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려의 운명(2)
― 와아아!
반아즈텍 부족연합군의 거대한 인파가 테노치티틀란으로 몰려왔다.
텍스코코 호수 가장자리에 도착한 수많은 민족들은 모두 노기등등하게 함성을 지르며 검과 창을 흔들어 대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족들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을 처참하게 착취했던 아즈텍이라는 원수에 맞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호수 가운데 지어진 도시, 테노치티틀란은 마치 거대한 대양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았다.
인해전술은 아즈텍의 특기였건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러한 면모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실 중려대륙의 인구수 대부분은 지금의 아즈텍을 구성하는 세 부족, 아즈테카와 틀라코판, 텍스코코들의 인구가 아닌, 이들이 점령한 피정복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대역병 이후에는 아즈텍 자체의 인구수가 성장하고 나머지 민족들의 인구수가 급감했지만,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피정복민들이었다.
그동안 인간목장에서 가축과도 같게 끔찍한 취급을 당했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수가 많았다.
후악사카 요새에서 다시 수도로 돌아온 틀라카엘렐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봉헌된 대신전에서 그 광경을 둘러보았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제 발로 사지에 들어오는군.”
모든 것을 잃기 직전이라 하더라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있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수도 테노치티틀란.
비록 냉해와 기근은 아직까지도 계속되었고 모기 또한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으나 이 도시는 아직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이 땅의 보석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요새이기도 하지.
틀라카엘렐은 거대한 호수라는 천연 해자를 끼고 있는 도시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계획은 대부분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이곳으로 저들을 유인한 것이기도 했다.
“아즈텍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흥.
아주 먼 거리에서 울부짖는 듯한 나와틀어가 들려왔지만, 틀라카엘렐은 콧방귀를 뀌었다.
과연 죽는 것이 우리일까 네놈들일까.
너희들은 오로지 위대한 신들의 제물이자, 우리의 식량에 불과한 가축들이다.
감히 주인에게 반기를 들이밀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틀라카엘렐은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육체적 능력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가 오기 전부터 지긋지긋한 누벨 오를레앙 덕분에 방어용 성곽에 대한 개념을 알아간 아즈텍인들은 도시를 둘러싸는 호수에다가 강력한 방어시설을 건설해 놓았다.
일정 이상의 높이를 가진 성벽과 도개교, 그리고 각종 장애물들이 보강되었다.
안 그래도 공략하기 까다로운 지형인 호수에 건설된 도시가 더욱 난공불락으로 변모해 버린 것.
― 으아악!
우르르 몰려간 한 무리의 반아즈텍 부족민들이 장애물을 피해 들이닥쳤으나 내질러지는 창과 쏘아지는 투사체에 의해 봉변을 당했다.
뒤의 인원들은 비슷한 광경을 계속 봤지만 이를 악물고 앞의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는 호수 한가운데에 지어져 있어 오직 몇 개의 다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제대로 된 공략 방법도 없이 반아즈텍 부족연합군이 이 치밀하게 설계된 도시를 단숨에 떨어뜨릴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반아즈텍 부족연합은 머리를 굴렸다.
“카누를 만들어 공격하자!”
그들은 공세를 중지하고 사방의 나무들을 베어내었다.
3일 후, 거칠고 엉성하게 다듬었지만 어쨌든 물에 뜨긴 뜨는 카누들이 호수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수많은 부족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한 듯 자신들의 카누들을 물에 올려놓자 호수 위가 그 카누들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과장이 아니라, 거의 물 반 카누 반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수많은 카누들은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
드디어 반아즈텍 부족연합의 장점인 절대적 병력의 우위가 어제보다는 제대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준비성과 용맹함 또한 아즈텍인들이 압도적이었다.
물가의 상륙 또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터라, 틀라카엘렐은 호수에서의 상륙을 막기 위해 선착장들을 막고 주위에 2미터가 넘는 방벽을 쌓아놨다.
그리고 그곳에 화살들은 물론 돌과 끓는 물을 배치했다.
카누를 만들었다 하나 여전히 별다른 공성장비가 없는 반아즈텍 부족연합의 전사들은 몸으로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계속된 피해 누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즈텍 전사들은 명예로운 전투에서의 죽음 이후 찾아올 낙원에 대한 환희에 심지어 전투 중에도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그동안 힘든 인간목장 생활을 하며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 왔던 퓨레페차인들을 위시한 부족들은 고려의 무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현격한 기량의 차이를 쉽사리 메우지 못했다.
아니.
기량의 차이라기보다는 연령의 차이가 아닐까.
쓸만한 남성 노예들은 틀라메메가 부리는 짐꾼으로 쓰이다 죽어갔고, 혹은 이동식 식량으로 비참하게 소모되었다.
