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된 여섯 부족
시간이 흘렀다.
평원 부족 동맹과 고려는 한동안 마주치지 않았다.
웅크린 늑대가 소년이었던 때는 사실 고려가 아닌 누벨 오를레앙 시절이었으니.
어찌 보면 상민이 그렇게 중요시하는 첫 번째 단추가 끼워지지 않은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고 공교롭게도 그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운 이가 생겨났다.
그 사람은 고려인이 아니었다.
누벨 오를레앙에서 탈출한 질은 정처 없이 길을 떠돌았다.
일단 열린 방향을 따라 서쪽으로 오긴 했는데, 계속 나아간다면 식인종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분노와 절망으로 머리가 돌아버렸다 하더라도, 스스로 뜯어먹히려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질은 한참을 고민하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잔이 누벨 오를레앙에 도착하기 전, 장은 그들이 살던 터전을 떠나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자신이 떠난 후 장 역시 그곳을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장의 이동 경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동료들만이 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기필코 복수해주지.’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는 모른 채, 질은 마음속의 칼날을 갈며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질은 한 무리의 말을 탄 야만인들과 마주쳤다.
평원 부족 동맹은 한눈에 봐도 살기를 줄줄 흘리고 있는 자를 경계했고, 질 또한 야만인들을 경계하고 있었으니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뛰어난 기사였던 질은 잘 벼린 롱소드를 빼 들었다.
그는 조잡한 무구를 들고 등자조차 사용하지 않는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 죽이는 것에 성공했지만 결국 상처를 입었다.
그의 상태가 온전했으면 이런 상처도 입지 않았겠지.
그러나 이 여정을 시작한 뒤로 충분한 영양보충을 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온몸에 기운이 없었던 것이 컸다.
“젠장!”
처음, 상처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염된 부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멀리 가지 못하고 평원 부족 동맹의 추격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네가 우리 전사들을 모두 도륙한 놈이냐?”
그를 붙잡은 웅크린 늑대는 분노하며 말했지만, 눈에는 그의 모습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 * *
상민은 장에 대한 추격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중기병대, 고려 장다름의 기틀을 손에 쥐게 되었는데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할 리가 있는가.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기사들의 요구조건을 눈앞에서 무시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몰래 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저들을 추격해 주살하기 위해선 적어도 과트라체 경기병대 중 이삼백 이상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 정도의 병력을 주둔지에서 빼내는 것은 눈먼 장님이라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이건… 다른 이에게 맡기자.’
상민은 화주에 장의 이동에 관한 장문의 서신을 썼다.
그러나 질은 달랐다.
고려에 귀부한 자들은 질이 어련히 장과 같이 북쪽으로 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반대로 북쪽으로 향한 자들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질이 잔 때문에 고려에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 인간은 두 무리의 동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 얼간이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딸까지도 버려두고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믿기 힘들 테니까.
상민은 이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추격대를 보내기로 했다.
그의 연인을 바라보는 얼굴이 실로 불손했고 끔찍했었으니.
화근은 여럿 남겨두면 안 되었다.
“반항이 격렬하면 사살하고 그 수급을 베어오거라.”
“예, 당하.”
과트라체 기병대 열 명.
아즈텍에 대한 정찰의 목적을 빌미로 편성했기에 고려의 추격대는 숫자가 크지 않았다.
더 크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었다.
과트라체들은 말을 잘 다루는 만큼이나 도망간 말을 찾는 것에 이골이 난 인간들이었기에 다소 시간이 흐른 흔적들도 찾아내어 질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곳이군.”
“그래, 잔디가 밟혀있다.”
질의 흔적을 뒤따라 가던 이들은 마침내 평원에서 세 부족 동맹과 마주쳤다.
남려의 원주민 출신 고려인과, 북려의 원주민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
과트라체 추적조는 일단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섣불리 공격하진 않았다.
‘처음 만나는 부족에게는 일단 우호적으로 접근하라 하셨지.’
마푸체의 자손, 과트라체들도 어찌 보면 고려 건국기에 가장 먼저 귀부한 민족들 중 하나였기에 추격조의 대장은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며 대화를 시도했다.
언어는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알아듣는 손짓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 평원 부족 동맹은 고려를 선제공격했다.
“이런!”
과트라체들은 장전된 총을 뽑아 대응하려 했으나 적의 수가 원체 많았다.
