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66화 (166/653)

멸망하는 제국들(4)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중려대륙의 아즈텍이 제국으로서 사망을 언도받은 날.

불과 한 달 뒤, 또 다른 제국이 멸망했다.

고작 아즈텍과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너무나 찬란했던 문명.

훨씬 더 강력하고 화려했으며 인류 역사에 더없이 많은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제국.

서기 1450(개천 175)년

로마가 마지막 목숨을 다했다.

그 전부터 동로마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환자였다.

오스만은 이미 모레아(펠로폰네소스)반도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전 그리스의 영역을 석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다.

1437년, 오스만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 심지어 숙적 후스파와도 휴전을 하여 이슬람을 막아내려 시도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사망했다.

그는 여러 번 패배했을지언정, 오스만의 북진을 꾸역꾸역 저지했었다.

사망한 지기스문트의 지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에게 넘어갔다.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삶 동안 최선을 다해 오스만을 막아내고자 노력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전임자 지기스문트가 그동안 쌓아 올린 노련함이 부족했다.

제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은 술탄의 군대에게 전투 도중 살해당했다.

기독교의 왕들은 전전긍긍했지만 악재는 끊이지 않았다.

가장 큰 후원자여야 할 교황청은 다른 곳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목표는 오스만이 아니었다.

서쪽 바다에서 괴물이 다가왔다.

어쩌면 그 실체는 오스만보다도 더욱 거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다.

그들은 공감할 수 없었더라도.

교황청 주도로 고려에 대항하는 해상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선봉대가 저 멀고 먼 남방의 대륙에 상륙하자마자 대패했으며 본대 또한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추태를 보여주었지.

이후 고려는 거대한 대양을 넘어 기어코 응징을 했고, 유럽은 이리저리 무력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오스만에게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무라트 2세는 그동안 정복한 세르비아의 땅과 알바니아의 땅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세르비아의 데스포티스,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대세가 술탄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인정하며 항복하여 가신들과 백성들의 목숨이라도 살리려 노력했다.

술탄은 앞으로는 그를 관대하게 받아들였으나, 뒤로는 독약을 써 그를 살해하고 그의 막내아들 라자르 브란코비치를 통해 세르비아를 다스리기로 했다.

라자르는 정교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알바니아와 세르비아가 권역에 순조롭게 안착하는 듯 보이자, 무라트 2세는 다시금 북으로 진군했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왈라키아 연합군은 아주 절박한 어투로 계속 교황청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해상십자군이 끝났으니, 교황청이 지원을 해줄 여력이 있겠지.

교황청은 이번에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못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해상십자군이 끝나자마자 종교개혁의 광풍이 그들을 휩쓸었던 것.

배설 한스포르트가 터트린 이 화약고는 예상보다도 훨씬 더 큰 폭발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종교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고 있는 내전을 치르는 중이었고, 후스파는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의 골칫덩어리였으며 제국의 제후들은 서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여전히 상대방의 품에 있을 비수를 신경 쓰느라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고, 이베리아반도는 정복자 고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펠릭스 5세 사후 새롭게 교황의 위에 오른 갈리스토 3세는 여러 제후들에게 탄원서를 보냈지만, 전임 교황의 부정과 타락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변방 영주들과 주교들은 여러 이유를 들며 교황청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동유럽 기독교 세력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 나섰다.

1443년, 베네치아는 해상십자군으로 점령한 지역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자국의 이권이 첨예하게 달린 대오스만 연합군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일리리아와 발칸반도에 있는 베네치아의 속령들은 이제 코앞에 오스만을 두고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술탄은 아직 베네치아에는 시비를 걸지 않았지만 더 방관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몰랐다.

몹시 계산적이지만, 더없이 합리적인 베네치아는 대대적인 군사지원을 감행했다.

오스만이 깜짝 놀랄 정도의 황금이 베네치아에서 뿜어져 나왔다.

튀니스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의 무역을 주도하게 된 베네치아는 십자군에 참전한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거의 독보적으로 이득을 본 나라였다.

고려와는 어떠한 갈등도 유발하지 않았기에 양국의 무역은 해상십자군 이후에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리부동하다면 표리부동하겠지.

그러나 베네치아와 고려 상인들은 당대에서 한 손에 꼽힐 만큼 대단히 뛰어난 상인의 자질을 가진 자들.

과거의 악연에 매달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카나리는 베네치아 상인들로 북적북적했고 동서양의 문물은 이 작은 제도를 통해 활발하게 교류되었었다.

그리고 교류는 황금을 창출한다.

무역을 통해 강력한 부를 손에 넣은 베네치아가 참전하자 전황은 바뀌었다.

술탄은 시간을 얻었다면, 베네치아는 황금을 얻었던 것.

무라트 2세는 이들에 의해 여태까지 이룬 승리만큼이나 거대한 패배를 맛보았다.

유럽인들은 고려의 총기와 화포에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며 고통스러운 상처를 얻게 되었지만, 그 상처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냉병기의 몰락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고려는 해상십자군을 응징하며 전쟁의 앞선 패러다임을 그들에게 넌지시 보여준 것이다.

이교도의 무기이건, 이단의 무기이건, 강하면 장땡이다.

유럽인들은 고려의 무기를 받아들였다.

총기를 만들 잠재력은 이미 충분히 갖추어진 상황.

매치락 방식의 아퀘버스, 초기형 머스킷이 혼용되던 시절은 생략되듯 빠르게 지나갔고 고려의 수석식 소총, 즉 플린트락 머스킷이 대세로 자리잡혀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거금을 들여 당대 최강의 용병대를 섭외했다.

카디스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용병대, 페데리코 콘도티에로는 독특하게도 고려의 총기와 포를 적극적으로 수입해 쓰는 집단이었다.

