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하는 제국들(2)
[전투가 모두 끝난 이곳은 마치 수많은 짐승들을 도축하여 피가 흥건한 도살장과도 같았다.]
― 앙주의 사관 정이숙
북려사 174년도 진호대첩(鎭護大捷)의 기록.
주인을 잃은 팔다리와 내장 조각들, 그리고 핏물이 줄줄 흐르는 시신 더미들을 치우고 있던 고려군.
그 사이 마차 위에 올라앉은 한 부사관이 있었다.
본래는 그 성정상 같이 일이라도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끄응.”
처음에는 견고하게 제작된 마차였는데.
이제는 나무자재와 보강된 강철판이 유격이 될 정도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투마차, 보조바 흘라드바 위에서 제1근위연대 정교 김안섭이 불현듯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가 이끄는 조그마한 부대 소속의 병사들이 일을 하다 그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김 정교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안섭은 피식 웃었다.
몸이 갈라진 채, 대장인지 소장인지 모를 기다란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아즈텍군의 시신을 무덤덤하게 치우면서 자신의 이 ‘작은 상처’에 저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그러나 남의 죽음보다 동료의 상처가 더 가슴 아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뭐, 죽지는 않겠지.”
안섭은 군의관들이 도수가 가장 강한 주정으로 소독 및 처치를 하고 붕대를 감았으니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는 얼굴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흰 붕대가 손에 칭칭 감겨 있다.
꽤나 두터워 보였지만, 분홍빛의 옅은 핏물이 붕대 안쪽에서 은은하게 번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안섭은 전투 도중 적의 칼날에 검지손가락이 아예 잘려나갔고 중지손가락도 반쯤 너덜거리는 상처를 입었다.
감염이 되지 않는다면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비록 아직까지 몸이 저릿저릿하고 입술이 덜덜 떨릴 정도의 고통이 손에서 전해져 오고 있긴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나는 대고려의 근위군이다.’
이까짓 상처로 겁쟁이마냥 엉엉 울지는 않는다.
그동안 안섭은 군복무를 하면서 상당히 많은 상처를 입었다.
허벅지가 갈라진 적도 있었고, 복부에 화살을 맞기도 했다.
비록 주요한 장기에 손상이 가지 않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었지만, 오늘의 이 상처는 예전보다는 환부의 범위가 작았더라도 더욱 불운했다.
‘하필이면….’
손가락은 군인에게 있어 소중한 신체부위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소총병도 마찬가지였지만, 척탄병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폭탄을 던져야 하는 만큼 손에 어떠한 상처가 나면 아군에게까지 위험이 증가하여 복무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가 아무리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검지와 중지 없이 앞으로 치를 전투에서 진천뢰를 전부 다 정확하고 안전하게 다루리라는 장담을 하진 못했다.
자신 혼자 폭사하면 모를까, 주변의 전우들이 희생되는 꼴은 죽어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잘되었네.’
다시 소총병으로 돌아갈까?
마음만 먹는다면 왼손을 어찌 이용해볼 수도 있겠지.
‘그냥… 그만두자.’
하지만 안섭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현역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살기 좋은 한적한 곳에서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고 싶었다.
앙주는 인구수의 부족으로 초기의 개척민들에게 몇 가지 특혜를 주었는데, 일인당 점유할 수 있는 토지의 제한을 상당히 완화하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본국에서 사람들이 도저히 건너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여튼 이 특혜는 일시적인 거라니, 지금 붙잡을 수 있을 때 붙잡는 것이 좋겠지.
안섭의 부하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전역을 만류했지만 그는 결심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 * *
― 펄럭
이국적으로 지어지고 있던 도시, 몬테수마우아칸.
이곳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은 역시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제물을 눕히고 심장과 피를 뽑아대었던 그 신전에 이제는 고려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
신전이야 여러 가지 용도로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건축물들은 사용하기엔 조금 난처한 면이 있었다.
