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하는 제국들
개천 174년(CE 1449) 10월.
고려의 아즈텍 정벌전이 시작되었다.
주 군세는 앙주에서 시작하여, 북부 아즈텍의 중요 도시이자 몬테수마 틀라토아니가 기거하는 몬테수마우아칸이 목표였다.
앙주 자체의 힘과 본국의 증원군을 포함하니 기병 천삼백과 보병 및 포병 육천, 기타 물자를 수송하는 병력까지 구천에 달하는 군세가 모였다.
바다에서는 누범선 스물일곱 척과, 중범선 다섯 척이 이를 지원하며 보급로를 보호했다.
해군은 기주의 군세들이 배에 타고 있어, 혹시라도 내려질 후방 교란의 임무와 적 보급선의 차단 등의 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주와 파남의 군세는 적었다.
두 주를 합쳐서 천오백의 보병이 모였고 이들은 중려 원주민 중 가장 방어가치가 높은 퓨레페차의 근거지로 향했다.
이들은 본군의 전략을 지원하기보다는, 틀라카엘렐이 이끄는 남부 아즈텍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만약 이들이 테노치티틀란에서 허점을 드러낸다면, 이를 깊숙하게 찌를 테고.
아즈텍은 그동안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 저력을 끌어모아 엄청난 대군을 동원했다.
물경 팔만에 달하는 군세를 또 한 번 일으켰는데, 그 기세가 심히 대단하고 흉험했다.
이는 가장 최근의 누벨 오를레앙의 공세에 그렇게 많은 인적 피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일 듯했다.
평원 부족과 고려의 변방 공격도 최근엔 뜸했으니.
하지만 고려군은 여덟 배에 달하는 수적 불리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몬테수마우아칸으로 진군했다.
남려의 패자와 중려의 패자가 본격적으로 조우했다.
고려는 느긋했다.
그동안 비축해놓은 식량은 충분하고, 키닌도 넉넉하게 받았으며 보급로는 견실하고 그 길을 방어할 경기병들도 있었다.
반면 아즈텍은 수성의 입장이지만 훨씬 다급했다.
옥수수와 기타 곡물들의 소출은 불안하고 틀라카엘렐에서의 지원은 목장들의 난으로 인해 오지 않았다.
목장도, 승리한 정복전쟁도 없으니 인육의 수급은 당연히 불가.
몬테수마는 수성이 아닌 회전을 결정했다.
방어를 할 만한 성곽이 6년 만에 뚝딱 건설될 규모의 도시도 아니었고 저들이 불을 뿜어 철구슬을 날린다면 문이 버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강력하다고 하나, 몬테수마는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며 치른 전투경험 덕분에 수적인 절대우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화염을 쏘는 막대기도 위협적이긴 했지만 다시 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되었고.
* * *
그래서 상민의 눈앞에도 저 팔만의 군대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군.”
고려의 입장에서도 회전은 바라 마지않은 사항이었으니, 그들 또한 회전이 예상되는 평야로 천천히 진군했다.
상민은 이 군대에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참관자, 혹은 조언자의 자격으로 왔을 뿐.
군대의 지휘는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자신은 한 번도 이 정도로 규모가 큰 군을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후손인 해윤이 더 잘하겠지.
남려에 처음 떨어진 삼별초의 숫자는 이의 절반인 사만, 게다가 둘로 쪼개졌지.
상민이 이끄는 병사의 숫자는 처음에는 상당히 적었다.
이후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제대로 된 갈등을 빚은 동예와 유럽과의 전쟁에서도 그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지휘권 자체는 숭무감에서 교육을 받은 장군들이 행사했다.
그는 단지 역량이 맞는 장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최선의 지휘부를 꾸렸을 뿐.
무인으로서 앞에 나아가 칼을 휘둘러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러한 한순간의 유흥으로 대계에 지장이 가게 하는 것은 혈기가 이성보다 앞서는 멍청한 무장들이나 하는 짓이다.
“시작하시지요.”
“알았어요.”
