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화와 계급 그리고 개화
고려 화주 부근의 원주민 집단은 다양했다.
그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곳은 무스코기(크리크)족.
이들은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살아가는 부족 집단이었기도 했다.
이 무스코기족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주변의 다른 부족들도 그들의 언어에서 파생된 방언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본래 무스코기족은 고려 화주가 있는 지역까지 걸쳐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엔리케를 위시한 카스티야인들이 누에바 갈리시아를 세운 이후, 카스티야인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스코기 부족들을 북쪽으로 몰아내었다.
많은 피가 흘렀지.
카스티야인들이 총과 활을 쏘며 몰아낸 것은 무스코기족뿐만이 아니었다.
남쪽의 시마놀과 마야미 또한 그들의 토벌 대상에 들었었다.
흰 피부의 짐승만도 못한 침략자들은 그들의 적이자 근심거리였다.
항거해 보려고 했으나, 이들의 무력은 원주민으로서 감히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고 강인했다.
한동안 무스코기 부족들은 동쪽에서 온 흰 피부의 무리들에 의해 고통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남쪽에서 다른 무리들이 나타났다.
어쩐지 자신들과 비슷한 피부를 지닌 이들은 그 흰 피부의 무리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했다.
노란 피부의 사람들은 흰 피부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큰 배를 타고 있었으며 더욱 큰 소리가 나는 천둥 화염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옛 악연이 사라진 것은 다행인 일인데.
새로운 이방인들은 그들을 어찌 다룰 것인가.
불안 거리는 여전히 잔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고려인이라 불리는 이방인들은 흰 피부의 무리들보다 훨씬 온건했다.
마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밀이라고 하는 곡물의 종자를 무상으로 주었다.
이는 옥수수보다 대지의 지력을 덜 요구했으며 맛도 있었다.
물론 제분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지만, 이들은 제분기술 또한 전파해 주었지.
비단 제분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시비법과 땅을 파는 요령, 수확을 하는 요령까지.
그들은 돼지와 닭이라는 가축도 주었다.
이 가축들은 부드럽고 연했으며, 불에 구워 먹으면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아도 환상적인 맛을 자랑했다.
이들은 그밖에도 보리와 땅콩, 기장과 조, 수수 등의 종자들과 여러 가지 지혜들을 나누어 주었다.
“위대하신 정령의 가호로구나!”
부족민들은 사태를 숨죽여 지켜보다 이윽고 기뻐서 춤을 추었다.
왜?
아무도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저들은 친절하다.
저들은 악의가 없다.
저들은 미소를 띠며 먹을 것을 건넨다.
저들은 우리 부족끼리의 갈등까지 중재해준다.
족장들과 원로들은 단순히 기뻐했다.
원주민에게 가장 큰 공포란 예측할 수 없는 기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잉여생산물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너른 들판, 곡물들이 황금빛으로 춤을 추면 이것을 수확하여 곡창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 건축물들을 만드는 기법까지 전수한 고려인들 덕에, 그들은 견고하며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건축물까지 지을 수 있었다.
바야흐로 재해가 닥쳐와도 이제 부족민들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약탈의 공포가 마음 한켠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가지지 못했던 풍요로움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순간, 그들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마치 가랑비에 옷깃이 젖어나가듯.
이 풍요로움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면?
족장은 밤새도록 근심했다.
* * *
비단 공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까지 저 고려인들의 ‘친절’이 발동했다.
―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상자는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무엇이오?”
무스코기의 족장, 높이 나는 새가 자신의 앞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무스코기의 정당한 지배자이신 공(公)께 우호의 의미로 건네는 물건들입니다.”
“…….”
족장은 그들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삶을 아름답게 여기며 이어가고 있었다.
족장은 지배자가 아닌 중재자이며, 누구의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사적 재산의 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결국 한 줌 흙으로 변해 어머니 대지와 위대한 정령께 돌아갈 운명이니까.
그러나 높이 나는 새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언제 고려인들의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본 적이 있던가?
족장은 손수 고려의 선물함을 열어보았다.
가장 반짝이는 손거울.
가장 날카롭고 번쩍이는 칼.
가장 정밀하게 제작된 시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진 안경.
“굉장하군….”
높이 나는 새는 감탄성을 흘렸다.
저번 고려인들이 건넨 선물은 썩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번쩍이는 금괴와 은괴, 그리고 보석들을 건넸지만, 족장은 그 금속 덩어리들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고려인들은 다시 그 상자들을 들고 가며 서로 쑥덕거렸지.
오늘 가져온 이것들은 달랐다.
실용성과 사치품의 경계에 있는 물건들은 실로 호화롭게 만들어져 있었다.
모든 물건이 ‘쓸모’가 있다.
모든 물건이 섬세하며, 아름답다.
앞서나가는 인류 문명이 제작한 기술의 정수.
뒤처진 인류 문명은 그저 그 정교함과 세밀함에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감탄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높이 나는 새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미 그는 고려가 선물한 알파카 모직물로 짠 화려하고 부드러운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뭐요?”
“항상 그러했듯, 이번에도 없습니다.”
