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53화 (153/653)

오열

새벽호.

재상의 침실 겸 집무실.

상민은 지구본을 느릿하게 돌리고 있었다.

아직 남려와 중려 그리고 북려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도는 여전히 대충 그려진 상태.

그럼에도 예전의 모습보다는 한결 나아, 이제는 대부분의 대륙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표기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지.

세계일주의 혜택이다.

‘…….’

상민의 눈이 중려에 닿았다.

삼별초가 이곳에 떨어지며 굴린 스노우볼은 이제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불어나 있었다.

그 자신이 가진 미래지식으로도 어떻게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저 악의 제국이 질병이라는 거대한 난관과, 그에 못지않은 석기와 철기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자신도 이미 마야라는 곳에서 한바탕 날뛰었던 경험이 있기에, 이곳의 원주민들이 얼마나 괴상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저 미친놈들을 막는 것에 주력하자.

만약 자신이 어떠한 흉계나 사고를 겪지 않고 먼 훗날까지 계속 살아남는다면 역사학을 배우면서 그에 대한 의문을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즈텍의 지도자는 쉽지 않은 자다.

상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땅의 원주민들은 고려인들에 비해 절대적 지식의 양은 적을지언정,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지적 사고방식은 그리 뒤떨어지지 않았다.

축적된 지식의 절대적 양의 차이.

그것이 문명을 구분하는 척도일 테니까.

따라서 그들에게도 고려에 대적할 수 있는 지식이 축적된다면 위험한, 혹은 끈질긴 적수가 되겠지.

타완틴수유 반군 수장이었던 파차쿠티처럼.

심지어 보고서로 읽히는 바로는 이 몬테수마, 아니 그의 형이자 재상이라는 틀라카엘렐은 파차쿠티보다도 한 수 위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잔혹성과 유능성, 그리고 잠재력 모두.

지금은 잠시 막는 것에 성공했으나 다시금 북부로 손아귀를 뻗을 것이었다.

‘마야는 허장성세에 불과하다.’

상민은 출발하기 전, 마야에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위협용의 군대를 움직여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마야의 카롬테(신성왕)는 전능하고 위대한 뱀신, 쿠쿨칸(태조)의 아들들이 다스리는 고려의 명령을 교리상으로 거부할 수가 없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거부하길 싫어했다.

오히려 가슴을 치며 믿어달라고, 할 수 있다고 북부로 진짜 공격을 나서겠다는 그들을 말리고자 상민이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마야인들이 아즈텍인들에게 가진 원한은 이해는 한다만….

‘모기와 기근으로 인해 너덜거리고 있는 마야는 원정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고려가 아무리 식량과 생활필수품, 의료품 등을 지원하고, 마야는 그 대금을 경옥과 귀금속, 그리고 원자재로 치르는 상호호혜적 무역이 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정말로 원정에 떠난다면 아마 패퇴할 것이 분명했다.

마야는 후납 쿠적 쿠쿨칸 개혁 신앙이 자리잡은 이후, 하루가 다르게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온순해지고 있었다.

상민이 마야인들의 꽃전쟁 전투본능과 인신공양본능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만든 자비로운 신앙 교리들은 시간이 지나자 목적했던 온순한 마야인들을 넘어서 아예 거대한 마야인 수도 공동체를 만들어버렸다.

거대한 신전의 꼭대기에서 사람의 심장을 뽑아대던 마야인들은 거의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사육하는 돼지를 죽이고도 그 자신의 살생을 참회하는 기도를 ‘피를 봐서 진노하셨을 쿠쿨칸(자신)’에게 거의 한 시간이 넘게 빌고 있었다.

‘이들이 아즈텍의 남하를 막아낸 것이 기적이 아닐까.’

반면 개혁된 아즈텍의 교리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 상민이 고개를 저었다.

교리의 잔혹성뿐만 아니라 인구수 자체도 아즈텍이 월등했다.

게다가 현 지도자의 역량 또한.

마야 역사상 불세출의 명군인 4대 카롬테, ‘맞서 지킨 자’는 이미 늙어 죽었다.

