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68화 (168/653)

니카라오 운하

아즈텍 유민들.

상민은 꽤 인도주의적이었고 선대의 죄가 후대에 대물림되는 연좌제를 혐오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투피족의 후예들에 대한 민간의 노예화를 엄금한 이상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이 아즈텍 유민들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완전히 수용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들은 투피족과 또 달랐다.

아즈텍인들은 뼛속 깊이 포식자로서의(문맥 그대로) 삶을 살아온 사람들.

일개 금수도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자란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데, 사람이 사람을 먹고 자라왔다면 그 얼마나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겠는가.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 했었다.

명청교체기, 고염무가 했던 말이지.

개인적으로 역사를 읽으며 그 말에 동의했던 때도 있었고, 동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상민은 이 아즈텍의 망천하(亡天下)와 망국(亡國)에는 아즈텍 백성들 스스로의 포악함이 큰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단백질이 모자라 식인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종교와 왕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미치광이들이 미친 종교를 믿으라 강요할 때도 무기력하게 받아들였을 뿐이고.

좋게 보이진 않았다.

상민은 이들에게 내재된 독기와 악의를 빼내야 했다.

그리고 제국 내 다른 백성들의 좋지 않은 여론들도 희석시켜야 했다.

그렇다면 방도가 있나.

열심히 일해야지.

일해서 자신들의 옛 죄를 씻어야지.

민간의 노예화와 국가의 노역은 엄연히 달랐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훗날까지도 이런 전쟁포로들은 어딘가의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노역은 대부분 육체적인 반복노동만 요구하는 단순 노동이었고 일반적인 양인들이 하기에는 고되어 기피되는 일이기도 했다.

아즈텍 유민들에게 시키기 딱 좋은 일이었다.

몸이 힘들면 반란을 일으킬 요소가 적지.

반복노동은 따로 교육할 요소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강제성을 띤 만큼 기피하는 일에 투입할 수 있었고.

물론 대가는 줄 것이다.

채찍을 휘둘러 노역을 시키며 그들의 피와 살로 운하를 파진 않을 것이다.

구시대적인 노역 방법은 이미 자신이 노동혁신을 통해 철폐했었다.

먹을 것과 의료품(주로 키닌)은 계속 제공될 것이고, 일이 다 끝난다면 시민권을 줄 것이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농사를 짓는 대신, 땅을 파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했다.

* * *

그래서 당장 이 흑색화약보다도 예민한 존재인 아즈텍인들은 전부 파남으로 향했다.

상민은 직접 파주로 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을 보고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파주군왕으로 임명된 후손 놈이 갑자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당하!”

그리고 그 후손 놈은 상민의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이놈은 영특해서 그 군왕 자리에 올려놓았건만 그 영특한 머리로 상민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 상민은 고려의 현 시중이며 정북행성의 장이다.

그러나 여전히 황실과는 인연이 없는(뜬소문들이 가끔 돌아다녔지만) 일개 황제의 신하였다.

이제는 앙왕의 국서 지위를 얻긴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드 아르크 가문이 잘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음지의 족보용이며 평생 여왕의 그림자로서 살아야 하는 신분이었다.

이것을 자신의 주 신분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남들이 보기에는 지고한 황족이며 파주의 군왕이 일개 신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군왕들은 군왕위라는 신분을 얻은 후, 태조 해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상민이 서둘러 달려와 그를 일으키며 귓가에 으르렁대자, 파주군왕은 더욱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박으려 했다.

“할아버님, 소손을 이리 파주의 군왕으로 임명하신 것은 오로지 파주 백성들의 이권을 수호하라 여긴 것이 아니시옵니까? 소손은 파주의 운명이 달린 문제에서 도저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어 감히 이렇게 나와 엎드려 울 뿐입니다.”

‘이런 개….’

고려사 최초로 님비(NYMBY) 현상이 발생했다.

본래 파남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고려의 개척지로서 정착되었다.

황열과 학질에도 불구하고 중려대륙(파남은 남려와 중려를 구분 짓는 지역이었으나, 파남 자체는 중려로 구분되었다) 최초의 정착지라는 명예 아닌 명예를 가지고 있었지.

그러나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미주, 그리고 한참 뒤에나 복속되는 기주, 앙주 그리고 화주보다도 인구가 적었다.

거의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질병과 기후, 그리고 농업 작물의 한계.