아즈텍의 해골탑 촘판틀리와 수많은 끔찍한 건축물들.
먹다 버린 쓰레기들과 유골들을 매장한 무덤을 바라보며 상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끔찍하고 해괴한 건축물을 박살을 내야 할까, 아니면 후대의 관광지 및 역사유적지로 남겨두어야 할까.
일단 시간을 두고 고민을 좀 해보자.
고려는 이곳의 이름을 진호(鎭護)라고 붙였다.
난리를 진압해 나라를 지켰다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어난 회전은 진호대첩이라 이름붙여졌다.
비록 모루가 약간 위태로워진 순간이 있었지만, 고려는 그 한순간을 제외하곤 시종일관 아즈텍을 압도했다.
사망자는 보병 백팔 명.
부상자는 이백사십칠 명.
합쳐봐야 사백 명도 되지 않는 미미한 피해.
화살에 맞은 경기병과 훈련이 덜 된 일반 보병의 피해가 주였으며, 근위연대와 장다름들은 사망자가 한두 자리에 불과했다.
반면 아즈텍은 달랐다.
아무리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종교가 잔인하고 파괴적이라 하나,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거듭된 충격과, 심지어 독전관들도 죽어 나가기 시작하자 아즈텍의 대열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적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자 길고 긴 추격전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한 경기병대들은 무려 보름 동안이나 말을 타고 다니며 몬테수마우아칸에서 도망가는 아즈텍군들을 죽여대었다.
이때 죽인 적병의 수는 실 전투에서 사살한 적의 숫자보다도 많았다.
팔만에 달하는 아즈텍 군세 중 오만 팔천 명이 전투와 추격에 의해 사살되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등 실종되었으며 일만 칠천 명이 포로로 사로잡혔고 오직 오천 명이 남하하여 이츠코우아티틀란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포로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구만.”
상민은 혀를 찼다.
대승을 거뒀지만, 본대보다도 더 많은 짐짝이 생겨버렸다.
이거 전부 다 군입인데.
“진의 백기는 사십만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지.”
상민의 혼잣말은 그의 본심을 담고 있진 않았다.
포로 학살은 그의 성정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성직자와 승려들도 그에게 다가와 비슷한 말을 했다.
“반항할 의사가 없는 자들이라면, 굳이 살계를 열 이유가 없을 듯하옵니다.”
“저들을 최대한 교화해 보겠습니다.”
병사들도 지휘부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충분히 죽이긴 했지.
도살장의 장소에 널린 시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약간 속이 울렁거리는 병사들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이 짐 덩어리들은 도시 바깥에 임시로 설치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늘어난 포로 때문에 보급로가 삐걱거리자 상민은 공세를 일시적으로 중단해야만 했다.
‘이들을 어디에 써야 하는가?’
상민은 한 가지 화두를 더 껴안았다.
* * *
개천 175년 1월.
고려는 진호를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공세를 중지했으나 많은 수의 아즈텍 유민들이 망국의 기운을 느끼고 피난길에 올랐다.
많은 수는 남쪽으로 향했지만 북부와 서부로 가는 자들도 있었다.
가라앉는 배에서 유민들이 탈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부 아즈텍은 통제력을 잃었다.
몬테수마는 이츠코우아티틀란에서 자신이 일군 제국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고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끝까지 이런저런 핑계만 댈 뿐 단 한 번도 지원을 오지 않았고, 심지어 식량조차 주지 않았던 형에 대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몬테수마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테노치티틀란으로 되돌아가 형을 단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으로 떠나기 직전의 밤, 몇 명의 틀라카텍카틀들이 난을 일으켰다.
귀족이자 권력가인 장군들은 일반 전사들과 백성들처럼 맹목적으로 틀라토아니에게 충성하지도 않았고 광신적이지도 않았다.
가려 뽑은 전사들이 몬테수마의 궁전으로 향했다.