인간목장에 남은 인간들은 여인들이나 어린 소년들.
지금 이들은 말이 전사였지, 사실상 대부분은 어린 소년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치기 어린 소년들은 틀라카엘렐이 부리는 노련한 아즈텍 전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리들은 전혀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호수의 방벽들 또한 마찬가지.
카누에서 쓰러진 소년들의 피로 맑은 호수가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은 순식간에 변색되고 부풀어 올라 심한 악취를 풍겼다.
이름 모를 날짐승들이 그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젊음은 또한 감정에 급변한다.
그 광경을 보던 소년들은 처음 가졌던 분노의 감정 대신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을 느꼈다.
여유가 생긴 틀라카엘렐은 심지어 다리 바깥으로 나와 역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딱히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상징성 있었다.
공성 자체가 얼마나 형편없이 돌아가고 있는지는 공성군 모두가 알아차렸으니까.
반아즈텍 부족연합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식량 문제도 중대했다.
애초에 급조한 부족군들이 제대로 된 보급체계와 비축된 식량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기껏 아즈텍의 군량고를 턴 것이 고작.
다른 것들은 죄다 틀라카엘렐이 진작에 빼내어 수도에 쌓아두고 있었기에 그 절대적 수량이 적었다.
몇몇 부족이 말했다.
“잡은 포로와 적당한 시신을 뜯어 먹으면 되지 않겠소?”
식인풍습은 아즈텍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들은 잡은 아즈텍 포로들로 주린 배를 채우자고 제안했다.
필요하다면 불운하게 죽은 동료 전사들도.
무기를 지원해주고 돌아가는 상황을 뒤에서 관찰하고 있던 고려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들은 순전히 패배한 아즈텍인들에 불과하구나!”
소수 병력들만을 이끌고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던 김종서는 반아즈텍 부족연합들의 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선포했다.
“어떠한 부족이건 간에 식인을 저지르는 순간, 고려는 지원을 끊는 것은 물론 그 부족 또한 정벌할 것이다.”
김종서의 노기등등한 엄포에 부족들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제각기 어마 뜨거라 하며 포로들에게서 손을 떼었다.
해방된 부족원들은 중려의 토착민답게 인신공양과 식인풍습에 익숙한 자들이었지만 그동안 고통을 당하던 세월에서 풀려나게 해준 은원은 아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군인들이 상륙하여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불을 뿜는 광경은 아직까지도 실로 모골이 송연한 광경이었으니까.
김종서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고는 정북행성으로 그동안 기록한 중려의 상황을 담은 장문의 장계를 정북행성으로 올렸다.
그리고 김종서 덕분에 공성과 식량 모두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한 반아즈텍 부족연합군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 * *
날먹을 바라면 안 되는 걸까.
“기대 이상이지만, 결국 실패했군.”
상민은 김종서의 서신을 받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그마한 균열 하나로 댐이 무너지는 것은 수없이 봐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란 기대감을 품었는데.
그 균열은 오히려 반아즈텍 부족연합에게 생겨난 모양.
김종서의 재량에 맡겨두긴 했지만 상민은 공성군이 곤경에 처할 때 고려군이 지원을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그들 모두에게 학을 떼며 개입을 아예 하지 않은 모양.
패배한(언럭키) 아즈텍이라니.
김종서의 표현은 사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직접 마야문명을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 중려 대륙의 민족들이 유난히 피에 굶주려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흐음. 오히려 좋아.’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신대륙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려대륙의 민족들은 어느 정도 힘을 빼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비단 아즈텍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들도.
이들이 조금 더 온화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성은 없었겠지만.
그나저나,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으로 그들의 종교를 바꿔나가야겠는데.
이럴 때 요긴하게 써먹을 패가 있다.
쿠쿨칸 신앙은 다른 종교보다도 가장 효과적으로 저들의 우이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 케찰코아틀 신앙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상민은 마야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다른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인물은 인물이야.’
시대의 천재.
비록 그 방향은 몹시 안 좋은 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상민은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제국의 수도를 지켜낸 틀라카엘렐에게 한 번 더 감탄했다.
물러나는 반아즈텍 부족들을 상대로 역습까지도 했다 하던데.
아즈텍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잃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멕시카의 서부와 남부가 불안정해졌다는 것은 아즈텍에게 심각한 위험 사유가 되었겠지.
제국의 팽창 의욕은 남쪽과 북쪽으로 모두 좌초된 채 길을 잃었을 것이고.
몬테수마가 어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물 것이다.