그리고 이 전투의 총지휘관은 너무 당연하게도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구겠는가.
잔이지.
숭무감의 장군들조차 전부 그녀를 인정했다.
애시당초 고려의 장군들이 그녀만큼 많은 실전을 치른 적이 없었기도 하고, 그녀가 화기를 운용하는 전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것도 있었다.
상민은 자신이 이 시대의 천재에게 군략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밤마다 토론하는 모의 전술에서도, 그가 그녀에게 승리한 것은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조차도 잔이 자신의 자존심을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국가를 승리로 이끄는 대전략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에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전략게임 조금을 해 봤다고 자신이 명장이 되어 이 시대의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오만을 넘어 숫제 멍청한 말이다.
물론 상민은 스스로가 꽤나 재능이 있고 나름대로 괜찮은 장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배기 천재의 생각을 배울 땐 배워야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을 이렇게 친밀한 관계하에 지근거리에서 관찰하는 기회도 다른 사람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 전령!
여왕의 목소리가 청명하게 퍼져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전령들이 헐레벌떡 모여들었다.
잔은 주머니에서 아주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계산하더니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적색 깃발은 화포 포격이 마무리되고 십 분 뒤. 청색 깃발은 그 후 오 분 뒤.”
“예! 전하!”
전령 몇 명이 장다름 중기병대와 과트라체 경기병대가 있는 좌익으로 신호를 전달할 깃발부대에게 서둘러 달려나갔다.
“포병대의 사격은 사전 하달한 명령대로 거리에 따라 순차로 사격한다. 마지막 포도탄 사격 이후에는 최후방으로 빠르게 이탈하여 안전을 도모해라!”
“예!”
포병대에도 전령이 달려나갔다.
“후미에 일러, 포병대 이탈과 동시에 보조바 흐라드바(Vozová hradba)들을 전열에 내세우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 후로도 명령들이 줄지어서 내려졌다.
마치 오래된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상민은 이후 벌어질 전투의 양상을 대뇌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재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예 고화질 동영상으로 반복해서 돌려보고 있겠지.
상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의 아내는 전장에 온 순간부터, 진실로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번뜩이는 눈과 범접할 수 없는 기세.
조국을 승리로 이끈 일세의 장군.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새로운 조국을 승리로 이끌겠지.
자신은 샤를 7세와는 달라, 그녀의 재능을 완벽하게 개화할 수 있게 모든 여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물자와 병사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들까지.
명령을 하달하는 사이에도 저 멀리 보였던 아즈텍군은 이미 지척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에 절여진 미치광이들.
그로 인해 본질적인 광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 무장은 전형적인 오합지졸이다.
그러나 그 수만큼은 거짓이 아니기에 전쟁을 많이 겪어보았던 병사들의 다리도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개전의 시작은 예정대로 대포의 몫이었다.
― 콰아앙
화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실로 우렁차게 들렸다.
고려에는 그 크기와 길이, 구경에 따라 화포가 많았다.
중포(中砲, 컬버린)로 분류될 수 있는 열 문의 화포가 먼저 그 사거리와 화약량에 걸맞게 먼저 사격을 실시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거운 탄환이 적들의 품으로 맹렬하게 날아갔지만, 폭음과 연기에 비해 실제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포탄에 직격당한 적은 육편 조각이 되어 박살이 났겠지만 순식간에 후열인지 어딘가로 날아가 확인조차 할 수 없고.
포탄은 무거운 쇠공에 불과했기에 주변에 부가적인 피해를 효과적으로 줄 수 없었다.
살기인지 악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적병들은 요란한 소리에도 몇 번 멈칫하다 이윽고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화약은 익히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군의 수는 객관적으로 그들보다 적었으니 사기는 아직 충분했다.
중포가 물러나고 소구경 포가 뒤이어 재빨리 발사했다.
독특하게 설계된 이 포는 특이하게도 포가 2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곳을 자포(子砲), 그리고 그 자포를 끼워 발사하는 본체를 모포(母砲)라 칭하며 이 모두를 자모포(子母砲)라 불렀다.
