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다름(2)
― 차앙
날을 세우지 않은 롱소드가 서로 얽혔다 이윽고 떨어졌다.
두 명의 무장은 둥글게 연무장을 돌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은 전부 치웠다.
지금 이 순간은 오직 둘뿐.
진검이 아닌 가검이라도 쇳덩어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여전히 위험하다.
날이 없는 메이스(철퇴)도 존재하는 판에.
충격은 뼈와 근육에 계속 누적되고, 자칫 잘못하다 급소에 맞는다면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다.
검격을 맞은 에티엔의 팔다리는 이미 새파랗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기보다 속의 상처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그 와중에 힘을 조절한 것이 분명했다.
에티엔은 놀랍고 기가 질린 얼굴로 재상의 손을 쳐다보았다.
‘대단하군.’
에티엔은 그가 고려의 전통적인 도를 꺼내 들길 기대했으나, 저 재상은 오히려 기사들의 롱소드를 집어들었다.
무장이 자신의 무구를 쓰지 않는 것은 상당한 페널티.
양날과 전통적인 크로스가드가 달린 검에 더없이 익숙한 에티엔은 그러한 재상의 만행이 고까웠지만 그 생각은 첫 검격을 마주할 때 바로 박살이 났다.
뭔 힘이 이렇게 센가.
체인메일에 비해 충격력을 흡수할 수 있는 풀 플레이트 갑옷이 널리 퍼지게 된 이 시대, 방패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인기를 얻게 된 롱소드는 두 손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본신의 힘을 온전히 담을 수 있다는 말.
그래서 한손검인 아밍소드보다도 더욱 파괴적인 힘을 실어낼 수 있었다.
힘이라면 에티엔도 언제나 자신 있었다.
누벨 오를레앙, 아니 전 프랑스에서도 그와 근력으로 대적할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에티엔은 이 땅에 건너와 처음으로 자신의 힘에 버금가는, 아니 능가해도 과언이 아닌 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인지도 의문이다.
곰의 화신인가?
분명히 재상이 사용하는 롱소드 검술은 약간 이상했다.
날이 하나인 도와 날이 두 개인 검은 사용하는 바가 아예 다르다.
게다가 이것은 직검이요, 저자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것은 곡도였으니.
처음 에티엔은 쉴 틈 없이 그를 몰아쳤지.
재상은 반격하지도 않고 그저 방어해내는 것에 그쳤다.
물론 무술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어색한 무구로도 방어의 기술이 몹시 빼어나 에티엔은 효과적인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에티엔은 약이 올라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다.
가드에서 흘러내리듯 검날을 타고 내려와 중량을 실어 손목을 공격하는 방법.
중간 검날을 손에 움켜쥐고 찌르는 방법(하프 소딩).
아예 소드를 거꾸로 잡아 무거운 힐트와 크로스가드 부분으로 마치 둔기를 사용하듯 내려치는 방법(모르트하우).
그러나 재상은 전부 마치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몸을 뒤로 빼 피하거나 적절한 방법으로 응수하여 시도를 이어가지 못했다.
‘실로 짐승 같을 정도의 동체시력이군.’
게다가 발은 어찌 저렇게 잘 쓰는지.
검과 검의 사이에서, 위급할 때마다 내질러지는 발차기는 강력한 힘을 머금고 있어 아까 먹었던 식사가 살짝 나올 뻔했다.
‘이 사람도 전사다.’
에티엔은 전율했다.
눈앞의 재상은 화려하거나 아름답게 싸우지 않았다.
마치 전쟁을 많이 겪어본 사람처럼, 그는 냉철한 눈으로 가장 시기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고, 발길질을 하는 것을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것이 다소 꼴불견인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에티엔도 그에 동조했다.
스러져간 것에 미학과 명예는 없다.
오직 이기는 것이 빛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 퉤
에티엔은 어딘가 비릿한 쇠 맛이 나는 침을 바닥에 뱉었다.
그나저나.
‘슬슬 지칠 때도 되었는데.’
그러나 그 괴물 같은 상대는 한창 신이 나고 있었다.
시중을 아는 자가 지금 그를 본다면, 아마 그 얼음장 같던 시중이 이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겠지.
오락거리가 크게 없는 이 시대, 수도에서 간간이 즐기던 축구 경기 관람까지 불가능한 현재 에티엔과의 대련은 온몸의 아드레날린을 펌핑하는 극도의 짜릿한 순간이었다.
― 쉭 쉭
검이 오고 가는 광경에서 그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재미있어 미치겠다.’
고려의 도법과 이들의 검법은 많이 달랐다.