고려와 평원 부족들에 의해 계속 변방을 공격당하고 있는 이상, 북부에서 병력을 빼는 것 자체는 생각하기 힘든 선택지였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하고 만다면 상민은 화주의 병력을 전부 빼 와서라도 곧바로 응징에 나설 것이며 저들이 건설해놓은 도시, 몬테수마우아칸을 낼름 꿀꺽하고 배를 두들기겠지.
상민은 서신을 봉인하고선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에 놓인 붉은 깃발이 꽂혀 있는 말을 움직였다.
화주에서 앙주로.
푸른 깃발이 꽂힌 말과 나란히 놓였다.
보병과 중기 그리고 경기가 합쳐진다면, 절대적 숫자의 불리함은 있겠지만 주력이 빠진 곳을 공격하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고려도 아즈텍과 평원 부족들 때문에 일단 서쪽을 단념하고 화주를 위시한 동쪽 위주로 뻗어 나가고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다.
동쪽이 정리되어야 서쪽으로 나아갈 텐데.
상민은 이 북려 원주민들을 더욱더 빨리 삼키길 원했다.
지금까지 남려의 원주민들에게 했던 것보다 빨리.
그러나 거대한 땅을 허겁지겁 삼켜야 하는 입장에선 현지 원주민들과의 협력과 공존, 그리고 동화절차는 필수적이지만 장애물이기도 했다.
분명 문명화된 여섯 부족들은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고려, 그리고 고려의 문화 공세에 고려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토와 인구에 대한 동화의 뉘앙스를 더욱 노골적으로 하는 순간 분명히 반발이 튀어나올 것이다.
따라서 항상 무력 진압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아직도 경계하는 부족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상민은 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가진 생각과 정치체제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마음에 들진 않았다.
개인으로서와 위정자로서의 판단이 각기 달랐다는 소리였다.
개인으로서 그는 이들의 가치관과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부족과 씨족의 구성원들이 제각기 무리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대지를 어머니라 칭하고, 오직 먹을 만큼의 식량을 바다나 강에서 채취하는 것.
가진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누려는 문화.
숲과 자연을 보호하는 것까지.
듣기에는 참 좋지 않은가.
그러나 통치자로서 이것은 모두 걸림돌 그 자체였다.
뭉뚱그려서 여섯 부족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이 여섯 부족들은 개별 부족들 또한 느슨한 씨족끼리의 연합에 불과했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부족들과 씨족들은 고려의 같은 접근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이들은 고려처럼 토지에 대한 사유의 개념이 없었다.
덕분에 고려가 주장하는 고려의 ‘영토’에 대한 것에 반감을 품었다.
이들은 또한 고려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국가처럼 확고한 위계질서에 의한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추장과 대전사 등의 높은 지위는 있었더라도, 대부분의 사항들은 원로들과 구성원들이 모여 합의를 거치는 민주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하나의 부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 전부의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정말정말 토가 나올 만큼 비효율적이었다.
중려와 북려는 달랐다.
중려는 이미 아즈텍과 마야를 위시한 정치제도에서 알 수 있듯 빠르게 중앙집권화가 되어가고 있는 문명들이었다.
태동산맥에 위치했던 타완틴수유와 그 전신국가들 또한 철저한 계급사회를 이루었으니.
민주주의?
조금 웃기긴 해.
후대에는 그럴듯하게 재포장되어 민주주의의 씨앗이니, 그런 식으로 평가되겠지만 현시대를 직접 살아가는 상민의 생각은 달랐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근대 이후가 아닌 신석기 끝자락과 청동기급의 문명에서의 민주주의는 그냥 부족 사회가 제대로 된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자연에서 먹을 만큼만 생산한다는 것은 결국 농경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겠고.
그 이유가 밀과 쌀과 같은 종자의 유무이건, 말과 같은 이동용 가축의 부재이건 간에.
상대적으로 평등한 계급은 이 시대엔 통치의 적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상민은 그 통치의 적을 이미 한 번 고꾸라뜨린 기억이 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남려 평야의 원주민들을 자신이 어떻게 동화시켰는지 떠올리자.
그들은 이들 같은 독특한 정령신앙을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문명 수준의 원주민들이었으니.
그 기억들을 더듬은 상민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등한 사회 구조가 통치의 적이라면, 평등하지 않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때 당시에는 그런 명확한 목적은 없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었지.
골품제와 카스트 같은 후유증이 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습화된 계급사회, 즉 왕조를 가질 수 있게끔만 할 수 있다면.
‘왕조를 위해서는….’
식료품? 농기구?
아니다. 오히려 고려는 저들에게 다른 종류의 물건들을 주어야 했다.
백인들은 이 땅에 대부분 금과 은을 착취하기 위해 왔다지만.
상민은 피식 웃었다.
자신은 반대로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