그의 손자인 마야의 현 카롬테, ‘성을 쌓은 자’가 가진 고려에 대한 충정은 높이 사지만, 그 카롬테의 능력이 테노치티틀란을 다스리고 있을 틀라카엘렐에 버금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마야는 그냥 방파제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

아즈텍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정도의.

그래서 일단 소집된 마야인들은 미나미틀란강 동쪽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북과 꽹과리를 쳤다지.

그리고는 카롬테의 이름답게 강을 따라 방어시설을 구축하려는 모양.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군.’

상민은 다시 흰 종이를 꺼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한참 업무를 보고 있을 때, 그의 집중을 깨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으으응.”

누군가 자신의 침대에서 뒤척이며 신음성을 내었다.

상민은 슬쩍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짙은 흑발이 마치 미역처럼 이리저리 베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끝까지 얇은 면 이불을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근면했던 예전의 모습이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정도.

그러나 이해해주자.

“일어나요. 아까 보고받은 바로는 이제 거의 도착할 것 같다니까.”

상민은 고개를 돌려 서재의 한구석에 놓여있는 기물을 바라보았다.

경선의(經線儀).

드디어 제대로 된 크로노미터가 완성되었다.

특별히 제작된 탄성철과 용수철을 이용해 온도의 변화와 선박의 진동을 흡수할 수 있는 시계.

시계의 나사가 갓 돌려졌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회전력이 동등하게 유지될 수 있는 장치.

개선된 탈진기를 이용한 경선의는 항해의 정밀함을 한층 더 증가시켰다.

뭐 원리에 대해선 상세한 설명을 직접 들었던 것 같은데, 어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장영실이 결국 경선의를 개발했다는 거지.’

과학자와 공학자는 정말 대단한 존재였다.

정말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을 주문해도 열심히 닦달하다 보면…….

― 부스럭

‘크흠.’

공학자들이 들었다면 화를 낼만한 그의 잔혹한 생각은 방해를 받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난 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오랜만에 부하들을 본다는 자각이 생기긴 한 모양.

“그… 저.”

“왼쪽.”

상민은 미리 준비해 놓은 그녀의 의복들과 갑주걸이에 걸려 있는 갑주에 턱짓을 했다.

― 툭

그녀를 감싸는 이불이 황급히 떨어져 나가고, 드러나는 나신에 상민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할 일이 많은 아침부터 이러면 곤란하다.

자신은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빌어먹을 하반신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한참 동안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입었던 것이 분명한 갑주들이 배의 잔잔한 움직임에 따라 작은 소음을 내며 갑옷걸이에서 절그럭거렸다.

그것을 집어 몸에 대어보았던 잔이 이내 포기하며 울상을 지었다.

“갑주들이 하나같이 몸에 맞지 않아요.”

그녀는 만삭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었다.

유심히 살펴보면 배가 불룩한 것이 보였다.

예전에 입던 갑주 말고도 옷은 많았다.

참고로 거의 일주일 전부터 옷을 고른 그녀였기에 상민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해야만 했다.

분명히 어제도 자기 전에 뭘 입을지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던 것 같은데.

그리고 애초에 당신, 원래 옷차림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지 않았나?

사람이 뭐 저리 확확 바뀐담.

그래서 그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냥 좀 아무거나 입으면 안 되오?”

“…….”

상민은 원망 반, 분노 반으로 이루어진 잔의 눈초리에 시선을 돌렸다.

말실수를 했다는 것은 항상 말을 뱉은 다음 뒤늦게 깨닫는 법이다.

이 사태의 범인은 당연히 자신이었으니까.

“미안하오.”

이해는 한다.

부하들 앞에서는 계속 기사로 남고 싶겠지.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결국 잔 또한 대충 푸른 원피스와 같은 옷(어제 결정한 옷이 맞다.)을 골랐다.

카나리에 오고가는 베네치아 상인을 통해 산 카이로산 벨벳 원단은 마찬가지의 카나리에 고용된 프랑스 출신의 의복 장인의 솜씨와 결합되어 훌륭한 드레스로 재탄생되었다.

그녀의 성향상 노출을 꺼렸기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펑퍼짐하게 만들어 언뜻 보면 임신의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그냥 우아한 프랑스 귀족처럼 보였지.

하지만 그 자체로 가지는 위화감이 있긴 하다.