경갑은 근거리에서 쏘는 화살에 꿰뚫렸다.
세 명이 몸에 화살을 맞고 낙마했으며, 일곱 명은 그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과트라체 기병대의 모습을 본 질이 숨죽여 웃었다.
웅크린 늑대는 질의 옆에서 분노에 얼굴을 씰룩이고 있었다.
“저들 또한 우리의 땅을 넘보려는 자들이다!”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쉽다.
거짓에 적절한 사실을 섞으면 몹시 설득력 있는 내용이 탄생한다.
웅크린 늑대는 젊은 나이에도 지혜롭기 그지없어 질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챘지만 반대로 질이 말하는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성스러운 이 평원과 이 땅에 깃든 정령의 이름으로 탐욕스러운 놈들을 징벌하라!”
질은 뜻을 이해하진 못해도 전투의 함성과도 같은 고함에 박수라도 치고 싶었으나, 온몸에서는 파상풍으로 인해 근육이 경련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신체의 고통보다도 마음의 고통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 탐욕스러운 놈들.’
이 땅에 돌쪼가리들을 집어넣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놈들.
이들은 그들, 프랑스인들이 가꾸어 놓은 성과 농장을 빼앗았다.
그들의 백성을 빼앗고, 신념을 빼앗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여자를 빼앗았다.
‘그것이 너희, 고려 놈들의 본성이다.’
문명의 전파니, 뭐니 하는 대의들.
그런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넓은 땅뿐.
그곳에 먼저 살아가던 자들은 솔직한 말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역겨운 위선자들.
비록 질은 이 부족의 언어를 몰랐지만, 부족 내에 고려에 대한 혐오감을 이식하는 것엔 성공했다.
할 일은 다 끝났다.
웅크린 늑대는 부족의 포로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과는 다르게 몸의 상처는 더욱 곪아 피와 고름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다.
저자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거억, 크흑!”
질은 그 후로 오직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만 생존했다.
그는 그동안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죽는 광경도 끔찍했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하고 제멋대로 수축해 마치 활처럼 뒤로 둥글게 휜 후궁반장(opisthotonus)의 자세로 죽은 것.
그러나 이는 앞으로 고려와 평원 부족들이 겪게 될 기나긴 악연보다는 차라리 짧았다 할 것이다.
* * *
추적을 보냈던 과트라체가 피해를 입고 돌아오자, 상민은 의아한 와중에도 재빨리 정책을 변경했다.
― 추후에 만나는 평야 원주민들은 적대하라.
한 번 먼저 선빵을 맞은 뒤에 다시금 화친을 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저들은 왜인지 몰라도 고려에 대한 근원적인 적개심을 가진 모양이다.
‘안타깝군.’
이 평원의 부족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상민은 이들이 아즈텍에 대한 훌륭한 견제책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생각은 초장부터 박살이 난 모양.
모든 것은 첫 단추가 중요하다.
상민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과거의 사례를 들어보자.
강족 소년을 구해준 인연의 대가로, 상민은 창양에서 순식간에 세력을 불렸지.
야족과 남만의 경우는 첫 만남이 잘못되어 계속 적대 세력으로 남았고, 결국은 노예로 다루다가 차근차근 흡수했다.
흡수하는 시간도 길었고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그것에서 깨달음을 얻은 상민은, 마푸체족과 조우하자마자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그들 부족의 여자와 결혼까지 하면서.
이미 몇 개의 부족들로 나뉜 마푸체에게 하나로 통합할 여지조차 주지 않은 것.
그 결과는 지금 자신이 부리고 있는 과트라체로 훌륭하게 재창조되었다.
‘고려는 남려대륙에서 처음부터 적대세력으로 접근한 적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원주민과의 관계와 공존, 그리고 동화를 최우선으로 놓은 상민의 덕이 컸다.
하지만 북려대륙 중부는 이야기가 달랐다.
아즈텍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 덕분에 이민족이라는 존재 자체와 그들의 침략에 대한 극도의 적대적인 분위기가 이미 팽배해 있었다.
심지어 먼 과거 북려를 휩쓸었던 대역병 또한 남쪽에서 찾아왔으니.
고려가 아무리 대의를 열심히 포장한다 하더라도, 앙주 서쪽에 있는 자들을 설득시키기란 무리가 있었다.
일단 언어의 장벽은 어떻게 해결할 건데.