잔을 통해 서양의 검술에 대해 조금은 배워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에티엔처럼 수많은 전장을 구른 노련한 기사를 상대로 그들의 검술을 보여주겠다는 말은 어쩌면 자만처럼 들리기도 했다.
자신의 무기, 도를 이용하였으면 확실히 이길 수 있었겠지.
그러나 상민은 이 소중한 순간을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았다.
‘보여봐라, 네놈들의 진가를.’
시험은 분명히 그가 요청했으나, 상민 또한 그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실제 전투는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만큼 순식간에 결판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수련 검술은 살생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이 둘의 대련은 마치 긴 렐리에 들어간 탁구마냥 길어지고 있었다.
‘대단하다.’
그리고 그 랠리가 길어질수록, 상민 또한 상대방이 선보이는 무술에 매료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1세기의 현대인에서 13세기 고려의 무장으로 떨어진 이후 상민은 백오십 년간 고려의 검술을 배우고 계승하였으며, 개선해왔다.
그는 아마 가장 근처에 있었던 옛날의 부하, 이문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었다.
창양에 문경의 자를 딴 검술 유파가 있으니 아마 자신이 무사였다면 그 유파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다.
물론 유파의 근원을 논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자신이 듣기론 문경 또한 상관 김통정의 검술에 영향을 받았고, 김통정은 또 그의 스승 겸 상관에게 영향을 받았다 했으니까.
그 스승의 스승은 무인시대의 초창기를 살아갔던 무인인 모양이었고, 무인시대 직전 간신 이자겸 치세의 수하 척준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니 유파의 본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내 검술은 나의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칭할 세월이 흘렀다.
긴 세월 동안 수련과 대련을 하면서 상민은 고려와 자신의 무술에 자긍심을 느꼈다.
그래서 화기의 도입 이후 그 입지가 심히 위태로워진 냉병기술을 안타깝게 여겨 따로 맡아 발전하고 계승하는 조직, 선인원(先人院)을 설치했다.
선인(先人, 무사라고도 칭해진다.)들이 있는 곳이라는 소리다.
어디서 조의선인이라는 말이 이런 무력집단이 아니라 계급이었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원을 따지고 들면 머리가 아팠다.
아예 옛날엔 그 명칭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백제의 싸울아비나, 근원부터 잘못된 꽃미남을 뽑는 신라 화랑의 이름을 차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 이름이 고려인데.
어쨌든 선인원은 지휘관 및 장군을 뽑는 숭무감과는 별개로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성격상 군부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숭무감은 장교들을 선인원에 위탁 교육을 시켜 무술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반대로 선인들이 군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수련만 하는 무사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무사들은 주로 부사관 계급에 종사했다.
이들은 실제 전투, 특히 적과의 육탄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큰 활약을 거두었지.
하지만 상민은 지금 이 순간 더욱 욕심이 났다.
흡수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더욱 발전하고 싶다.
‘이 프랑스의 검술 또한 궤를 달리하는 무예다.’
동양의 검술과 서양의 검술은 확연히 다르다.
실제 체격의 차이도 있었고, 입는 갑주의 차이도 있었다.
눈 앞의 상대, 에티엔은 지금 완전한 중갑옷을 입고 있진 않았다.
격렬한 실전이 벌어지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체인메일과 큐라스(흉갑)정도겠지.
상민이 두정갑을 입으니까 그도 그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 다른 부위는 입지 않은 것일테다.
그러나 상민은 완전한 중갑옷의 실물을 본 적이 있었다.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목격한 갑옷은 정말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지.
직접 보니 갑주의 차이가 검술의 차이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 납득이 갔다.
그들이 입는 저 판금갑옷은 가히 중세시대의 전차와 같았다.
아흐메(투구)와 큐라스(흉갑).
스파울더(견갑)와 쿠터(팔꿈치 갑옷) 그리고 건틀릿(장갑).
퀴스(대퇴갑)와 폴린(무릎 갑옷) 그리고 그리브(종아리 갑옷)와 사바톤(신발).
전부 판금으로 이루어진 이 갑옷은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냉병기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절정의 방어구였다.
솔직한 말로 가장 최선의 상태에서 싸운다면 서양의 기사는 동양의 무사를 압도한다.
동수 대 동수의 근접전 싸움에서 백 명의 무사들이 백 명의 기사들과 백 번 싸운다면 아흔 번은 필히 패할 것이다.
장담해도 좋았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와 유럽의 차이였다.
떡장갑을 두른 갑옷을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원의 국가,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고려가 만들 수 없었을 리가 만무했다.
다만 효율이 떨어졌을 뿐.