파주는 북파남과 남파남,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장성도로를 제외하고는 옆으로 뻗어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동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정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극한의 습지(다리앤 갭)가 나온다.

북쪽으로 팽창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파남의 지리적 중요성을 들며 이곳 주민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온갖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상황, 정북행성에서 거의 십만에 달하는 아즈텍 난민들을 파남으로 보내겠다는 소식은 억눌린 분노를 폭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인 북려 원주민 같은 난민이었다면, 어쩌면 훨씬 더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흉악한 식인종 아즈텍인이라니.

파남 주민들도 눈과 귀가 있었다.

그것도 상민이 손수 달아준 조보(고려의 신문)라는.

이럴 땐 조보를 편찬하는 자들에게 그토록 아즈텍에 대해 비난하는 사설을 쓰도록 장려한 것이 아주 약간 후회되었다.

“후…….”

분노가 차츰 가라앉자, 상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되긴 한다.

파주의 백성들 숫자는 난민들 숫자보다도 적다.

그러니 이들이 큰 불안에 떠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은 아주 먼 옛날부터 한동안 조정에 밉보인 죄인들의 유배지처럼 이용되어 왔었지.

지역에 대한 차별이라고 느껴지는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장성도로가 뚫리며 많은 부분이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자신이 너무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게다가 상민은 이러한 억눌린 현지의 분노를 알아차리기 위해 중서성의 의원제도와 군왕제를 도입한 것이 아니던가?

거대한 연방제국을 이탈 없이 묶기 위해서는 지방 차별적 요소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네.

그러나 상민은 파주 군왕이 이렇게 와서 머리를 숙일 정도면 현지의 민심이 얼마나 흉흉한지 대충 예상이 갔다.

상민은 일단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보았다.

“운하라는 것은 제국의 거대한 대계이며, 결국 다른 곳도 아닌 파주 백성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일인데 어찌 반대만을 한단 말입니까?”

상민은 미래의 일을 언급하며 당근을 흔들었다.

다른 세상의 파나마 국민들이 운하 하나로 먹고산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과장이 조금 섞였더라도 그만큼 운하가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물론 현 고려는 조정 주도로 만드는 이상 운하 통행료 자체는 국가 재정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간다는 것은 결국 다 돈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송구하옵니다. 당하. 하지만 장성도로를 건설하며 그토록 많은 조정의 노역자들이 이승을 하직하였는데, 땅을 파내야 하는 고된 일이 주가 되는 운하를 착공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옵니다. 게다가 그 피를 주로 저 흉측한 아즈텍의 무리들이 대신 흘려준다 하더라도 그들의 분노가 축적된다면 파주의 백성들에게 큰 화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바, 백성들은 아득히 먼 미래의 이득보다는 당장의 불안이 더욱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먼 미래적 당근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장의 손해가 더욱 피부에 와닿을 것이다.

상민은 그냥 조정의 권위로 찍어누를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내키진 않았다.

“……현지의 민심이 별로 좋지 않습니까?”

“예. 파주에서는 파주사람에 대한 차별을 그만두라는 괘서가 여기저기 붙여지고 또한 소손에게까진 아니더라도 주지사에 대한 공공연한 탄핵이 언급될 정도입니다.”

“주지사는 뭘 하길래 전하께서 대신 온 겁니까?”

상민의 불퉁거림에 파주군왕이 쓴 미소로 대답했다.

“주지사가 지난 주에 사임을 표명했으니 소손이 올 수밖에 없었지요.”

“…끄응.”

스트레스로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민은 어떠한 운명 같은 것을 느끼고는 서랍을 뒤적여 보고서를 하나 꺼냈다.

* * *

운하는 고려의 천년대계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숙원과업이었다.

운하가 없어 생기는 불편함은 많았다.

일단 정북행성 동쪽과 서쪽의 통신과 물자 이동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

아무리 남부항로가 울부짖는 바다에 비해서 온화하다 하나 그곳의 날씨도 괴상망측해 해상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등대를 세웠더라도 선박이 통행하는 순간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경우가 많았지.

앞으로 남북려 모두에서 크게 성장할 연방제국을 하나의 깃발 아래 묶기 위해서는 운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본래 고려의 상서성에서는 예전부터 파남을 이러한 운하를 착공할 도시로 점찍었었다.

남려와 중려의 지형이 세밀하게 측량되고 기록된 후, 관리들은 오직 아주 얇디얇은 땅을 파낸다면 두 대양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임시로 장성도로라는 사업을 벌여 두 대양 사이의 소규모 물자교류를 가능케 했지.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도로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운하가 뚫려야만 했다.

