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침
카디스 총독 백윤환은 대륙 건너편에서 명령받은 대로 큰 그림에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테오도라를 관찰하고 있는 그의 품에는 시중의 직인이 찍혀 있는 서신이 있었다.
[첫 번째로, 황후와 난민들 무리에게 현실을 주지시켜라.]
아즈텍 유민들이 나름대로 니카라오 호수 부근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쯤, 동로마의 유민들도 카디스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카디스는 괜찮은 도시였다.
비록 당연히 위대하고 위대한 콘스탄티노플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평화롭고 깨끗했으며 질서가 잡혀 있는 도시였다.
이베리아반도의 끄트머리,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날씨도 온화하다.
이곳에 아예 눌러앉아 살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고려는 그러한 정착민들을 환영해 도시에 적당한 구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주로 상인계층은 이렇게 카디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유민들 대다수는 상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중세인에 걸맞게 특정한 신분 아래에 귀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농민들, 기술자들.
이들은 주군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의 주군은 가장 결정적인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
가신과 백성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는.
테오도라는 책임감이 강한 여인이었다.
성품도 괜찮았고, 자녀의 교육에도 신경 쓰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며 다독일 줄도 알았다.
분명 디미트리오스에게는 과분한 아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도, 망국의 황후가 된 순간부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몸에 달린 것은 자주색의 망토뿐.
그리고 그 자줏빛 망토조차도 실은 자신이 아닌 딸의 선천적인 소유물이라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생활고에 직면했다.
돈이 부족하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신앙과 명예, 긍지와 같은 잡스러운 것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백 년 전쯤에야 그렇게 돌아갔을지언정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오직 황금만이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존재였다.
동로마는 비록 중환자였지만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망국까지 상당한 부를 누리고 있었다.
테오도라도 그 부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진 성품과는 별개로, 고귀한 신분으로 자란 그녀는 생활적 능력이 거의 없었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
디미트리오스 1세와 결혼하기 전에도 그녀는 먼 옛날 불가리아의 왕족이자 동로마의 유력 가문인 아센(Asen) 가문의 딸로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다.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는, 혹은 장사를 하는 등의 천한(그녀를 비롯한 일반적인 중세 귀족의 가치관에는) 일도 당연히 경험하지 못했던 것.
그녀는 일단 후원자를 찾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서유럽의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며 자신과 딸이 가진 제위에 대한 계승권을 어필한 테오도라는 단 하나의 성의 있는 답신조차 얻지 못했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뒤에는 고려의 흉계도 있었고, 설령 그 흉계를 피해 서신이 목적한 곳에 도달했더라도 별 이목을 끌지 못했다.
동로마의 작위 주장자라니.
뜬구름 잡는 것도 정도가 있지.
십자군 패배 이후, 나름대로의 주제를 알게 된 서유럽인들은 이젠 허황된 꿈을 잘 꾸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금화는 당장 3,000 베네치안 두캇(Ducat) 정도.
가진 패물과 귀중한 보석, 동로마의 보물들을 전부 팔면 어쩌면 더 많은 금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었지만 그 가보들을 쉽사리 팔긴 싫었다.
아직은.
물론 3,000두캇 자체도 서민 기준 평생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따르는 가신들과 하인들, 그리고 일부 병사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답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지금 당장은 괜찮았다.
그러나 가진 돈을 전부 다 써버린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은 서서히 그들을 떠날 것이고 그녀와 딸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지.
동로마의 난민들은 아직까진 테오도라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떨까.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레타까지, 크레타에서 카디스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연속들이니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망국의 황제 디미트리오스가 얼마나 추한 꼴을 보였는지는 그리스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제대로 통솔하여 다시금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서는….
한동안 바둥거리던 테오도라는 결국 백윤환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고려는 처음에 그녀와 난민들을 기꺼이 수용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주진 않았다.
처음에는 호의 뒤에 숨겨진 흉계가 있을까 걱정한 테오도라는 그것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차라리 호의라도 주었으면 좋겠어.’
[두 번째로, 호의를 주는 것을 망설이지 말라.]
“…돈이 필요해요.”
백윤환은 그 말을 듣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테오도라는 이렇게 쉽게 건네진 금화 주머니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황금빛의 주화.
그녀도 동로마 사람이었던 만큼, 지중해에 꽤 흔하게 돌아다니는 고려의 원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신용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아 베네치안 두캇과 비슷할 정도.
오백 원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얻기에는 상당한 거금.
그녀는 오랜만에 가신들에게 밀린 봉급을 나누어 주며, 팔레올로고스의 가모로서 위신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한두 번이어야지.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금화에 서서히 중독되었다.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그녀는 자꾸만 백윤환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백윤환은 마치 무슨 드래곤의 재보에서 금화를 꺼내는 것 마냥 아낌없이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익숙한 무게의 주머니, 항상 오백 원이 들어 있지.
테오도라가 이유 모를 자괴감을 삼키며 금화 주머니를 품 안에 넣자, 백윤환이 입을 열었다.
그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것이 미봉책인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테오도라는 수치심에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을 보이게 하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계속 반복되겠지요.”
설마, 이제 와 지원을 끊겠다는 거야?
“물론 우리 제국은 로마의 난민들에 대해 끝까지 관대한 처사를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번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개인은?