똑똑한 사절은 몹시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자신들의 언어를 금방 배워낸 저자는 항상 예의가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랫사람이라는 것마냥.
원주민 족장은 그 예법에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저들이 읍을 할 때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고려인들이라는 사람들이 화염을 쏘고 굉음을 터트릴 정도로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약자에 대한 어떠한 자만심이나 깔보는듯한 눈초리가 있을 법도 한데도 이 사절들은 그러한 감정이 단 한 차례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인 사절로서도 그 행동이 너무나 당연했다.
사절 자신은 언어에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국 일개 관리일 뿐이다.
반면 이 정도로 큰 구성원을 거느리는 부족장이 고려에 순순히 귀화한다면 귀화인 지도층 우대정책에 따라 토호의 벼슬을 받고 현지 지도층이 될 것이고.
이 부족장의 후손, 혹은 그 후손이 나중에 장성하여 창양에 올라가 중서성 의원 등의 관직 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니.
고려 귀화인의 입신양명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니까.
따라서 아무리 지금 미개한 원주민이라 하나, 밉보여서 좋을 거 하나 없다는 말이지.
“…고맙소.”
계산된 선의.
그러나 적어도 사절에게 가식은 보여지지 않기에 족장은 그것을 순수한 선의라고 생각했다.
부족장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 앙주라 했소? 그곳의 대족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시구려.”
대족장, 족장 중의 족장.
그게 무슨 표현일까.
족장은 자신이 말한 단어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 * *
높이 나는 새는 자신이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부족원들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족장의 모습에 제각기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감탄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족장에게 조금 더 호의를 표했고.
어떤 이들은 질투했다.
족장은 이제 남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기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하루가 얼마나 정교하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기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노안조차 극복할 수 있는 기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러지지 않고 아주아주 날카로워 무엇이라도 잘라버릴 만한 칼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기물들은 다른 부족민들과 그를 구별하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연스러운 권위를 주었다.
부족원들은 족장에게 하루의 정확한 시간을 물어보기도 했으며 칼과 거울을 빌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처음 족장은 이것을 부족원과 기꺼이 나누었다.
모두가 함께 쓰는 화합의 불 앞에서 마주 앉아 모두가 함께 쓰는 담뱃대를 나누어 피는 자리에서도.
그러나 족장은 스멀스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저 번뜩이는 칼을 더러운 동물의 사체를 손질하는 것에 쓴다고?’
‘크흠….’
족장은 뒷짐을 지며, 부족원이 날카롭고 번쩍이는 칼로 들소(버펄로)를 손질하는 것을 불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족원 하나가 들고 있던 족장의 거울을 떨어뜨렸다.
― 챙그랑.
아름다웠던 거울은 산산이 조각났다.
족장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로 조각났다.
그의 아내가 얼마나 저 거울을 아꼈는데.
“이 고얀 놈!”
족장은 처음으로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그 부족원을 몹시 심하게 때리도록 했다.
마치 사람을 제멋대로 해한 것에 대한 처벌마냥.
달랑 기물 하나가 깨진 것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나 처벌을 내린 족장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속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원로 한 명이 그의 처소로 들어와 말했다.
“왜 그리하셨소?”
“저놈이 나의 것을 빌린 주제에, 그것을 함부로 여기다 땅에 떨어뜨려 망가뜨리지 않았소?”
그대도 그 광경을 같이 봤는데, 어찌 내 맘을 몰라주는 거요.
족장의 말에 원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존재는 위대한 정령과 어머니 대지에게 귀속되는 것인데. 족장, 그대만의 것이 대체 어디에 있다고 그리 화를 내시오?”
“…….”
족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 * *
고려인 사절이 다시금 왔다.
족장은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미안하지만….”
“아, 거울 말이군요?”
상황 설명을 들은 사절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물론 드리지요.”
“…이번에도 고맙소.”
거울이 있으면 여인네들이 화를 낼 때 요긴하게 달랠 수 있다.
부족 전체가 모이는 회합 때, 반짝거리는 빛으로 주위의 시선을 환기할 수 있다.
그때는 마치 위대하고 위대한 태양의 빛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듯한 기분도 들었다.
“다만….”
“다만?”
사절은 약간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 말이 폐가 되진 않을지 우려스러워서 말이지요….”
족장은 애가 탔다.
“말을 하시오, 고려가 우리에게 준 것이 그리 많은데. 우리 또한 마땅한 보답을 할 수 있으니까.”
호의가 잔뜩 섞인 대답이 들려오자, 사절은 슬며시 운을 띄웠다.
“이번에 서쪽 부족들이 준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촉토와 치카소를 말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그 너머의 서쪽…….”
“아, 평원 놈들을 말하는 것이로군.”
동쪽 부족들과 평원 부족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키와족은 그들의 주 식량인 들소 떼가 부족하다 싶으면 보다 풍요로운 동쪽을 약탈했다.
심지어 미시시피강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카누를 타고 꾸역꾸역 건너와 약탈을 하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
대부분 촉토 부족과 치카소 부족이 피해를 입었지만 무스코기 부족 또한 여러 번 당한 기억이 있었다.