그녀가 언제 저런 우아한 옷을 입고 다녔는가.

“…….”

다시금 쏘아지는 눈초리.

볼 장 다 본 사이면서 왜 이럴 때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상민은 저지른 죄가 있기에 투덜거리면서 가면을 챙긴 후 선실을 나섰다.

또 다른 신분이 생겼더라도 굳이 가면을 벗지는 않았다.

벗고 있는 것은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뿐.

‘조용히 있었으면 좋은 광경을 계속 볼 수 있었는데.’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신 그는 선수로 올라갔다.

“거의 다 도착했군.”

“예. 당하. 하선을 준비하겠습니다.”

이미 아까부터 육지가 보인다는 참이었다.

잔이 옷을 갈아입는다 하며 분주하게 지내는 동안 배는 누벨 오를레앙의 항구에 세워진 감시탑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도착했다.

― 뿌우우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항구에 정박한 새벽호와 선단들에게서 무장병력이 내렸다.

이 큰 행렬에는 근위군 두 연대가 대동한 상태였다.

전투와 관련이 없는 민간인은 거의 없었다.

설치될 정북행성의 관리들, 그리고 관리들과 병사들의 가족들 모두 북방의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로 옆의 화주에 임시로 머물고 있을 것이었다.

상민의 아내 연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 저벅 저벅

선박이 정박함을 알아차렸는지 누벨 오를레앙의 요새에서 황급히 사람들이 나왔다.

만종의 무승들과 프랑스인 기사들은 골격과 피부는 다르더라도 모두 지극히 초췌해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수성전은 그도 겪어본 바. 참으로 힘들긴 했었지.

“그랜드 마스터!”

그중 한 남자는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그의 몸에 걸쳐져 있는 갑옷의 무게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질은 거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잔을 바라보다, 이윽고 그녀 바로 옆에 서 있는 상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둘을 반복해서 바라보았다.

계속, 거듭해서.

“…….”

고려의 재상.

저자가 왜 또 그녀의 옆에 있는가?

질이 끝도 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 동안, 잔은 동료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제각기 모두 혼란스럽고 당황했으며 의아해하는 얼굴들.

질문할 거리가 한가득이라는 것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의문만큼이나 그녀 또한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겪었다.

잔은 그리고는 요새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 의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 주민들은 하선하는 원군을 바라보며 제각기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장은 무덤덤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희미한 적대감에, 잔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교황과 척을 진 순간부터 이런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도.’

장은 아마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녀의 신뢰를 사고, 후계가 없이 죽을 성녀의 뒤를 이어받아 이 넓은 봉역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그러한 그림을.

세속의 권력에 대해 이해를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자그마치 이백년동안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괴물의 곁에 선 순간부터)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치적 의도를 어렴풋하게 읽어내기 시작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믿지 말아야 하는 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이가 되었고, 믿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던 이는 더 이상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잔은 고개를 흔들었다.

의구심을 품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확신을 가져야 했다.

‘설득해내야만 해.’

그동안 경험했던 바,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가 같이 경험했던 바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자.

그녀는 다시금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장과 에티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르르 나왔던 문을 통해 다시 요새로 들어갔다.

― 철컥

상민 또한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기사들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귀하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미간을 찌푸린 상민이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기사들을 노려보자, 잔이 돌아보며 그들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이건 누벨 오를레앙의 구성원들만 참여할 수 있는 회의예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안심하라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잔이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민 또한 이윽고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

불길하다.

상민은 옆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살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들어가지 않나?”

물러난 공터에는 한 프랑스 기사가 남아 있었다.

아직 유럽인들, 특히 남성의 나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은 꽤 동안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자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의 아래턱과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비단 그의 하악뿐만 아니라 전신이 마치 요동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질은 고개를 들어 상민을 바라보았다.

꽤 많은 일을 경험했다 생각하고 있던 상민조차도 그의 괴이한 모습에 흠칫 놀랐다.

“…….”

안압으로 인해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져버린 듯한 새빨간 눈.

마치 피라도 뚝뚝 흘러나올듯한 그 귀기 어린 눈은 절로 소름이 돋았다.

질은 그를 노려보더니 이윽고 성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회의에 참석하러 들어가는 것이겠지.