몬테수마의 최측근들은 잠결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도시를 휘감았다.
그러나 정작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던 몬테수마는 궁전에서 도시를 내려보다, 암중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서둘러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 척 척 척 척
반란을 일으킨 틀라카텍카틀들을 따르는 전사들이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비록 아즈텍의 교리가 강화되며 틀라토아니는 현신인과 비슷할 정도로 그 위상이 격상되었으나, 최근 몬테수마는 무능력한 모습만 실컷 보여주고 있는 군주였다.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지도 못했고, 심지어 전쟁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패한 무능한 군주.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과 계급이 낮고 광신적인 병사들이야 아직 그를 지지할진 몰라도 위계가 높고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전사들은 상당수가 그의 지도력에 큰 의문을 품었다.
게다가 피필틴이라 불리는 귀족들은 의문을 품는 것을 넘어 항상 틀라토아니를 어느 정도 적대하고 있었지.
형제는 틀라카텍카틀들과 귀족들을 은연중에 탄압하며 권한을 제한시키고 있었으니까.
‘남쪽으로 달아나야 하나?’
아직 남쪽의 전사들에게까지 그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몬테수마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남부에는 군권과 통치권 모두를 휘어잡고 있는 그의 형이 있다.
이 반란을 일으킨 틀라카텍카틀들이 틀라카엘렐과 무슨 관계인지도 명확하지 않았으며 형의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젠장.’
당장 자신이 내일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가 형을 단죄한다는 계획을 세웠지 않는가.
필히 죽는다.
형의 냉혹한 성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영광을 운운하며, 자신을 신에게 바칠 것이다.
몬테수마는 자신이 신전의 가장 꼭대기에서 가슴이 갈라져 그 심장이 뽑힐 운명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 아니 된다!’
세상 모두를 죽여도 나는 아니 된다!
나는 고귀한 혈통이며 위대한 전사다!
나는 우이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 그리고 케찰코아틀의 선택을 받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란 말이다!
한동안 벌벌 떨던 몬테수마는 결국 도주를 선택했다.
더 이상 용맹하고 난폭했던 아즈텍의 틀라토아니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새의 깃털로 장식된 머리 장신구와 화려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가장 허름한 옷, 거의 넝마와 다름없는 것만을 껴입은 추레하고 비참한 몰골로 전사들의 감시를 피해 도시를 나섰다.
그가 가는 방향은 북쪽이었다.
* * *
그리하여 그놈이 왔다.
만악의 근원 중 하나이자, 중려에 피바람을 몰고 온 주범.
일세의 효웅인지, 아니면 그냥 미친 학살자인지.
문화의 상대성이라는 말은 적어도 이 아즈텍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
처음 미친 아즈텍인 하나가 군영 바깥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을 보고받았을 때엔, 무슨 이런 것으로 보고까지 하냐고 약간 핀잔을 할 뻔했지.
자신을 틀라토아니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남쪽에서 왔다는 추가적인 정보를 들었을 땐, 숫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로잡은 아즈텍인들 중 몇 명이 엄청나게 동요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확인 결과, 이 넝마를 걸친 중년인은 진짜 몬테수마였다.
그 얼굴을 가까이서 제대로 본 사람은 일단 프랑스와 고려인을 불문하고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상민은 거듭 의심했으나, 아즈텍 포로들 중 위계가 높은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긍정하는 모습에 서서히 그 의구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의구심 대신 차오르는 것은 허탈함.
어이가 없구만.
아즈텍의 가장 위대하다는 정복군주가 이런 꼴로 오다니.
그것도 제 발로 적대 세력에게 목숨을 구걸하러?
상민은 화가 났다.
타완틴수유의 마지막 반군 지도자, 파차쿠티는 적어도 용감하게는 죽었다.
반면 네놈은?
정말로 역겹고 추악했다.
무장들도 어안이 벙벙한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윽고 소란스러움이 퍼져 나갔다.