이동식 거치대에 높낮이와 방향을 바꿀 수 있게 설치되어, 빠른 장전속도와 함께 상당히 유연한 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 강점으로 꼽혔다.
― 콰광
화약량은 중포보다 확연히 적었기에 전보다는 폭음과 연기가 덜했다.
그러나 속사에 특화되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빠르게 장전한 포는 다시금 몇 번이나 화염을 뿜어냈다.
중포보다는 확연하게 효과가 좋았다.
적병 돌격의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4번, 기능고장!”
“17번, 기능고장!”
“23번….”
물론 자포와 모포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포의 안정성과 결부되는 문제라, 충격을 받는 접합부는 지속적인 불안요소로 작동하였고 이는 빠른 기능고장을 초래했다.
자모포 수 문이 이탈했다.
테두리에 금이 가거나 자포와 모포 사이의 틈이 계속 벌어지는 것을 무시한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대포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마지막 임무까지 수행하는 것에 성공했다.
― 콰앙
― 후두두둑
하나의 포환 대신 수많은 자탄이 전면으로 넓게 퍼져나간 포도탄은 지금까지의 공격과는 달리 그 악귀 같은 아즈텍군들에게 무시무시한 피해를 입혔다.
― 으아악!
달려오는 적들은 순식간에 나뒹굴었다.
아비규환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산탄의 파도는 순식간에 적의 선두를 무력화했다.
아쉬운 점은 지근거리에서나 유효한 타격이라 기회가 한순간밖에 없다는 것.
다만 적군의 기세가 확연히 꺾인 틈을 타 고려군은 포병을 안전하게 뒤로 물리고, 후열에서 무언가를 다시 전면으로 끌고 나왔다.
대포는 아니었다.
굳이 비슷한 점을 꼽아보자면 둘 모두 이동 부분에 바퀴가 달렸다는 것 정도.
뒤에서 나온 ‘마차’가 앞열에 나란히 정렬했다.
보조바 흐라드바(Vozová hradba, 바겐부르크).
근접전에 대한 대비 또한 예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들이 쓸 수 있는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후스파가 교황청의 토벌군을 상대로 쓴 전투마차.
이의 이름을 따 만든 방어용 마차가 고려군 진형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차를 정돈하고 묶인 말들을 빠르게 풀어내니 순식간에 평지에 일자의 방어물이 생겨났다.
개념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로마는 물론 한나라에서도 사용했으니까.
다만 핸드캐넌을 비롯한 화약무기와 결부되어 대기병, 대보병 모든 경우에 아주 맹활약을 한다는 것을 체코인들이 증명해냈지.
물론 상대가 대포 및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비대칭적 전력 상황이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후스파 민병군이 교황청의 십자군을 이겨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후스파에 고려군을, 십자군에 아즈텍군들을 대입한다면 무지막지하게 벌어진다.
아즈텍군들은 몹시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이 마차와 바퀴라는 것.
둥글게 굴러가는 원형의 무언가는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어린 애들의 장난감에나 볼 수 있었을까.
굴러다니는 큰 나무 요새라니!
이렇게 거대한 마차는 그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면이 있었다.
전투마차는 상당히 독특하게 설계되었다.
일단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한 면은 철제로 완전히 보강되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한 면은 반대로 뜯어낼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마차는 계단 다섯 칸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바퀴를 뜯어내면 하나의 성채가 되었다.
전열은 그 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사격을 하고 근접한 적에게 총검을 찍어 댈 수 있었다.
후열의 총병들은 마차 방벽 계단 중간 부분, 즉 눈높이인 세 번째 칸에 뚫린 총안(銃眼)으로 사격이 가능했다.
비록 섬세한 조준은 불가능했지만, 화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적은 물 반 고기 반이니.
강철이 덧대어진 성곽이 생겨났다.
