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54화 (154/653)

장다름

잠재적 위험요소는 치워졌다.

물론 상민은 여전히 저 안의 상황이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아까와 같은 또라이는 더 없다는 만종 승려의 보고를 받고 아주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회의는 꽤 길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상민은 요새 밖에서 야영하고 있는 과트라체 기병대의 수장과 만났다.

껄렁껄렁한 군율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고로 군대란 엄격한 군율과 질서 있는 통제 하의 상비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상민은 이 과트라체 무리들이 가지는 반농반목 민족 특성의 자유분방함이 어느 정도 혜택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못마땅한 것이 있었다.

“당하를 뵙습니다.”

다소 껄렁껄렁한 분위기를 풍기는 과트라체의 수장은 고려의 시중 앞에선 보기 드물게 공손해졌지만, 상민의 안색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래. 고생이 많았소이다.”

그러나 얼굴에 대고 바로 군율과 질서에 대한 지적질을 하진 않았지.

엄연히 조정의 요청에 따라 자원해서 이곳으로 왔으니까.

“추격은 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러나 전술적인 면에서 아쉬운 것은 지적해야 했다.

“하선을 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지 못했습니다. 저 요새가 실로 위태로워 우리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함락될 것 같았습죠.”

부랴부랴 하선을 한 까닭에 본격적인 추격을 제대로 하지는 못한 모양.

그리고 그 몬테수마라는 인간 또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는지, 도망치는 와중에 온갖 장애물들을 흩뿌리고 내뺀 모양이었다.

아차팔라야강의 카누를 타지 못한 적병 천칠백여 명을 주살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전과가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자신이었다면 아예 작정을 하고 수일 동안 추격을 벌였을 것이었다.

습지가 핏물로 물들 때까지.

‘여러모로 아쉽군.’

경기병의 진면목은 전열과 전열의 충돌이 아닌 패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발휘된다.

직접 눈앞에서 총을 쏘며 죽인 병사의 숫자보다도 추격을 통해 등에 검을 휘둘러 죽이는 숫자가 열 배는 많았을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조금 더 준비를 철저히 해서 적을 추격했으면 더욱 뛰어난 전과를 올릴 수 있었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제대로 된 전투경험의 부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총기병을 주로 한 경기병의 육성은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말 위에서 저렇게 안정되게 총을 쏘고 활을 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대단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활약할 장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려에서는 마푸체 내부의 내전(순수계 리체와 고려계 과트라체 간의)과 동고려 정벌전, 그리고 유럽과의 전쟁 정도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경험한 자들은 이미 늙어 죽었고, 세 번째를 경험한 자들은 압도적인 보병, 포병대의 활약에 손가락만 빨고 있었으니.

그러니 과트라체는 유의미한 기병 전력으로서는 그동안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북려를 정복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몹시 중요했다.

‘이 광대한 대지를 빠르게 누빌 수 있는 기병은 북려 정복에 가장 주요한 병력이 될 것이다.’

보병대로 이 땅을 한 땀 한 땀 먹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해운이 닿는 해안가는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북려대평원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세계지도상으론 남려의 창강대평원보다 더 컸다.

거의 백오십 년이 흘러서야 남려의 영역에 대한 제대로 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과거의 전례로 보건대, 만약 보병으로 이 땅을 먹겠다고 한다면 그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 뻔했다.

‘그때를 틈타 유럽의 승냥이들이 이빨을 들이댈 것이 뻔하다.’

상민은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상민은 총기병의 카라콜이 상당히 좋은 전술이라고 생각하여 도입했지만, 이는 사실 대기병 전술에서 그 빛을 발했다.

이런 압도적 인구를 자랑하는 적에게는 그냥 깔짝거리는 공격과 같았다.

임팩트는 상당히 저조하다.

단 두 발을 쏘고 물러난다?

어느 세월에 이들을 잡아 죽이겠는가.

아즈텍이 패퇴한 것은 아마 고려의 과트라체가 선사한 공격이 처음 보는 종류의 공격이라 당황한 것도 있을 것이고, 지들 스스로가 이미 공세 종말점에 달해 있었기에 물러난 것이 틀림없었다.

‘여전히 중기의 부재가 발목을 잡는군.’

태조 해민 시절, 상민은 유훈으로 해강에게 중기병을 육성하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에 불과했다.