상민은 문득 질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단검을 바라보았다.

‘불안하다.’

상민은 순간 질의 앞길을 막았다.

도집으로 막아 세웠지만, 엄지손가락은 도의 호수(護手, 가드)에 대어 언제라도 튕겨 뽑을 수 있게 한 상태였다.

“무슨 짓이지?”

억눌린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은 어느 순간, 마치 미래의 예지 같은 장면을 보곤 한다.

그 불길함은 온몸을 휘감고 경고를 울리지.

그리고 그 경고를 무시하면 항상 좋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곤 했다.

지금 상민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면, 기필코 잔을 해코지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마치 먼 미래에 존재할 화질 좋게 인코딩한 동영상을 재생하듯 머리에 떠올랐다.

단검, 미치광이, 임산부.

순간적으로 떠올린 참혹한 광경을 무시할 수가 없던 상민이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 들 듯 질을 적대하자, 주변에 있던 고려의 근위군들도 최고 지휘관을 따라서 질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질을 옹호할 만한 프랑스 기사들은 이미 전부 안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

질은 억눌린 증오심을 담아 말했다.

“네놈이냐?”

목적어와 동사가 빠져 있지만 상민은 질의 프랑스어를 알아들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눈은 잔의 얼굴이 아닌 다른 부분에 가 있었으니까.

본신의 눈썰미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질이 잔에게 가지는 집착적인 마음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방탕하기 짝이 없는 질의 화려한 여성편력 덕분인지.

다른 근육전쟁기계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을 눈치채고야 말았다.

특제 드레스로 임신의 징후를 치밀하게 가린 잔의 노고가 무색하게도.

‘이놈은 들여보낼 수 없다.’

나머지 기사들도 시간이 흐른다면 알게 될 것이라 해도 이놈은 안 된다.

그의 눈빛을 보니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이자는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사후에 평가받았다 했으니까.

천천히.

마치 짐승을 몰아내는 것처럼 근위군 또한 상민의 곁으로 다가오며 문 쪽을 방어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질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수적으로는 그가 완벽하게 열세이긴 했다.

상민 자신도, 질과 일대일로 싸운다면 질 자신이 없었기도 하고.

의아하군.

눈이 홱 돌아간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상민은 살수를 쓸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누벨 오를레앙과의 관계가 악화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순순히 물러난다?

분노가 절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 끈적끈적한 자기파괴적 감정은 분명히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상민은 뒷걸음질 치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질은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씹어뱉듯 내뱉었다.

“쓰레기 같은 년놈들.”

아니, 정말로 피가 보였다.

“더러운 창녀! 역겨운 이교도들!”

입술을 얼마나 씹어대었는지, 그의 턱선을 따라 피가 몇 줄기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것은 피뿐만이 아니었다.

“…….”

흉신악살이 따로 없군.

얼굴은 붉고, 눈도 시뻘겋게 변했고, 입가에선 선혈이 보였다.

상민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질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성큼성큼 건물 입구 근처에 지어진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태평스레 여물을 씹고 있던 한 마리의 준마를 꺼내 안장과 등자를 올린 질이 말 위에 올라타며 고함쳤다.

“창녀와 이교도, 실로 배를 맞대기에는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주변에선 오직 상민만이 그의 피와 한이 서린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 근위군은 혼자 흥분하여 프랑스어로 씩씩대는 질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하, 발포합니까?”

어찌 되었든 위대하신 제국의 시중이자 정북행성의 수장에게 몹쓸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았다.

이미 병사들 중 일부는 화약까지 쟁여놓은 모양.

그러나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총성은 시끄럽고, 잔은 회의 중이다.

행여 위험요소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내버려 둬라.”

질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열린 성문을 통해 누벨 오를레앙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얼마 가지 못하고 굶어 죽을 텐데.

상민이 쯧 하고 짧게 혀를 차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근위군도 총과 도를 내려놓았다.

장전된 총알을 다시 빼는 일도 고역이라 끙끙대는 병사 옆에 다른 병사가 와서 슬쩍 질문하는 것이 들렸다.

“그나저나, 저치 울고 있었나?”

병사는 납탄을 꺼내며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군.”

그들은 한참을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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