고려군은 평지에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을 건설해놓고 또다시 아즈텍군들이 제 발로 사지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 타타탕
방벽 너머에서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달려오던 아즈텍군들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고려군들은 콜록이면서 재장전을 준비했다.
화약낭에서 종이봉지를 꺼내 입으로 뜯는다.
화약 조금을 화약접시에 놓고 수석을 뒤로 당겨 밀폐.
남은 대부분의 화약을 총구에 넣고 하단의 긴 막대를 이용해 화약을 잘 쑤셔 넣는다.
막대를 다시 소총의 하단부에 넣고 조준.
그리고 격발.
― 타타탕
다시금 허수아비마냥 선두의 아즈텍군들이 쓰러졌지만, 이미 몇 명은 마차까지 상당히 접근을 해 온 상태.
전열의 일부는 자신들의 총검 상태를 확인하고 근접전을 대비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후열의 고려군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사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계적으로 한들, 객관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유럽과의 전쟁에선 큰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동예에선 병력의 우위를 살렸고, 카디스에서는 좁은 해변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화망을 구축했으니까.
그러나 이 평원은 이야기가 달랐지.
아즈텍군들은 자신의 피인지, 이미 죽은 동료의 피인지 모를 붉은 액체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끝내 아득바득 마차에 붙기 시작했다.
아즈텍의 발할라, 우이칠로포치틀리의 궁전에 들기 위한 그들의 집착은 광기와도 다름없었다.
고려군들은 위에서 긴 소총에 달린 총검으로 적들을 찍어눌렀으나, 몇 명은 그 총의 앞을 잡아챈 아즈텍군들에 의해 그들의 인파 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이내 난자당해 사망했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총안에서는 화염이 다시금 뿜어져 선두를 쓰러뜨렸지만 이미 적군의 파도는 이 얇은 마차 선 앞으로 잔뜩 몰려온 상태였다.
가느다란 모루는 이제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잔과 그녀의 지휘를 관찰하고 있던 상민은 이 위태로운 모루 위에 먹잇감이 알맞게 올려져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 * *
지축이 진동했다.
다시금 그날의 악몽을 재현한다는 듯, 과트라체 경비병들이 좌측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몬테수마도 머리를 굴렸는지 옆의 병사들로 하여금 미리 준비한 긴 창을 꼬나쥐게 한 뒤 그 뒤에 궁수를 배치해 경기병대의 충격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총격전을 위해 만든 총기병.
과트라체는 정면으로 돌진하다, 갑자기 우측으로 방향을 틀고 저들의 진형과 나란히 말을 달려나갔다.
“발사!”
짧은 기병총이 불을 뿜고, 순식간에 전열이 녹아내렸다.
기병총 두 자루, 그리고 발사된 두 발.
단 두 발이지만 창을 들고 있던 자들이 일순간 가슴과 팔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 뿌우우
몬테수마는 이를 악물었다.
저 정도의 귀찮음은 견뎌낼 수 있다.
앞에 보이는 저 방어선만 넘어갈 수 있다면.
저런 귀찮은 놈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경기병이 한바탕 휘몰고 사라진 자리, 그 뒤에는 다른 존재들이 몸을 숨기고 말을 속보로 몰아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전신은 번쩍였다.
마갑은 말의 다리까지도 보호할 수 있게 슬쩍 내려가 있었다.
마찬가지의 철제 마면은 말의 주변 시선을 차단하는 조그마한 차안대(遮眼帶, 말 눈가리개)가 부착되어 좌우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 위에 탄 것은 강철의 인간.
온몸에 작은 틈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빛이 나는 그 군대는, 푸른 바탕에 드 아르크의 문양을 흉갑에 새겼으며 견갑에는 고려와 정북행성의 삼태극 무늬라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색을 하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낀 것은 거대한 창.
카우치드 방식으로 껴진 거대한 기병창(헤비 랜스)은 상민이 보기에 그 길이만 거의 4미터에 달했다.
“기억하라! 창은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신체에 밀착시키는 것이다!”
말은 속보(速步)에서 구보(驅步)로 전환했다.
