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65화 (165/653)

멸망하는 제국들(3)

개천 175년(CE 1450) 2월.

아즈텍인들은 처음 보는 동물, 큰 돼지의 등 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몬테수마를 보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처음에는 이 같은 치욕을 선사한 고려인들에게 이를 갈았으나, 이내 다른 소문이 포로수용소에서 은밀히 퍼져 나갔다.

그들의 틀라토아니가 위장을 하고 도시에서 빠져나와 고려인들에게 비굴하게 항복을 청했다는 것이.

이미 몬테수마의 신원을 확인한 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이 소문의 증인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몬테수마의 치욕스러운 상황은 비단 고려인, 프랑스인 무장들과 병사들의 분풀이용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백성들 머릿속에 쌓아왔던 틀라토아니의 권위 또한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이제 짓이겨지고 있었다.

틀라토아니가 약속했던 그들의 발할라, 우이칠로포치틀리의 궁전은 그 개념이 근본적으로 부정당했다.

저들의 지도자가 저렇게 추하게나마 살아남길 원하는데, 무슨 놈의 영광스러운 사후 세계가 있을까.

분노의 화살은 이제 슬슬 고려인이 아니라 틀라토아니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노려 마야의 쿠쿨칸 사제들이 선교를 시작했다.

“당신들이 믿는 우이칠로포치틀리란 사실 실존하지 않는 허황된 존재입니다!”

“…….”

“진정한 신은! 오직 뱀신 쿠쿨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분은 고려제국의 황제, 태조로서 실존하여 우리 마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그래요! 당신들의 역사에서 기록된 그 위대한 토필친 케찰코아틀 말입니다!”

“……!”

“위대하신 신이시나 우리를 위해 찰나 동안 인간의 육신을 뒤집어쓰신 사제왕께서 다시금 동쪽에서 돌아와 그대들에게 과거의 죄를 묻는데 어찌 그대들은 이에 반성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처럼 마땅히 위대하신 용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려야 할 겁니다!”

종교 용어로서의 깃털 달린 뱀과 수염 난 용은 이미 수많은 곳에서 혼용되고 있었다.

‘난 모르겠다, 정말.’

아주 멀찍한 곳에 떨어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상민은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비웠다.

* * *

개천 175년 5월.

진호.

몬테수마에겐 터키석과 케찰 새의 깃털로 만든 화려한 의복을 입고, 가장 높은 사원에서 만인의 우러름을 받았던 세월은 너무나 먼 지난날의 이야기와 같았다.

돼지 등 위에 묶여 마치 짐승과도 같은 생활을 몇 달 동안 영위하다 보니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박살이 나 있었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치욕스러운 상황.

형과 부하들에게서 받은 배신들.

경멸과 적의가 뒤섞인 옛 백성들의 눈초리들.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몬테수마는 목숨을 그토록 아까워하던 그답지 않게 몇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24시간 그를 밀착 감시하던 병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 후로는 몬테수마에겐 입을 다물 수 없게 특수하게 제작된 재갈이 물려졌다.

보기엔 썩 좋지 않았지만, 보기 좋지 않으라고 채운 건데 뭘.

침이 질질 새어 나온다지.

그는 사정없이 취급당했다.

육체적인 학대는 없었다.

다만 집요할 정도로 계속되는 정신적 공격에 몬테수마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개념을 서서히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자, 밥을 먹고 싶다면 다시 똑바로 대답해라.”

돼지우리 안에서 그는 네 발로 엎드린 채 배식을 받고 있었다.

태도가 온순하다면 더 맛있는 음식을 받을 것이었다.

대답을 빨리 할수록 양을 조금 더 많이 받을 것이었다.

돼지나 먹는 꿀꿀이죽에서,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그리고 사람이 먹는 맛있는 음식으로 오기까지의 여정은 실로 험난했다.

눈앞에는 온갖 향신료로 맛을 낸 고깃덩어리가 놓여져 있었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뀌익!”

감독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한 마리의 돼지가 되어 있었다.

맛있는 고려 품종의 돼지.

― 툭

고깃덩어리가 떨어지고, 몬테수마는 정신없이 그것을 씹어 삼켰다.

상민은 몬테수마의 정신이 아예 박살 났다는 보고를 받자 그에게 다시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몸을 정양토록 지시한 후 불러내었다.

마침 아즈텍 포로에 대한 교화도 서서히 자리잡히고 있었다.

다시 본 인간은 과거의 인물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중려의 5월 날씨는 분명히 춥지 않은데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는 두 발로 걷는 것조차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몬테수마는 개처럼 상민의 발 앞까지 기어가기 시작했다.

“…….”

그리고는 그의 아래에 엎드려 발등에 입 맞추려 시도했다.

