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려의 운명
상민의 서신을 품에 넣은 전령은 협저선을 타고 앙주를 떠났다.
마야만을 건너면 코앞에 마야반도가 나온다.
그 끝에 자리한 니주크(Nizuc, 칸쿤)라는 도시는 새롭게 부흥하고 있는 마야의 도시였는데, 기존의 최대 항구도시 툴룸보다도 더욱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앙주와 화주, 기주를 잇는 거대한 마름모꼴의 요충지로 꼽혔다.
전령은 이곳에서 보급을 하고는 다시 칼리나 서쪽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거대한 대양이 상대적으로 아주 얇디얇은 땅으로 갈라져 있는 곳이 나온다.
파주, 혹은 파남.
대동양을 바라보는 도시, 북파남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그의 여정이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배에 올라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지루한 일정이었다면 이제부턴….
장성도로의 입구에서 전령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하하, 괜찮소. 표범도 인간이 자주 왕래하는 이 장성도로에는 잘 얼씬하지 않으니까.”
“…진짜요?”
“물론, 가끔 보이긴 하지. 그 민첩함이 어찌나 대단한지, 낮은 장성도로를 훌쩍 뛰어올라 동서(장성도로는 파남의 지형으로 인해 남북으로 지어져 있다.)로 오간다오.”
길잡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쓸모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나, 점점 더 안색이 새파래지는 전령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자, 총기를 챙깁시다.”
그들은 수석식 소총을 뒤에 둘러매고 허리 옆에는 화약낭을 찼다.
우천을 대비해 화약을 기름종이에 싸 두었지만, 혹여나 쓰지 못할 것을 대비해 작살과 석궁을 챙기기도 했다.
무기를 품에 넣으니 절로 든든했다.
고려인들은 여전히 표범과 재규어를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후대의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고려 표범은 남려를 비롯해 중려까지 포함한 거대한 전역의 가장 큰 위험 동물임이 분명했기에 전령은 벌벌 떨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주 먼 옛날, 건국 시기에 살았던 선조들은 글에다 ‘표범은 호랑이만 못하다.’라고 서술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조들의 이야기였다.
분명히 허풍이 잔뜩 들어있겠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지체하면 할수록 안 만날 위험도 만나게 된다는 것이오.”
안내꾼과 전령은 말을 타고 장성도로에 올라탔다.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이곳은 마차의 무게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열대성 폭우를 방지하려는 목적의 배수로도 세심하게 고려한 흔적이 보였다.
물론 방어의 기능은 거의 없다.
정말 표범이 도로를 펄쩍펄쩍 뛰어넘는다는 말이 절로 이해되는 높이.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원주민들은 그 긴 세월 동안 이미 동화되었거나 토벌당했단다.
‘사람도 토벌 가능하다면, 왜 저 짐승들은 토벌하지 못하는가?’
전령은 투덜대면서도 계속 말을 몰아 남쪽으로 달려나갔다.
북파남보다도 더 큰 도시, 남파남에 도착한 전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표환(豹患)도 당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배를 탄 그는 마침내 미주로 향하는 여정에 돌입할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멀군.’
남려에 위치한 고려가 어찌 이토록 먼 거리에 떨어진 많은 개척지들을 꾸역꾸역 유지하고 있는지 전령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능력이 있으시다는 거지.’
마침내 미원(美原)에 도착한 전령은 시중의 편지를 무사히 미주의 주지사에게 전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맥이 탁 놓이는 것을 느끼며 한동안 가벼운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 * *
“흐음….”
미주 주지사 김종서는 예순이 넘는 고령의 관리였다.
만종 교국 건국 당시 경차관의 임무를 잘 수행한 종서는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부임하고 싶다는 그의 강력한 소망대로 미주의 주지사로 발령받았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문관답지 않게 단련된 몸으로 해변을 뛰며 저 먼 거리에 있는 조국을 그리워했다.