자신도 재상의 위에 있을 때, 중기병을 어떻게 잘 편성하여 써먹어 보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으나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

일단 쓸 곳이 없었다는 것이 제일의 이유였기도 했고.

경기병과는 다르게 중기병은 확고한 실전 연습이 있지 않은 이상 육성하기 어렵다.

아무리 판금갑옷을 비롯한 중무장을 하더라도 눈 앞에 펼쳐진 적의 서린 창의 숲을 뚫고 들어가야만 하기에.

‘그러나 중기는 필요하다.’

상민은 전장에서 수거한 아즈텍인들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을 상대로는 더더욱.

기사는 몰락하고 있었다.

값비싼 무구와 그보다 더 비싼 말을 가지고 다녔던 중세 봉건 계급인 기사는 다가오는 절대왕정의 시대에 계속 몰락해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계급인 기사의 몰락이 전술적 병과인 중기병의 몰락을 의미하진 않았다.

전장에서 중기병은 여전히 유효했다.

화기가 등장하면서 기병의 종합적인 위치가 그전에 비해 아주 약간은 위태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병이라는 병종 자체는 2차대전 초반까지도 쓰였을 만큼 대단히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한 병과였으니.

중기병은 그런 기병들보다 먼저 몰락했지만, 윙드 후사르의 사례를 보아 할 때, 근세 후기까지도 유효한 병종이긴 했다.

아즈텍 전사의 갑옷을 들고 한참 만져보던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누벨 오를레앙 요새를 흘끔 쳐다보았다.

‘흡수하고는 싶은데, 뜻대로 따라줄지가 미지수군.’

그녀가 어떻게 설득을 하든, 분명히 이에 반대할 자들은 존재할 것이다.

‘잔이 잘 해내기를 믿을 수밖에.’

* * *

잔은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잔은 본래 그녀의 언어적 능력이 늦게 개화된 것만큼이나 말재주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오히려 고려의 언어가 입에 더 잘 달라붙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품격있는 귀족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지.

그러나 그녀의 배우자가 누구인가.

흐르는 것은 세월이요, 느는 것은 말솜씨니.

상민은 말과 글에서는 이미 어떠한 경지에 오른 뒤였다.

쓰는 글은 명문이요, 뱉는 말은 흘러가는 물과 같았다.

그녀의 상황에 맞는 연설문을 첨삭해주고 배 안에서 거의 한 달 동안 표정과 말하는 법, 손동작과 기타 제스처에 관한 속성과외를 해준 결과로 잔은 이미 이 연설문에 대해서는 상민이 대중들과 신하에게 직접 연설하는 것과 같았다.

본래 기사들 중 일부는 이미 장이 제시한 선택지 중에서 답을 고른 상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잔의 이야기는 전혀 매력적이지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다.

영지의 사적 소유가 없는 나라라는 것을.

고려는 봉건제를 실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은 저 밖에서 할 생활, 그것도 빈곤하기 짝이 없을 개척 생활을 다시금 해야 한다는 것에 염증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에티엔을 위시한 기사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기도 했고.

프랑스 오를레앙 시절부터 그녀 부대에서 종군했던 자들과 충성심이 강한 자들, 평소 종교와 사제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있거나 독실하지 않은 자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곳과 당장의 안온함을 버리고 싶지 않은 자들.

― 저를 믿어주세요.

언제나 올바른 판단과 그로 인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잔의 호소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결집은 물론이고 그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며 갈피를 못 잡던 이들까지 마침내 붙잡았다.

하지만 이들을 완전히 설득하려면 마티외 주교가 이곳에 와야 할 것이다.

성공회란 무엇이며, 과연 카톨릭 기사들이 개종을 할 수 있는 교리인지.

* * *

상민이 이 호성적에도 약간의 아쉬움을 느낄 무렵.

장은 도리어 훨씬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았다.

‘빌어먹을….’

그의 생각보다 잔의 통제력이 확고했었다.

자신이 내민 당근에 설득당했던 이들도 일부 돌아섰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장은 빠르게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고려군이 점거한 누벨 오를레앙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늦으면 좋지 않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고려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제아무리 성공회인지, 뭔지를 앞에 두고 있어도 장은 저들을 이교도로 인식했다.

이단을 앞에 세운 이교도라. 끔찍하군.

