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마지막 핏줄들
치욕스러운 서신을 쓴 디미트리오스는 소피아 대성당에 유폐되고 실권은 다시금 콘스탄티노스에게 돌아갔다.
“술탄에게 전하시오. 이 도시를 얻기 위해서는 마지막 로마인들의 시신을 넘어서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위대한 장군 콘스탄티노스의 대답을 들은 메흐메트 2세는 그 의기에 감탄하면서도 다시금 공세를 재개했다.
피비린내 나는 방어전이 펼쳐졌다.
지긋지긋한 그리스인들은 견고한 성벽에 의지해 술탄을 괴롭혔다.
거의 3개월에 달하는 공성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아슬아슬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메흐메트 2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이 하나 되어 공격을 막아내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한다….”
그러던 도중 신하들 중 하나가 술탄에게 제의했다.
“저들이 버티고 있는 것은 모레아반도의 왕국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탄이시여, 검을 휘둘러 저들의 희망을 잘라내소서.”
메흐메트 2세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포위 공성을 진행할 군대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모레아로 향한다.”
당시 모레아는 전 친왕 콘스탄티노스가 다스리다, 그의 동생 토마스에게 왕위가 넘어간 상태였다.
토마스 친왕은 나름대로 훌륭하게 모레아를 이끌고,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이 위험에 빠지자 지원군을 편성해 함대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덕분에 이들은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 설령 지원을 보내지 않았더라도 술탄의 전면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을까.
코린토스의 지협에 건설된 헥사밀리온 방벽은 그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다.
동로마의 해군은 죄다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고 있는 상황.
술탄은 자신의 해군을 이용하여 헥사밀리온 방벽을 우회해 모레아에 상륙하였고 다른 곳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수도 미스트라스로 직진했다.
콘스탄티노플에 비교하면 이곳을 점령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웠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죽었고 메흐메트 2세는 그의 목을 취했다.
적의 공격에 성공적으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은 그나마 동맹 비스무리하다고 여길 수 있는 베네치아에 몸을 의탁했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미망인 카테리니 자카리아와 그녀의 딸, 조이 팔레올로기나도 그 대열에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수급을 취한 뒤, 그것을 콘스탄티노플 성문 앞에서 흔들었다.
“보아라! 너희들의 마지막 땅들 또한 점령되었다!”
친왕의 죽음은 모레아의 함락을 의미한다.
모레아에 본적을 두고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고향이 술탄의 손에 놓인 것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
게다가 수개월 동안 앞장서서 싸우던 콘스탄티노스가 공성전 도중 얻은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자 수비군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졌다.
마침내 그토록 끈질기게 저항하던 로마의 성벽이 함락되었다.
성안에 마침내 발을 디딘 오스만군은 도시를 유린했다.
어마어마한 학살이 펼쳐졌다.
메흐메트 2세는 사흘 동안 몇몇 중요한 건물들을 제외한 모든 곳에 대해 약탈과 살인, 방화와 강간을 묵인했다.
오스만군은 그동안 지긋지긋한 공성전을 치르며 생긴 분을 그리스인들과 서유럽인들을 도살하며 풀어대었다.
남자들은 가축처럼 도축되었고 여자들은 머리채를 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팔리기 위해 어딘가에 보관되었다.
비명과 절규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로마의 마지막 수도는 마치 소나기라도 내린 듯, 발등까지 차오른 핏물에 잠겨 있었다.
소피아 대성당에 유폐된 디미트리오스는 그 충격적인 광경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천년 로마의 수도가 저 짐승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로마가 내 대에서 멸망했구나.”
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성당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콘스탄티노플은 이후 콘스탄티니예라 불리게 되었다.
* * *
당시 오만 명에 달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 중 절반 정도는 어찌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학살을 피해 배를 타고 마르마라해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마지막 그리스인의 땅, 모레아반도가 함락되자 갈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술탄의 해군이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다는 것.
마지막 바실렙스(황제)로 기록될 디미트리오스의 미망인이자 바실리사(황후) 테오도라 아사니나는 자줏빛 망토를 들고는 유민들을 어찌 인솔해 베네치아령 크레타로 향했다.
그녀의 딸, 헬레나 팔레올로기나도 테오도라를 따랐다.
디미트리오스의 미망인 테오도라 아사니나와 딸 헬레나 팔레올로기나.