아직도 범 같은 몸과는 달리 그의 눈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서신은 세필로 쓰였기에 그는 매끈한 유리 안경을 코 위에 올려놓고서야 제대로 서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참을 읽어내린 그는 수염을 매만졌다.
“이 늙은이에게 큰 임무를 주셨구만.”
“무슨 내용입니까?”
미주방위군 사령관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김종서는 대답보다도 오히려 사령관에게 물었다.
“장군, 현재 가용한 병력이 얼마나 되오?”
군부과 민정은 서로 독립되었으나, 그래도 주지사는 사령관보다 높았다.
게다가 김종서는 나이도 많았고 정북행성의 명령을 받기까지 했으니 사령관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무리를 한다면 천 명 정도를 차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예상보다는 적었지만, 김종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천 명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미주는 남과 북으로 요쿠트와 포모족과 불안한 공존을 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파남 다음으로 개척을 시작한 유구한 역사가 있는 땅이었기에 미주는 고려의 개척지들 중에서도 상당한 수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단 땅은 적당하게 기름지고 날씨도 맑고 온화하다.
사람 사는 환경 자체가 좋다는 말.
덕분에 인구도 쭉쭉 늘어, 유럽인들이 주류인 앙주와 화주보다도 고려계 주민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미주는 어느 순간부터 자체적으로 곡물과 가축을 안정적으로 길러낼 수 있었다.
이제는 무기와 기타 다른 필수품들도 생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선박조차 건조해 낼 수 있었다.
본국에서의 지원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되며 행동할 수 있는 여력이 많아진 셈.
‘개척지의 독립 가능성’을 따지고 본다면 가장 수위에 있는 곳이 바로 이 미주라는 곳일 것이다.
조정에선 그런 움직임을 몹시 경계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지.
다행히도 미군왕(美郡王)이 부임한 이후에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는 크게 가라앉았다.
미군왕이 된 길천공 본인의 사람 됨됨이도 좋았고 황실의 혈통이 가지는 무게감은 아직 무거웠으니.
“설마 시중께서 우리의 병력으로 아즈텍을 공격하라 하셨습니까?”
사령관이 김종서의 얼굴을 보다 불현듯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되물었다.
김종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긴 하구려.”
“말도 안 됩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그 많은 숫자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사정도 급한데….”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아즈텍의 위협은 그들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남쪽 원주민 피마인들이 준동하고 있는 이유가 아즈텍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막기후가 장벽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순 없지.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는 불안이 감돌았다.
미주가 아무리 성장세가 빠르다 하나, 지금 원정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그 성장세가 고꾸라지고, 희생을 치른다면 주민들의 민심이 흉흉해질 수 있었다.
중앙의 관리라도 지역 주민들의 동향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자명했기에.
“괜찮소.”
김종서는 서신과 서신에 동봉된 지도를 내밀었다.
“우리가 할 일은 적군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장에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풀어놓는 정도이니.”
* * *
아즈텍은 적이 많았다.
외부의 적, 고려와 마야, 그리고 북려 원주민 부족들을 제외하고도 내부의 적들도 많았다.
인간목장은 그들의 항구적인 식량 생산 및 노동력을 보장해 주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불이 붙을 수 있는 화약통과도 같았다.
아즈텍 역시 이를 알았기에 그 목장들에 제각기 틀라카텍카틀들을 배치해 혹여 반란을 꿈꾸는 자들을 감시하게 했다.
아즈텍의 철천지원수인 틀락스칼라.
그리고 남부의 지배자였던 투투테펙과 그 옆에 위치한 요피진코.
그리고 북서부에 위치한 칼리스코까지.
이들은 대역병에서 아즈텍만큼 빨리 회복되지 못했으며, 아즈텍만큼 빠르게 철기를 수용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정복당하고 인간목장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아즈텍을 ‘진정으로’ 위협할 만한 세력은 많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멕시카의 땅에선 오직 하나를 꼽을 수 있을 정도.
퓨레페차(P'urhepecha, 타라스칸) 제국.
이들은 정말 끝까지 아즈텍에 저항했다.