몬테수마는 치욕스러움인지 자괴감인지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지휘부 마당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email protected]#*#….”
“뭐라 하는가?”
마야인 통역사가 통역을 시작했다.
“동쪽의 틀라토아니에게 고한다. 테노치티틀란의 적법한 틀라토아니이자, 여러 위대한 신들의 말씀을 듣는 본인은 그대의 자비로움에 기대어 신변의 보호를 청하노니 그대들의 풍습에 따라 대우받길 희망한다.”
이 쓰레기 같은 놈.
고려는 아즈텍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다만 격리해 수용했었지.
이자의 신원을 확인한답시고 그곳에 데려갔었다.
아마 그 광경을 보고 적잖이 안심을 했을 것이다.
이 정복자들은 포로를 죽이지 않는구나, 하면서.
“…….”
이 대단한 잔혹성을 가진 인간도 하루아침에 저렇게 변해 비굴한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장들은 모두 분노한 얼굴이었다.
“이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이자를 거열하여 흉하게 죽은 자들의 원혼을 달래소서!”
본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을 청해오는 자들을 죽이는 것은 무장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물론이고 당장 전우들이 죽어 나간 프랑스 출신들의 무장들은 눈앞의 존재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극형, 거열형을 운운하는 자들도 있었다.
세뇌된 아즈텍 포로들이야 모르겠지만 이놈은 그들을 부리며 살육의 행진을 한 당사자였으니까.
심지어 이제는 눈살이 찌푸릴 정도로 추한 면도 보였다.
무장들은 몬테수마를 처형하고 군주를 잃을 이츠코우아티틀란으로 곧바로 진격하자 건의했다.
하지만 관리들이 조심스럽게 반대했다.
“우리가 지금 수많은 아즈텍 포로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상, 이들의 우두머리를 우리 손으로 죽인다면 필시 큰 소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상민은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광신적인 포로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주범.
명예와 도덕.
실리와 이득.
상민은 입술을 깨물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아즈텍 포로들이 그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었지.
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납기는 무척 사나운 데다가, 밥은 꾸역꾸역 잘도 처먹는 인간들.
이들을 어찌 교화해야 하는가는 중대한 문제였다.
교화를 해야 어디에라도 노동을 시켜 써먹지.
‘그 전에….’
교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옛 신앙에 대한 해독작업이 필요할 것이고.
그래.
잠시만 분노를 조절한다면 이는 분명히 호재였다.
몬테수마는 그의 주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상민의 경계 대상은 냉혹하며 계산적인 틀라카엘렐이지, 눈앞의 버러지가 아니었다.
상민은 결정을 내렸다.
“한 나라의 왕을 사사로이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또한 항복해온 자를 죽이는 것도 전례가 없었다.”
무장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카스티야의 엔리케와 위라코차 잉카도 살아남았지.
물론 그 둘이 식인을 하지는 않았다.
“그대들의 분노는 이해하나, 고려의 명예가 달린 일을 감정으로 처결할 수는 없는 법.”
“시중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무장들은 이윽고 감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다소 불만에 찬 자들도 있었지만, 입 밖에 표출하진 않았다.
시중의 자리는 아무리 고려의 전권을 휘두르는 벼슬이라 하나 엄연히 황제의 신하였다.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이 금기시된다는 건 무장들도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은 물론 별로 생각도 안 하고 있을 사항이겠지만.
제장들의 분노를 달랜 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죽은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 순 있지.”
상민은 잔인하게 웃었다.
“그의 옷을 전부 벗긴 뒤, 최대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덩치가 큰 돼지의 등 뒤에 묶어 포로수용소를 수차례 왕복하도록 하라.”
무장들이 눈이 치켜떴다가 이윽고 호선을 그렸다.
“예. 당하. 기필코 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
광신적인 백성들이라 해도 그 놀라운 광경에서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겠지.
몬테수마를 순교자나 전사자로 만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