증오와 불신을 심는 것은 쉬우나, 신뢰와 우호를 심는 것은 그보다 수백 배 어렵다.
‘미시시피강을 기준으로 동과 서라.’
아즈텍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고 있는 서쪽의 원주민들과 그렇지 않은 동쪽의 원주민들.
이 특성에 따라 이들 원주민들에게 해야 하는 정책이 바뀌겠지.
상민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찼지만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미국 역사에 해박하게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중부 평원의 원주민들이 꽤나 용맹하고 골칫덩어리였다는 것은 서부 영화들을 몇 편 보면 알게 된다.
이들은 어찌 되었든 유목민이니까.
‘그래서 내가 유목민을 싫어하지.’
반면에 미시시피강 동쪽의 원주민들은 달랐다.
고려는 상민의 세심한 지도하에 이들과 차근차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크리크(Creek) 족.
치카소(Chickasaw) 족.
촉토(Choctaw) 족.
체로키(Cherokee) 족.
그리고 화주 아래의 마야미(Mayaimi)와 시마놀(Simanoli)까지.
서쪽 평야의 원주민들이 수렵―채집 생활이 뚜렷하다면, 동부의 원주민들은 작물을 수확하는 정주민의 특성을 뚜렷하게 띠고 있었다.
옥수수와 주키니,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작물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농업기술은 형편없다.
현 마야나 아즈텍보다도 한참 뒤떨어졌으니까.
가뭄이 오면 이들은 땅을 버리고 다시 떠돌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죽겠지.
‘옥수수의 단점이다.’
제대로 된 시비법이 없다면 옥수수는 지력을 아주 빠르게 파괴하는 작물 중 하나였다.
고려는 원주민들에게 몇 가지 종자를 선물했다.
그리곤 선진적인 농업 기술을 조금씩, 아주 감질맛 나게 알려주었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할 때는 식량을 꿔다 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인의적 행동이지만, 어찌 보면 이들에게 확고한 정주민의 기틀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책략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잃어버릴 것이 생기는 순간, 이들은 바뀐다.’
곡창을 지어라. 곡물을 저장해라.
그 잉여생산물은 너희를 토지에 귀속할 것이니.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너희들은 기댈 곳을 찾으리라.
그리고 차츰 고려의 신민이 되는 것이지.
물론 상민이 오로지 퍼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근과 채찍은 병행되어야 한다.
고려는 교역을 통해 서서히 경제적 잠식을 시도했다.
정치적으로도 치카소와 촉토 간의 대립, 그리고 체로키와 크리크 간의 대립, 마야미와 시마놀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그들의 경쟁을 이끌어 내었다.
몇 번의 다툼도 생겨났다.
원주민들 간의 전투가 아니라, 자꾸만 간섭하는 고려와 싸우려 한 일부 원주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화주와 앙주의 군대는 강력했기에 그들의 시도는 빠르게 진압당했다.
‘가장 결정적으로….’
동부의 원주민들에겐 말이 그렇게 널리 퍼지지 않았다.
누벨 오를레앙의 영지와 목장을 점령했던 아즈텍, 그리고 그런 아즈텍을 공격해 말을 탈취한 평원 부족 동맹과는 달리, 누에바 갈리시아는 애초에 외부에서 큰 공격을 받지 않았었지.
이후 들어선 앙주와 화주의 통치자들은 아주 집착적인 말 관리로 가축들이 원주민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었으니까.
언젠간 필연적으로 퍼지더라도, 지금은 안 된다.
이 ‘문명화된 여섯 부족’들이 온전히 고려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
문명화된 여섯 부족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에게서 그 모티브를 따 왔습니다.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원주민으로 꼽혔던 것이 마푸체라면,
평원 부족 동맹의 구성원 중 누무누(코만치)는 북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원주민으로 손꼽힙니다.
강력한 기마술뿐만 아니라 흉폭함과 전략까지 모두 가지고 있어, 누벨 프랑스의 서진을 막은 큰 이유였기도 하죠.
고려가 제아무리 강력하다 하나, 아직은 일개 개척지에 불과하니 체급이 커지지 않은 이상 말을 가진 유목민을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코만치는 원 역사에서도 멕시코와 미국, 양측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약탈하고 도망가는 능력이 엄청 출중했다 합니다.
게다가 탁월한 승마술을 자랑했다고 하네요.
몽골민족마냥 말 위에서 먹고 자고 할 정도로요.
원래 북미에 말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