― 다그닥 다그닥
가장 선두에 선 에티엔이 말발굽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듣고 또 들은 말이지만, 장다름들은 다시금 그들의 팔과 흉갑에 부착된 기병창걸이(lance rest),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기병창을 조정했다.
프랑스 기사들이야 믿음직스러웠지만 증원된 과트라체 출신의 장다름들은 이것이 첫 번째 진짜 전투였다.
“말에게 네 몸을 맡겨라. 오로지 네 말의 힘으로 적을 박살 내라. 너희의 육신은 그 힘을 온전히 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창을 휘둘러 어설픈 장난질을 하는 것이 아니야!”
― 후욱 후욱
머리까지 깊게 눌러 쓴 철제 투구.
조그맣게 뚫린 투구의 눈구멍.
말과 기병 모두 오로지 정면을 보는 순간.
말은 구보(驅步)에서 습보(襲步)로 전환했다.
― 두두두두
마치 말발굽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한 착각이 난 이후, 적 전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장다름들은 그 아무도 눈을 감지 않았다.
핏줄이 터질 때까지 앞을 노려보는 그들의 오른팔에 이윽고 거대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 콰드득
“히히힝!”
― 으아아악
말이라는 동물을 본 지 불과 수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전통적인 대기병방진이 완벽하게 정착될 리 만무한 아즈텍군들은 불과 삼백여 기의 중기에 전열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기병창은 무려 세 명을 관통하고는 부러져 나갔고, 인마는 적병의 파도에 뛰어들었다.
에티엔은 다시금 뒤로 빠져나가 기병창을 새로 보급받고 돌격하려 했으나, 한순간에 박살이 난 적군의 대열 덕분에 아주 깊숙하게 들어왔다는 것을 인지하고 빠르게 생각을 바꿨다.
“일직선으로 돌파한다!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모두 죽여!”
롱소드를 빼어 든 푸른 기사들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들과 그들의 말에게 가해지는 공격의 대부분이 판금갑주에 의해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피의 주인은 대부분 아즈텍군이겠지.
목과 팔다리가 날았다.
그동안 상당히 고된 훈련을 해온 장다름들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동안 말 그대로 적병들의 시신을 사방에 한 무더기로 쌓아 올리고 있었다.
휘두르는 족족, 무언가가 잘려나가고 핏물이 뿌려졌다.
에티엔은 이를 악물고 말을 제어했으나, 자신이 죽인 시신들이 너무나도 많아 오히려 통제가 어려웠다.
일직선으로 돌파는 개뿔.
적의 수도 여전히 많았다.
비록 지금은 양 떼 무리에 들어간 늑대마냥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지만.
‘공세가 돈좌된 기병은….’
하지만 절묘한 순간 구원의 손길, 아니 총탄이 사방으로 날았다.
― 타타탕!
장다름들이 적병 혹은 적병이었던 것에 방해를 받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과트라체 경기병들이 다시금 지척까지 달려와 기병총에 담긴 탄환을 사방에 흩뿌렸다.
“이거 고맙군.”
씩 웃어 보이는 과트라체 경기병대의 뒤를 따른 장다름들이 다시금 보급대로 말머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미 그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인해 아즈텍군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와 옆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기병들의 공세는 순식간에 그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다!”
마차에 돌격해 장애물을 건너야만 살아남는다.
한 틀라카텍카틀의 절규에 이미 극도의 혼란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알고는 있었다.
저 마차 방벽 중간 뚫린 조그마한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굉음은 그들을 주기적으로 학살하고 있었으니까.
― 털썩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안의 높이에까지 이미 죽어간 자들의 시신이 쌓여가고 있었다.
아즈텍군들은 그 역설적인 행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신의 산을 반쯤 기다시피 올라간 아즈텍군들 앞에는 어딘가 낯익은 물건을 든 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직접적인 전투경험을 통해 한층 더 개량된 투척형 진천뢰.
이를 전문으로 운용하는 척탄병(擲彈兵)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