하지만 5년 전, 중려 지형을 답사하고 있던 탐험가가 올린 보고가 제국의 높으신 분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 보고서에는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지금의 파남보다 운하를 건설하기 더 좋은 지형을 발견했다 적혀있었다.

파주 북서쪽, 거의 서울과 부산 사이의 세 배에 달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는 꽤 넓은 강이 하나 흘렀다.

이곳 주변은 거의 빈 땅과 비슷했다.

미스키투족이라는 작은 부족이 동쪽 해변가에 조금 모여 살았고, 파남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이 북상하기도 했고 남마야인들이 왕래하기도 했으나, 이 강 주변에는 의외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칼리나해로 합류하는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큰 호수가 하나 나온다.

가운데 떠 있는 큰 산이 무척 인상적인 이 호수는 제주도 면적의 네 배에 달할 만큼 넓었다.

넓은 호수는 큰 면적을 차지한다.

덕분에 그 호수와 태평양은 아주 얄팍한 육지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대동양에서 호수까지 강으로 이어져 있는 이곳에 호수와 태평양을 뚫는 작업을 실시한다면.

지도상으로 볼 때 파남은 이곳보다 육지가 훨씬 좁아 보이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나 북파남과 남파남의 거리, 즉 장성도로의 길이가 약 이백 리(80km)이고 호수와 태평양과의 거리가 그에 사분지 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곳의 지형은 상당히 독특했다.

“고려해볼 만하지 않소?”

“그렇습니다.”

관리들은 이 사실에 매료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좁은 거리가 낮은 구릉지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은 걸림돌이었으나 파남 또한 조그마한 산지가 사이에 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비슷한 환경이다.

게다가 근처의 거대 호수가 있다는 것은 항구적인 수원지로 작용하여 앞으로 이 운하에 필수 불가결한 시설물, ‘갑문’의 운용에도 편리함을 더할 것이다.

굳이 댐을 쌓지 않더라도.

상민은 밤낮으로 고민했다.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다.’

예전 삶을 살아갈 때도 이곳, 니카라과에 운하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보통은 파나마 운하가 유명하긴 했지만 니카라과 운하도 아예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불발된 까닭은 사회적 이유(농민들의 반대)와 경제적 이유(파나마 운하의 존재와 신파나마 운하의 증축) 때문이라 들었었다.

그러나 아예 맨땅에 처음 지어야 하는 현시대의 사정상 이런 요소들은 지금 새롭게 지어질 운하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상민은 결정을 내렸다.

파남으로 향했던 수송선들은 뱃머리를 다시 돌렸다.

조금 더 북쪽으로.

큰 수송선이 순조롭게 오갈 정도로 넓은 강을 거슬러 올라 호수 서쪽에 거주 구역을 만든 상민은 주둔군 일부를 떼어 이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아즈텍인들은 어떠한 농사도 짓지 않았다.

고려는 이들에게 정해진 양만큼의 흙을 파낸다면 식량을 주겠다고 했다.

물론 강제노역이지만, 열심히 일한다면 일한 만큼의 보상은 충분히 챙겨 줄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삶을 살아가면 다음 세대는 이 노역에서 해방될 것이었고.

그렇다면 스스로 제국의 일원이 될 권리를 가질 것이고 아즈텍말로 이곳을 지칭하는 ‘니카라오(니카라과의 어원)’ 사람으로 불리게 되겠지.

지도자 몬테수마의 돼지화 이후 어딘가 다소 타성에 젖어버린 이들은 삽을 쥐고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여전히 마야의 사제들이 떠들고 있었다.

산을 깎으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둥.

아즈텍 유민들의 일과는 단순했다.

땅을 판다.

파낸 흙을 감독관에게 가져가 밀가루와 교환한다.

그 밀가루로 빚은 틀락스칼리(토르티야의 원형)에 돼지고기와 야채를 싸 먹으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러한 일들의 반복.

교활한 고려인들은 그 와중에 자국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검증된 성과제와 경쟁체계를 도입해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언덕은 아직도 건재하며, 파낸 곳은 실로 미미했다.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십 년.

그러나 상민은 마침내 이곳에 첫 삽을 떴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앞으로 이루어질 기술의 진보는 이 대사업을 더욱 빠르게 가속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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