적어도 오늘 밤, 바로 떠나는 것이 현명할 터.

“우리를 따르면 진실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따르는 기사의 수는 삼분의 일 남짓, 마흔 정도에 불과했고, 병사들도 이백이 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오히려 더 많은 수가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전체 누벨 오를레앙의 선교사가 스무 명 안팎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열여섯 명의 선교사가 남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역으로 마티외의 인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

총인구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백성들은 더욱 심했다.

프랑스계와 흡수된 카도 원주민들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미쳤다고 저곳에 나간다고?”

“저런 식인종들이 북쪽에도 있을지 어떻게 알까!”

그래서 모아 보니, 위로 떠나려는 기사와 병사들의 가족들, 그리고 소수의 독실한 카톨릭 신도들이 거의 전부인 상황.

장은 적어도 프랑스계의 주민들은 더욱 확보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기사들의 권유의 탈을 쓴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정착민들이 이렇게 반항하는 것을 처음 보게 된 장은 강압적인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끌고 가려 했으나, 잔의 저지에 수포로 돌아갔다.

잔과 장 사이에서 서늘한 시선이 서로 오가는 틈을 타 고려군 뒤에 숨어버린 프랑스인들은 더 이상 기사들을 신뢰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장이 단념하며 짐을 꾸리는 모습을 성벽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잔이 씁쓸하게 뇌까렸다.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에요.”

서른이 넘는 기사는 중대한 전력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상민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들은 거의 다 남았군.”

“그러네요.”

“실망하실 것 없소. 이 정도의 결과는 예측했었으니까.”

상민의 말에도 잔은 다소 회의감이 드는 얼굴로 짐을 싸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곤한지 안으로 들어갔다.

상민은 조금 더 이들을 관찰하기로 했다.

어찌 꼭….

‘삼별초 같군.’

멍청한 고집에 사로잡힌 이들.

과거의 잔재를 발견한 상민이 피식 웃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존재는 저 기사가 아니다.’

백성이 없는 집단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백오십여 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싸우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후환을 남겨두는 것은 현명하지 않겠지.’

상민은 과트라체 기병대의 지휘관을 찾으려 성벽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뜻밖의 방문객으로 방해를 받았다.

온 아래턱에 수염이 덥수룩한 곰 같은 남자, 에티엔이 상민의 눈앞에 와 섰다.

이번 이 분열의 사태에서 잔을 가장 크게 지지했다던 고마운 인물인데.

처음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가 썩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뒤로 호박씨를 까는 놈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건이 있나?”

그래도 좋은 말이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에티엔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다.

“당신은 대단한 전사라 들었소.”

“어디서?”

에티엔은 다소 호칭이 어색한지 말을 골랐다.

“여왕께.”

그녀가?

“그래, 뭐라 하던가?”

“그대가 우리 전부를 지켜 줄 수 있다고 하셨소이다.”

상민은 문득 미소 짓다가, 이윽고 빈정거렸다.

“…그대들의 그 드높은 자존심엔 썩 좋은 말은 아니군.”

그러나 에티엔은 여전히 상민의 발언에 감정적 동요가 생기지 않는 모양.

꽤 힘든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군.

“우리는 이미 그동안 차릴 자존심이 많이 무너졌던 상태였소.”

당신도 그들을 상대해보면 알게 될 것이오.

에티엔은 약간 자조스러운 얼굴을 띠었다.

저 긍지 높은 기사 장 또한 결국 꽁무니를 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이오?”

상민은 대답 대신 요새에서 내려지고 있는 누벨 오를레앙의 푸른 바탕에 흰 십자기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대신 다른 깃발이 올라가고 있다.

고려를 상징하는 삼태극과, 흡수한 동예와 많은 주(州)들을 상징하는 팔괘가 합쳐진 깃발이.

그리고 앙주의 왕실을 상징하게 될 푸른 방패에 금색의 칼과 백합, 그리고 칼 위에 올려진 왕관 문양의 깃발이.

우리라.

상민은 그 깃발들 말고도 프랑스인들을 둘러보았다.

“기필코.”

그들이 이제부터 프랑스인이 아닌 프랑스계 고려인으로 불리게 될 이 순간부터,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에티엔이 상민의 표정을 보더니 이윽고 씩 웃었다.

“그렇다면 증명해 주시오.”

곰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상민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좋지.”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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