“그 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동맹에 대한 선의로, 젊은 청년들 몇 명을 지원해준다면 우리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으음….”
족장은 말을 흐렸다.
부족원들을 그렇게 부리는 것은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일인데.
사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 모두를 책임지겠습니다. 당연히 안전 또한 보장하지요.”
“그렇다면….”
쌓여진 신뢰는 이때에도 발휘되었다.
게다가 슬며시 드는 생각도 있었다.
부족장은 이 기회에 마음에 들지 않는 어린놈들을 보내버려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놈들.
자꾸만 자신의 물건에 호기심을 가장한 탐욕을 보이는 놈들.
“그리하리다.”
* * *
이후에도 부족장들은 서서히 권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기물들을 보관해 놓는 창고와 식량이 가득 들어찬 곡창을 가지게 된 족장들은 부족원들 중에서도 말을 잘 듣는 이들을 뽑아 이것들을 지키게 하는 등 자신의 측근 패거리들을 부족 내에서도 만들어나갔다.
완장이 채워진 이 측근들은 족장에 의해서 대우를 받으며 족장이 쌓아 올리고 있는 권위의 일부를 누렸다.
계급은 분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족장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고려에서 기원하는 것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더욱 고려와 친밀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사절을 더욱 예의 바르게 대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몇 가지 환대의 말과 단어를 익히기도 했다.
상민은 동래미에 앉아 이 같은 현상들을 관찰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미 장작을 한창 집어넣고 불을 때고 있으니, 펄펄 끓게 만든 이후 밥솥의 김이 빠지기를 기다리면 맛있는 밥이 나올 것이다.
― 매력에 의한 지배.
연성권력은 때로는 경성권력보다 강하다.
또한 후유증이 적었다.
탐욕스러운 개척자들과 한 치 앞도 못 보는 선교사들을 이용했던 유럽인들은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온갖 병폐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민이 있는 정북행성이라는 거대한 컨트롤타워에서 지시하는 주도면밀한 이 작업은 몹시 꼼꼼했으며 사악할 정도로 자비로웠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들을 착취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과 잠재적인 국가의 백성으로 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잠재적 백성에게 투자하는 비용은 아깝지 않지.
상민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실제로도 값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섬세하고 사치스러운 기물들이 필요했으나 오히려 처음 제시했던 금은보화보다는 저렴했다.
스스로가 그 공급책이라는 것도 한 몫 거들었다.
‘부족장에게 주려던 금은 중 일부는 수고했던 장인들에게 인센티브로 나누어 주자.’
그리고 상민은 밥을 뜸 들일 동안, 족장들로부터 보내어진 어딘가 반항적인 면이 한가득 있는 부족 청년들을 동래미에 집합시켜 이들로 자제감(子弟監)을 꾸려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
이들은 이곳에서 지식을 공부하고 세상에 대해 배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창양으로 내려가 더욱 깊은 학문을 배울 수 있겠지.
평원 부족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핑계에 불과했다.
고려의 역량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니까.
청년들은 특수하게 제작된 ‘시설’에 갇혔다.
안락은 하지만, 어딘가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다.
21세기 어떤 나라 사람들이 본다면 중세의 입시학원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나가게 해줘!”
거의 감옥과도 같은 악랄한 구조물에서 생활하는 기숙 생활.
고려글과 고려어, 그리고 젓가락질 등을 강제로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된 청년들은 몸을 뒤틀며 반항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친절한 장다름들이 청년들의 반항을 가볍게 짓밟아주었다.
자유로운 넓은 땅의 자연을 만끽하며 살아왔던 청년들은 한순간 닭장에 가둬진 닭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족들에게선 소식이 잘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여기에 그들을 던져두고 뭘 어쩌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인간은 결국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 원주민 청년들도 어느 순간부터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오전에는 공부를 한다.
오후에는 모여서 운동(주로 단합력을 요구하는)을 하거나 성공회 신부들이나 승려들에게 종교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다시 지긋지긋한 공부.
역사(고려사와 세계사 모두), 국어, 생물학, 의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과 기타 여러 가지 학문들.
물론 고려 본토에 있는 학생들처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을 공부하진 않았다.
부족 청년들의 출신을 고려해서 아주 표면적이고 상식적인 것들만 집어넣은 교양서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처음에는 낯선 글자 하나 제대로 배우기 어려워하던 청년들은 이윽고 더듬거리며 서적들을 읽어나갈 수는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갈 길이 멀어 아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여전한데.
이 같은 시점에서, 고려인들은 또다시 당근을 건넸다.
“너희들이 시험이라는 것을 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일찍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겠다!”
청년들은 대체 왜 고려인들이 이렇게 괴상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물음의 답을 구하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사는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맛이 있었다는 것.
시간이 지나고, 젊음이라는 사고의 유연함 덕분인지 서서히 문명의 이기들을 받아들인 전사들은 어느덧 옷을 입고, 침대에서 자는 것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마침내 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애증이 교차한 표정을 지으며 고향으로 가길 택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몇 명은 조금 더 세상을 견학하고자 정북행성에 부탁하여 창양으로 향하길 청하기도 했다.
상민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북려 원주민의 개화파가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