그리고 토마스의 미망인 카테리니 자카리아와 딸 조이 팔레올로기나.
동로마의 마지막 황족 두 명 모두 베네치아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로마 황제의 마지막 혈통들과 그리스 난민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영 내켜하지 않았다.
문화적 이질감도 이질감이지만 황제의 혈통이 눈을 뜨고 살아있다면 트집 잡기 좋아하는 술탄이 어찌 나올지는 도저히 몰랐으니까.
일단 예전의 빚이 있어 수용하긴 했는데.
베네치아의 도제는 결국 이 무리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자 했다.
“이탈리아반도는 어떠시오?”
옛 형제들은 당신들을 잘 돌봐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테오도라와 카테리니 모두 그것에는 반대했다.
이탈리아반도의 분위기는 십 년, 혹은 이십 년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다소 관대하며 느긋했던 이 반도는 지금 종교개혁과 이단에 대한 응징의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가는 것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있었다.
갈리스토 3세는 이교도와 이단에 대해 자비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단을 말뚝에 꿰고, 불태우는 교황이 있는 로마.
아무리 정교회와 가톨릭이 가족이라 하나 엄연히 다른 세월을 살아온, 이미 서먹서먹한 형제와 같았다.
어쩌면 그 괴리감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보다도 더 클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어디로 가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을까요?”
케팔로니아에서 머무르고 있던 카테리니의 물음에 베네치아 상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 베네치아 상인은 알바니아와 헝가리, 그리고 북부에 연줄이 있었다.
“정교회의 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아있는 곳은 상당히 멀고 험한 곳에 있지요.
“상관없어요.”
살아생전에 산채로 남편의 목이 잘리는 끔찍한 일을 겪은 카테리니의 단호한 말에 상인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바실리 2세는 당신들을 보호할 겁니다.”
크레타에 머무르고 있던 테오도라 또한 베네치아의 상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만 이 상인은 동유럽과 북유럽이 아닌 지중해에 연줄이 많았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상인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스로 가십시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가는 길도 순조로우며 대규모의 피난민과 함께하시려면 그곳밖엔 없을 것입니다.”
카디스는 이방인에 대해 관대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은 다른 이교도 국가가 점령했다 하던데요?”
“점령…이라고 말하기엔 조차지라는 것이 조금 독특하지요. 게다가 고려인들을 마냥 이교도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이미 성공회라는 가톨릭의 이단을 공언했습니다.”
이교도나 이단이나.
테오도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더욱더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하하, 아닙니다. 고려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에 관계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어딘가 이상한 동경을 품는 것처럼 보이는 상인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고려 제국의 술탄… 아니 황제는 종교 자유의 칙령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어지는 상인의 설명은 청산유수와 같았다.
테오도라는 고려와 친하게 지낸다는 베네치아 상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리스 유민들을 이끄는 이상 별달리 선택지도 없어 보였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트라페준타는 갈 수가 없다.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미 술탄의 해군이 그리스 난민을 무기력하게 떠나보낸 후 안타까움에 무릎을 치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니.
먼 길을 가다 죽으면 말짱 꽝이다.
테오도라는 적어도 자신의 옛 남편보다는 책임감이 강했다.
“네. 그곳으로 가겠어요.”
그녀는 딸과 함께 그곳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린 헬레나 팔레올로기나는 자신이 가지고 온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또래 애들이 으레 소중히 여기는 인형과 기타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그곳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흙이 담겨져 있었다.
* * *
과연 베네치아의 말대로 카디스까지 가는 여정은 순조로웠다.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베네치아 덕에 바르바리를 위시한 해적들의 위세는 크게 줄었고 모두가 베네치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위세 등등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지브롤터를 눈앞에 두고 돌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조그마한 해협을 두고 확연하게 바뀌는 분위기.
마치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마냥, 그들은 빠르게 카디스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마주한 함대가 이들의 진로를 막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들 수 척이 베네치아 함대를 가로막았다.
감히 당대 최강의 해양패권을 장악한 국가의 앞길을 막았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서둘러 흰색 기를 열심히 흔들어 재낄 뿐 어찌 대응하지 않았다.
“누… 누구입니까?”
테오도라는 떨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로마, 그리고 그리스 해군은 옛날에야 유명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스만은 육지에서 강력했다지만, 최근까지도 해군은 로마보다도 뒤떨어졌었다.
