”
어딘가 어색한 고려말에도 성재는 피식 웃으며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 * *
한 그리스인 니키포로스가 고려 장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그리스인 티모테오스는 조용한 밀실에서 장영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전하께서 우리에게 줄 것이 있다 하셨지요.”
장영실의 말에 티모테오스는 알아듣기 힘든 말로 중얼거렸다.
통역사가 장영실을 보며 통역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딘가 상당히 망설이는 그를 주변에 서 있는 정보총국의 요원들이 엄중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험악한 눈길은 아니었지만 그 감정 없는 눈길에서도 티모테오스는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아주 천천히 품 안의 문서를 만지작거렸다.
가히 수백 년 동안, 그토록 많고 많았던 시련에도 한 번도 외국에 유출되지 않았던 문서.
제국을 지탱해온 마지막 비밀.
그러나 이것을 자신의 손으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 와 버렸구나.
티모테오스는 어딘가 서러움에 파르르 입을 떨었으나, 이윽고 고개를 떨구었다.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데스포이나께서 어련히 잘 결정하셨겠지.’
제국은 멸망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불태워졌다.
자신은 배 위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다.
‘그래, 적어도 그 저주받을 술탄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자.’
만약 눈앞의 사람들이 학살을 자행하고 도시를 불태운 오스만인들이었다면, 그는 당장 옆의 촛불을 들고 문서를 태운 뒤,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할 결의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그동안 이들에게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었었다.
그동안의 쌓인 은혜가 얼마였던가.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시작할 기회까지.
희망.
고려인들은 동로마의 난민들에게 가장 값진 것을 선물해 주었다.
그렇다면 응당 그 값을 치러야겠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 문서 또한 자신이 알기로는 데스포이나 테오도라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라 알고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문서에 적힌 그리스의 불도 결국 제국을 지켜줄 수 없었다.
티모테오스는 문서를 건넸다.
장영실은 그것을 받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허어….”
많은 군사 병기들을 만든 그도 이 문서에 적힌 것을 읽으며 여러 번 탄성을 내뱉었다.
간략하게 훑어보았을 뿐이지만 문서의 비범함을 눈치챈 영실이 정중하게 티모테오스에게 읍했다.
기술선도국에 소속된 장인으로서 국가의 비밀을 넘겨준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영실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생이 많으셨소.”
“…진주의 보은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중께서도 이 일을 기억하실 것이오.”
[작가의 말]
엄밀히 따지면 헬레나는 자줏빛 출생(포르피로예니티)이 아닙니다.
디미트리오스가 제위에 오른 뒤 자줏빛 산실에서 출생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관용적’으로 가장 자줏빛 출생에 가까운 존재이기도 한 것은 마찬가지라….
테르샤로마, 네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메릴랜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워싱턴 D.C.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위쪽의 유명 도시들보단 더 정북행성에 가깝죠.
테르샤로마는 띄어 쓰지 않았습니다. 짧은 단어인 뉴욕을 띄어 쓰지 않는 것처럼.
아마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네아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부를 것이고, 외국이나 고려에선 테르샤로마라 부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