그것까지는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에 테오도라가 고개를 들었다.
“땅이 없는 귀족이 몰락한다면 일반 평민들보다도 더욱 비참한 삶을 누린답디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과거에 향유했던 부유한 삶과 현재의 빈곤한 삶의 괴리는 훨씬 더 큰 비참함을 선사할 테니.
‘대체 주님은 왜 나한테만 이렇게….’
테오도라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냈다.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듣고 있어요.”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중얼거렸다.
백윤환은 입을 열었다.
“고려의 봉신이 되시지요.”
“팔레올로고스가… 고려의…?”
백윤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레올로고스가 아닌, 동로마 명문가이자 불가리아의 왕족 아센 가문의 가주로 말입니다.”
테오도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딸에 흐르는 혈통이 아닌, 당신의 권리로 봉신 서약을 한다면 고려는 그대들에게 자치권과 영토를 하사할 겁니다.”
악마는 속삭였다.
“옛 헬라스와 테살리아, 트라키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지어 그 비옥한 아나톨리아와도 견줄 수 없는 땅을.
윤환은 집무실 한켠에 있는 지도를 가져왔다.
“고려가 북려대륙 전역에 대한 적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실 테지요?”
당대의 유럽인들은 그 개념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현 고려의 남북려 패권을 내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은요?”
“우린 그대의 딸을 태자비로 삼길 원합니다.”
테오도라는 당황한, 그러나 예상했다는 얼굴로 백윤환을 바라보았다.
이들도 결국 자줏빛 혈통에 대한 탐욕을 부리고 있구나.
그러나 어찌한담.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는걸.
반면 고려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체계적인 이주와 여러 지원들.
함선들과 정착지를 만들 재료들.
식량 지원과 군사 지원들까지도.
테오도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환은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마지막으로, 로마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하라.]
* * *
개천 175년(CE 1450) 11월.
테오도라 아사니나와 그녀의 딸이자 로마의 마지막 핏줄이 고려에 발을 디뎠다.
그녀들은 수도 창양에 와 고려 황제 해광을 알현했다.
해광은 테오도라 아사니나를 접견하며 친히 옥좌에서 내려와 동등한 위치로 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마리 용의 자손으로서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거늘.
그러나 신하들도 이번만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는 로마의 팔레올로고스, 쌍두독수리의 아내이며 후손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에 띄게 정중한 해광의 인사에 테오도라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감히 콘스탄티노플에 견줄만한 고려의 수도 창양에 와서 약간은 주눅이 들어 있었지.
그러나 해광이 잔혹한 메흐메트 2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자비로운 인물이라는 소문을 직접 확인하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도라는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고려의 바실렙스를 뵙습니다.”
테오도라의 발언은 다소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한 해광이 미소 지었다.
“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네.”
테오도라 아사시나는 믿음직한 신하 몇 명을 데리고 창천궁의 회의실로 들어가려다 이윽고 무언가 생각났는지 멈칫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아직 붙잡고 있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고려인들의 시선도 여덟 살 난 꼬마 여자애에게 쏠렸다.
“헬레나.”
“네. 엄마.”
그녀는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어딘가에서 습기가 치밀어오르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딸의 어여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이 작고 여린 아이 덕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 이렇게 좋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는 것도.
그녀와 백성들, 그리고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면.
테오도라는 딸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는 눌어붙으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딘가 약간은 매몰차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소녀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창천궁의 내관들이 그녀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창천궁 구석에 있는 놀이방.
헬레나는 내관들을 따라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왔다.
해광과 황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 해건이 제왕 교육이 없을 때 처박히는 이 방은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많은 놀이터였다.
굉장한 크기의 천체망원경(그 겉에는 ‘절대 이걸로 태양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과 나무로 만든 이상한 조각품들, 그리고 현미경과 잡동사니들, 종이로 만든 장난감 벽돌들과 그것들로 쌓은 작은 성채까지.
한창 궁인들과 수성전을 벌이고 있던 어린 태자 해건은 낯선 방문객에 성채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뭐야?”
“라고 물으십니다.”
태자 해건은 귀엽게 생긴 그리스인 여자애보다도 여자애가 꼭 끌어안고 있는 유리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둘 다 마침 여덟 살.
이성의 개념은 별로 없는 시절이었다.
“…….”
“내 말에 대답을 안 해?”
해건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내관들은 난처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독촉하진 못했다.
해건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비슷한 신분인 모양이구나.
헬레나는 해건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장난감 방이 아닌 그 앞의 정원으로 갔다.
11월의 따뜻한 봄 날씨,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녀는 꽃도 보고 싶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그만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단칠 엄마도 없겠지.
그녀의 알지 못할 쭈굴미에 해건도 그녀의 옆으로 가 같이 쭈그려 앉았다.
나를 이렇게 무시한 사람은 처음이야.
“전하, 정원의 흙은 더러우….”
“그만.”
내관이 기겁하는 궁녀를 제지했다.
“어울리시게 두어라.”
“알겠습니다.”
언어적 장벽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겠지만, 내관은 심지어 통역사도 뒤로 물렸다.
안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을 유지한 채 궁인들이 모두 물러나자, 두 명의 아이들은 어느덧 서로에게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