하지만 저 이색적인 깃발(청해함대의 푸른 용)이 휘날리는 함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로마와 오스만 모두가 합치면 이길 수는 있을까?
“츄웅버엄선이라 합니다. 바다 위의 포식자이지요.”
그들을 인솔하던 베네치아 상인이 마치 저 멀리에 있는 포식자들이 듣는 거마냥 목소리를 낮추고 소근거렸다.
“한 척이 금화로… 어후 말을 말죠. 그야말로 하나의 성채라니.”
베네치아는 고려의 함선을 본받아 새로운 전투선, 베네치안 갤리어스를 건조하기 시작했으나 전면적인 도입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게다가 대서양(대동양)에서의 전투는 새로운 함선이 나오더라도 영 자신이 없었고.
베네치아의 깃발을 확인했으나, 그 내용물이 일치하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던 고려인들은 검문에 협조적으로 임하는 베네치아인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외다. 요즘 당신네들의 깃발을 구해서 국적을 둔갑시키는 해적들이 활개를 치는 바람에. 게다가 함대의 인원이 소선들이라도 상당히 많아, 조금 경계하는 바가 있었소이다.”
당신들의 탓이라는 약간 무례할 수도 있는 청해 카나리 함대 제독의 말에도 베네치아 제독은 그저 굽신거리며 손바닥을 문지를 뿐이었다.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다 대고려의 황상 폐하께서 이토록 해적들을 토벌하시는 덕에 우리들이 안전하게 통행하여 그 은덕을 누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빈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려인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가시구려. 도제 각하의 서신은 잘 받았다고 전해주시고.”
* * *
카디스 총독 백윤환은 얼마 전 서신을 전달받았다.
베네치아의 도제가 보낸 서신에는, 로마의 마지막 혈통에 대한 보호를 부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웃기는 놈들이군.”
비록 무역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썩 믿음직한 상대는 아니었다.
“저놈들은 콘스탄티노플에 4차 십자군이란 비수를 꽂았었지. 거기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도 있는 건가?”
과거의 빚을 갚기에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나?
백윤환은 멸망한 동로마의 난민들을 도와주는 베네치아인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게다가 짐짝은 우리에게 떠넘기고?”
그러나 윤환은 슬쩍 웃고 있었다.
“오히려 좋다.”
시중은 그에게 쓸모있는 난민들을 거두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동시대 유럽과 이슬람을 통틀어 가장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의 난민들은 그야말로 보물덩어리와 다름없었다.
직조기술, 금속제련기술, 기타 여러 가지 기술들.
물론 고려 또한 이미 자체적으로 엄청난 기술적 혁신들을 이루어내고 있었지만,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였다.
고려의 문신으로서 윤환 또한 로마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서궁에서 공부하는 문신들에게 현 고려 이전 세상 최고 문명에 대해 논하라 하면 백이면 팔십은 로마―그리스의 문화를 칭송할 것이다.
나머지 이십은 한나라의 문화를 칭송하겠지만, 윤환은 동의하진 않았다.
윤환은 직감했다.
‘시중께서는 아마 더없이 기뻐하실 것이다.’
이들은 카디스에 정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환은 마치 먼 미래에 존재할 부동산 중개업자마냥 더 좋은 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작가의 말]
조이 팔레올로기나는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착하면 이름을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로 바꿀 겁니다.
헬레나 팔레올로기나(Helena Palaiologina, daughter of Demetrios)는 그 엄청난 미모 때문에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메흐메트 2세가 자신의 하렘에 넣으려 시도했다더군요.
물론 독살의 위협 때문에 포기했지만…….
그래도 메흐메트는 아름다운 헬레나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꼴을 도저히 보기는 싫었는지 아드리아노폴리스에 거대한 토지와 저택을 주고 혼자 살도록 했다 합니다.
헬레나는 결국 27살에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아마 메흐메트 2세의 비틀린 사랑이 그녀를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 역사와 틀어지는 시점은 대체로 해상십자군이 일어나는 1440년도 초부터라 보시면 됩니다.
모스타르 전투 이후 술탄이 은거했지만 서유럽의 사정상 바르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즉위 이후 아버지에게 다시 술탄을 되돌린 적 없이 계속 집권했습니다.
본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즉위해야 하는 것이 디미트리오스 1세가 즉위했습니다.
본래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모레아가 멸망했지만, 이곳에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