어느 순간부터 유목민과 노스퀴토… 아니 바이킹은 사라졌고, 정주민과 정주민의 싸움이 되어버린 서유럽.
그와 달리 고려와 중원 국가들의 주적이 누구였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약탈과 도망이 일상인 기동력이 빼어난 유목민들.
이들은 지킬 영토도 별로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상민은 중기병의 필요성을 인지한 순간부터 이들의 검술과 갑주가 실로 아름답게 보였다.
고려가 그러한 풍습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러한 풍습을 가진 자들을 포용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 * *
에티엔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체력이 달린다.
온몸은 멍투성이.
비록 그도 재상에게 몇 번 유효한 타격을 입혔긴 했다.
그러나 실전이었다면 이미 자신이 먼저 목숨이 끊어졌을 것은 자명했다.
‘뭔 저런 인간이 다 있는가.’
싸우는 와중에도 학습해 나가고 있다.
기가 질려버린 에티엔은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이전보다 훨씬 공손해졌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었다.
― 끄응
검을 바닥에 꽂고 그것에 기대 일어난 에티엔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근처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도무지 움직일 여력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상민이 피식 웃으며 나무 물통을 건넸다.
“고맙…소이다.”
한바탕 후련하게 싸웠다.
온몸은 먼지투성이다.
둘 모두.
상민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자신도 온 몸이 마치 몸살이 난 것마냥 아팠다.
그러나 방금 전의 대련으로 무언가 한층 더 성장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예전의 내가 일당백이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뭐지?’
일기당천?
영 엉뚱한 생각이 드는군.
중요하진 않았다.
“할 말을 하거라.”
상민은 호흡을 정돈하곤 연무장과 성의 건축 요소를 바라보며 흘러가는 듯 말했다.
에티엔은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약속해 주시지요.”
“뭘?”
“제 동료… 아니 동료였던 자들을 무사히 보내준다고 말입니다.”
“…….”
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도 전사이니 전사 간의 예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사실 전사로서 살아온 인생보다 통치자로서 살아온 인생이 더 길었기에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상민은 그 와중에도 순간적으로 계산해내었다.
얻을 것과 잃어버릴 것을.
미안한 말이지만, 예의와 명예는 그에게 큰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충성심이라면.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본다면.
어쩌면 후자가 더욱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리한다면?”
“마티외 주교가 이곳에 와, 진실로 주님 앞에서 그녀의 말과 행동들이 한 점의 거짓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맹세한다면 저는 여왕을 따를 것입니다.”
너도 알고 있잖나.
“그것은 한 점 거짓도 없는 진실이니, 그대는 여왕을 섬기리라.”
그리고 그 여왕은 나의 명을 따르지.
그 사실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에티엔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다가, 이윽고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법 진정된 모양인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상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주군이시여(Mon Seigneur).”
충성 서약을 받는 것은 항상 묘한 충족감이 든다.
게다가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굴복시키기 어려운 만큼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러나 한두 번 이 짓거리를 해온 것이 아니란 말이지.
상민은 냉철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 주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이들이 실망하기 전에, 현실을 먼저 제시한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따른다면.
“에티엔 드 비뇰.”
“예.”
“나는 너에게 땅을 주지 않을 것이다.”
“…….”
“너뿐만 아니다. 너희 기사들에게 전부.”
“…어째서 그렇습니까?”
“고려는 직접 땅을 일구는 농부가 아닌 이상 어떠한 신분, 혹은 계급 및 직업에 대해 토지의 소유를 금하니.”
“…….”
“또한 너희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너희들의 자식들은 대우받겠지만, 남들보다 우월한 고귀한 피로 취급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황족인 내가 말하기엔 좀 그렇긴 해.
가만히 듣고 있던 에티엔도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
“그렇다면 저희의 충성은 어디로 향합니까?”
“이 땅,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진 앙주라는 국가, 그리고 여왕과 나.”
상민은 타이르듯 말했다.
고려의 군인 우대정책은 확고하다.
“너희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보급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말과 갑주 또한 항상 최고의 것을 받을 것이다.
너희들의 명예는 여왕과 내가 보장하며 제국 또한 그대들의 이름을 붉은 근위대와 같이 놓을 것이다.
백성들은 너희의 무훈을 노래하며, 너희의 갑옷을 입고 너희의 일원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할 것이다.
“주군은 저희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기사는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만들어주마.”
그래, 네가 그렇게 눈을 반짝거릴 줄은 알고 있었다.
“…….”
“장다름(Gendarme).”
고려의 붉은 근위대의 옆에는 푸른 중기병이 같이 나아갈 것이다.
상민은 말했다.
“너희 기병대는 그리 불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