퓨레페차인들은 야금술과 기술력으로는 아즈텍과 버금갈 정도였지만, 아즈텍의 인해전술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리고는 참혹한 운명을 맞았다.
아즈텍보다도 더욱더 중앙집권적 성격을 띠고 있던 이 제국의 지도층들은 대부분 사로잡혀 테노치티틀란의 신전에서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쳐졌다.
지도층이 완전히 와해되고 남은 인간들은 분산되어 츠추찬과 칼리스코, 콜리만의 목장에 수용되었다.
이후 가혹한 통치에 의해 퓨레페차인들은 순식간에 죽어 나갔고, 한때 이 땅에서 두 번째로 강성함을 자랑했던 제국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라고 했지.’
마야의 역사가를 통해 중려의 이야기를 들은 상민은 머리를 굴렸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지.
상민은 지공을 계속 유도하며 그들의 전력을 갉아먹고, 마침내 큰 군세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아즈텍을 편안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이이제이란 실로 아름다운 외교적 해법이다.
그래서 그의 명령대로 미주에서 연대 하나가 편성되어 아즈텍의 서쪽 해안가로 향했다.
― 타타탕
근위군까진 아니더라도, 이들 또한 숙련된 병사들.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잔뜩 긴장하며 상륙한 미주군들은 일제사격 한 번에 진열이 박살 나고 이리저리 도망가는 아즈텍인들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렇게 쉬워?”
그들 스스로가 놀랄 만큼 미주군은 그들의 체급보다 세 배가 넘는 칼리스코 아즈텍 주둔군을 손쉽게 요리했다.
용맹한 자들은 죄다 몬테수마가 이끌고 떠나갔고, 이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전사로서 폐급이라 칭할 자들뿐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장군인 틀라카텍카틀 또한 능력이 형편없었다.
틀라카텍카틀의 목을 들고 다니며 인간목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고려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나의 선물을 남긴 채.
인간목장의 노예들은 머뭇거리다가, 그 선물의 포장을 뜯고는 이윽고 환호성을 질렀다.
번쩍거리는 철제 병기가 기름칠이 잘 발린 채 잔뜩 보관되어 있었다.
그들 스스로 아즈텍의 철기에 탄압을 받아왔던 만큼, 이 질 좋은 무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있던 퓨레페차인들과 칼리스코인들이 이윽고 하나둘씩 그것을 집고 휘둘러보았다.
* * *
고려는 ‘무기대여법’을 실시했다.
― 어차피 야금술 없는 냉병기는 소모품에 불과하니 아즈텍에 대항할 사람들에게 냉병기 몇 개 쥐여주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인력은 비싸고 자원은 값싸다.
이것은 미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본토에 비해서는 질이 아무래도 떨어졌지만 그래도 아즈텍의 철기에 비해서 실로 번쩍번쩍한 미주산 특제 칼들을 쥔 퓨레페차인들이 이를 갈며 봉기를 일으켰다.
테노치티틀란의 통치가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비단 퓨레페차인들뿐만 아니라, 그 옆 중소 부족들도 거의 전부 들고일어났다.
아즈텍 서부는 실로 불길에 휩싸였다.
그 광경을 보고받은 틀라카엘렐은 후악사카 요새에 있는 군사들을 이끌고 진압을 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불길은 이미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고려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북부 아즈텍의 성장세가 괴상할 정도로 빨랐다는 것은, 역으로 남부 아즈텍의 공동화 현상과도 직결된 문제였겠지.
남부 아즈텍은 테노치티틀란을 제외하고는 이미 서서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곳저곳에서 부대를 융통해 북부로 지원을 해 준 결과, 지방의 틀라카텍카틀들도 죄다 적절한 대응을 하지도 못하고 패배한 모양.
고려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 틀락스칼라나 요피진코, 투투테펙에서도 응축된 분노가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거대한 양 떼들의 반란에, 자신을 포식자라 지칭했던 민족은 그들의 성지이자, 최고로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도시인 테노치티틀란 안에 포위되듯 둘러싸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