돼지가 된 인간은 다시 찾아온 평안에 사무치는 행복을 느낀 모양.

이 안락함이 이 회의실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에게 달렸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무장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저마다 시선을 돌렸다.

거열형을 주장했던 무장 또한 거열형이 차라리 더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상민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 ‘아즈텍 민족’에 대한 관대함은 있을지언정, 그들의 우두머리에 대한 관대함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발을 슬쩍 들어 올린 상민은 입을 열었다.

“너희 종자들의 부덕함과 흉폭함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제국의 발아래 이렇게 엎드려 자비를 구걸한다면 우리는 너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것이다.”

“뀌익.”

뭐야, 저게 대답이야?

상민은 마야 통역사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몬테수마의 옆에서 그 목줄을 쥐고 있는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감독관은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긍정의 대답이옵니다.”

“…그래.”

상민은 본래 진격을 진호쯤에서 멈추려 했었다.

그러나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고려군은 몬테수마를 포로로 잡고 그에게서 반쯤 길 안내를 받다시피 하며 이츠코우아티틀란으로 진격했다.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고려군 선두에 있는 몬테수마는 다시금 의복을 입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비록 아직도 언어적 능력이 복구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

그는 그냥 멍청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개업할 때 밖에 내어놓는 선전용 바람풍선인형은 역동적이기나 하지.

혀를 끌끌 찬 상민은 그래도 그의 존재가 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리저리 도망가던 아즈텍 유민들은 그들의 틀라토아니가 여기에 있다는 포섭된 포로들의 외침에 고려에 투항했다.

자비로운 정복자라는 외침보다도, 이곳에 오면 먹을 것을 준다는 선전이 더욱 잘 먹혔다.

“잘 봐라! 이 틀라토아니라는 것도 피둥피둥 살이 오르지 않았는가?”

날이 갈수록 아즈텍 포로들은 증가했다.

상민은 이 군입들의 숫자가 불어나자 본국의 이도에게 급히 추가적인 보급을 지시하는 서한을 보내야만 했다.

마침내 이츠코우아티틀란의 앞에 도착한 고려군은 텅 비고 불타버린 도시를 바라봤다.

인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함정일 것을 의심한 상민은 눈썰미 좋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도시가 완벽히 비워졌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진입을 승인했다.

고려군들은 긴장을 한 채로 천천히 도시에 입성했으나, 이윽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로써 북부 아즈텍의 가장 큰 성 두 곳을 모두 함락시켰다.

사실 8만의 대군으로도 고려를 막지 못했는데, 불과 몇천의 병력으로 항거하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을까.

난을 일으켰던 틀라카텍카틀들은 부하들을 몰아 남쪽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한 모양.

상민은 기병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뒤쫓아 전과를 올려보라고 지시를 한 뒤, 불타버린 아즈텍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흐르는 도시에는 이미 푹 썩어가는 시신을 제외한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결정했다.’

이 도시에 널려있는 아즈텍의 흔적을 지우진 말자.

한 500년이 지나면 이곳에 관광객들이 북적북적하며 카메라를 찍어대는 광경이 펼쳐지겠지.

그리고 이 아즈텍의 도시들은 존재만으로 고려의 프로파간다적 국가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상민은 자신의 이 피비린내 나는 아즈텍 정복이 고려의 영토욕에 근원한 것이 아닌, 부도덕한 체제에 대한 징벌로서 행해졌다고 기억되길 원했다.

합리화라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역사였다.

자신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국가의 도덕성은 최대한 지켜주고 싶은 것이 위정자의 욕망.

그렇다면 대신 두고두고 욕을 먹을 욕받이가 필요하지.

상민은 이 도시는 물론이고 진호에 있는 아즈텍의 유물을 최대한으로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반적인 민가는 사용처에 따라 허물어질 것이지만, 사원과 그들의 악행을 상징했던 벽화와 기타 건축물들은 모두 잘 보존될 것이었다.

치치멕강 남쪽의 도시라는 뜻의 치음(致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츠코우아티틀란은 새롭게 설치된 고려의 행정구역 택주(澤州)의 봉역거점이 되었다.

그 이름이 텍사스에서 기원한 이름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 *

개천 175년 6월.

상민은 치음을 점령하고도 얼마간 남쪽으로 기병대를 보냈다.

경기병대는 치음 남부 평야에 남아있던 포로들도 싸그리 잡아 왔다.

이미 아즈텍은 이 평야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모양.

택주에 제대로 된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면 저 평야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데 무리가 없겠지.

상민은 이로서 정복을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정복을 더 지속하진 않으십니까?”