본래 화포와 총기가 군사기밀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몹시 이상한 일.

그러나 페데리코가 가진 무기들은 고려 입장에선 다소 노후화되었더라도 유럽에서는 최신예의 화기임이 분명했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이제는 페데리코 다 카디스라 불리게 된 용병대장은 반쯤 고려의 봉신이었다.

그는 고려에게 충성서약을 한 뒤 귀속되어 카디스라는 도시에서 어느 정도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용병에 대한 수입 중 일부를 나누어야 했고 용병대에 상주하는 고려의 군사자문을 통해 유럽 최신 전투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 본국으로 전달해야만 했다.

긴 전쟁 기간 동안 군대 운용으로 국고를 쓰고, 다시금 북려 개척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실행하는 고려에겐 이런 무역과 용병에 대한 수입은 가뭄 앞의 단비와도 같았지.

어찌 되었든, 고려가 봉신으로 삼을 만큼 페데리코는 능력이 출중한 지휘관이었으며 그를 고용한 베네치아는 헤르체고비나 지역 모스타르에서 술탄의 군세를 말 그대로 박살 냈다.

강한 화력을 장비한 머스킷 총병대를 얇은 창병대로 감싸는 이러한 전술은 고려에선 전열보병의 시대가 오며 조금씩 사장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혁명적인 전술임이 틀림없었다.

고려 원어로 총창방진(Chongchangbangjin, 테르시오)은 아무래도 발음하기 어려워 카디시안 방진(Cadizian Square 카디스 사람의 방진)이라 불리는 이 전술이 유럽인들의 손에 다시금 탄생했다.

카디시안 방진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패배한 무라트 2세는 1444년 휴전협정을 맺고는, 제위를 열두 살의 어린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양측 모두 더 이상의 공격을 감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의 평화가 발칸반도에 내려앉았다.

* * *

그러나 동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겐 애석하게도 무라트 2세의 후계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부친보다도 더욱 출중한 능력을 자랑하는 천재였다.

비록 나이가 어린 채 즉위한 까닭에 선친의 은거와 동시에 일어난 제르지 카스트리오리(스칸데르베그)의 알바니아 민족 반란을 진압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장성하면서 오스만의 마지막 과업을 이루고 말리라는 야망을 품었다.

알바니아와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 맺은 평화 협정에는 단지 서북쪽으로 진출하지는 말라고 쓰여 있었지.

그는 오래된 숙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본래 술탄의 예니체리는 화기에 인색했다.

기독교 국가들보다도 더욱 빠른 시점에 핸드캐논을 도입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머스킷의 개량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페데리코의 용병대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선친이 충격을 받아 은거하자 술탄은 그 공포의 무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플린트락 머스킷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제위에 오른 지 불과 4년 뒤인 1448년, 열여섯의 나이로 자신의 스승이자 정적이었던 할릴 파샤를 비롯한 아버지의 잔재들을 숙청하고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는 눈을 돌려 동로마를 바라보았다.

이 시기, 동로마는 요안니스 8세가 죽고 제위 계승에 대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안니스 8세의 직계 혈통은 없었고 그의 형제들인 콘스탄티노스, 디미트리오스, 토마스가 제위에 대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 상황.

반쯤 눈치를 봐야 하는 동로마는 이제 오스만 술탄에게 제위를 ‘허락’받아야 하는 상황에까지 놓였다.

본래는 요안니스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행한 업적과 능력이 괜찮았다고 평가받는 콘스탄티노스가 후계에 오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앞으로 정복할 나라의 군주가 조금이나마 유능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로마의 제관은 뜬금없이 콘스탄티노스의 동생, 디미트리오스가 쓰게 되었다.

디미트리오스가 술탄에게 자신의 제위를 지지해 달라고 보낸 편지가 얼마나 낯 뜨거운 찬사로 가득했는지 당시 이 매번 반기를 들려는 그리스인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던 메흐메트 2세의 입가에도 어이없는 웃음이 띠어졌을 정도.

형제의 권력욕에 실망했더라도, 형 콘스탄티노스는 동생의 대관식에서 맹세했다.

로마의 존속을 위해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바실렙스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디미트리오스는 형의 세력이 아직 더 많은 것을 인지하고 있어, 애써 웃으며 그의 형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와 군대를 통솔할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로마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았자 이미 다가오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메흐메트 2세는 발칸반도에 남아있는 아테네 공국과 제노바의 세력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베네치아 또한 한 번의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혼자서 오스만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알바니아에 대한 불가침조약과 크레타 및 케팔로니아섬에 대한 영유권을 확답받고는 오스만과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

동로마에겐 우군이 없었다.

1449년, 어린 술탄의 검이 뽑혔다.

콘스탄티노플은 오직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에 의지해 오스만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언제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견고하다고 평가받는 평지성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공성이 벌어졌다.

빌어먹을 저 성벽은 대포로 쏘아대도 넘기 어려웠다.

그리스인들은 대포에 박살 난 구역을 이를 악물고 정비했으며 성벽보다도 대포가 먼저 지쳐 박살 났다.

지긋지긋한 공성에 치를 떤 메흐메트는 사절을 보내어 디미트리오스를 회유했다.

―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너희들을 모레아반도로 가서 살게 해줄 터이니, 이만 항복하라.

술탄에게 빌어 그토록 원하던 로마의 제관을 쓰게 되었지만, 이것이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디미트리오스는 열심히 답장을 썼다.

― 제관도, 로마도 모두 줄 터이니, 살려만 주시오!

그러나 이 치욕스러운 서신은 그의 형이자 수비군 총사령관인 콘스탄티노스에게 검열당했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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