무장들이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포로가 이미 수만을 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숫자의 유민들이 잡힐지 모르는 상태. 본군을 먹여살리기도 벅찬 마당에 남정을 지속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침 북쪽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골칫덩어리 평원민족 누무누의 습격.

민간에서 모집한 민병대에서 대응을 잘한 모양이지만, 민간에게 국가가 할 일을 떠넘겨서야 곤란했다.

“허면 저들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포로들을 잡아대는지 알 수가 없었던 무장들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바야흐로 천년의 사업을 시작할 때가 왔도다.”

상민은 맥강(陌江, 치치멕강)을 열심히 오가는 조그마한 수송선들을 바라보았다.

크기는 작으나, 숫자는 제법 많았다.

맥강 나루터에 있던 한 무리의 아즈텍인들이 마야인들의 인솔을 받으며 이 수송선에 올랐다.

이들은 강 하류에 건설되고 있는 항구로 도착한 뒤 범선에 오르겠지.

무장들은 그들 상관의 성정상 저들이 어딘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뭐 생각이 있으시겠지.

눈치 빠른 자들은 상민의 대답에서 단서를 찾고는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 고려의 천년 사업이라 함은, ‘그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 * *

‘제국’으로서 아즈텍은 이미 멸망해 있었다.

그들의 적법한 틀라토아니도, 북아즈텍의 가장 거대한 두 도시도 모두 고려의 손에 떨어졌다.

저들은 이제 제국이 아닌 단지 그들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전부인 도시국가 수준으로 몰락해 있었다.

텍스코코 호수에 처음 도착했던 먼 과거로 다시금 회귀한 것.

인간목장에서 풀려나 봉기를 일으킨 부족국가들은 패배했으나 살아남았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폐허와 상처 속에서 다시금 그들의 문명을 세우기 시작했다.

테노치티틀란 서쪽, 다시금 퓨레페차 왕국이 건설되었다.

그 옆에는 칼리스코라는 조그마한 공국도 건설되었다.

남쪽에는 요피진코와 투투테펙 공국이 건설되었다.

동쪽에는 틀락스칼라 공국이 건설되었다.

상민은 이들이 쿠쿨칸 신앙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한 후, 조공적 외교관계만을 수립하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마야에게 했던 것처럼 적극적인 문화 전파와 경제교류는 아직 딱히 할 생각은 없었다.

중려, 특히 멕시카의 땅에 있는 비대한 인구는 고려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웠다.

농경기술적 진보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마야 전체를 합쳐 보았자, 아마 멕시카의 땅에 살아가는 인구의 절반도 못 될 것이다.

두창은 과거의 일이었고, 학질과 황열은 마야와 달리 습지나 호수를 피한다면 나름 견딜 만하다.

게다가 광범위한 역병은 두창 이후에는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이는 정복자 고려인들이 스스로의 위생과 질병 방역에 굉장히 힘쓰고 있는 효과를 간접적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북려 원주민 동화정책은 고려가 개척과 이주사업을 진행하며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북려의 원주민 밀도가 낮았다.

낮다 못해 황량했다.

그러나 이미 특정한 부족 및 민족성을 띠고, 중앙집권화에 다다르고 있는 중려의 원주민들은 단시간 내에 동화가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이보다 뒤떨어졌다고 평가받는 타완틴수유를 동화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참인데.’

상민은 따라서 아즈텍, 아니 이제는 테노치티틀란으로 불릴 도시국가를 남겨두기로 했다.

틀라카엘렐, 한번 다시 발버둥을 쳐 보게나.

그게 우리가 원하는 목적이니.

이미 한 개의 왕국과 네 개의 공국은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하듯 가두고 있었다.

서로 싸우겠지.

치남파 농법을 아직 쓸 수 있는 테노치티틀란은 아직 강하겠지만, 아무리 잡졸이라도 뭉치면 쎄다.

중려의 조공국들은 고려의 참관 아래, 공동의 적에 대해 같은 대응을 하기로 맹세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고려의 조공국들 사이의 분쟁도 벌어지겠지만, 상민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중려의 갈등을 방관하기로 결정했다.

저들끼리 치고받으며 국가의 잠재력을 소모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상민은 이미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었다.

멕시카의 땅 중 후대에 가장 잠재력이 높은 땅, 즉 치치멕강 유역의 평지를 손에 넣은 이상, 고원과 건조지, 그리고 산맥에 있는 땅들은 딱히 쓸모가 없었다.

‘거긴 석유 안 나와.’

중려의 페르시아만이라 볼 수 있는 마야만 부근에 있는 땅이야말로 진국이다.

임시로 발령된 택주의 주지사 겸 사령관에게 치음 남쪽의 평야를 조금씩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민은 배를 타고 마야만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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