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52화 (152/653)

분열

“살았군.”

에티엔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성벽에 기대앉았다.

그토록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된 까닭인가, 그는 문득 주변 구조물이 꽤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어제 혈전이 벌어진 곳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나 보다.

“어이없는 대머리.”

죽은 무승이 앉아 있던 곳을 눈으로 훑어보자 성벽이 갈라진 틈 사이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망자가 남기고 간 것으로 보이는 염주.

에티엔은 머뭇거리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것이 불교의 로사리오인가. 그는 그것을 품에 집어넣었다.

시신은 수습할 수 없으니 이거라도 챙기는 것이 좋겠다.

그는 성벽의 틈 사이로 밖을 바라보았다.

아즈텍의 전사들은 썰물이 나가듯 도망가고 있었다.

저 멀리 고려군의 깃발인지 말을 그려 넣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 * *

과트라체 기병대는 불과 이천에 불과했으나 전장에서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포위된 누벨 오를레앙 항구로 진입하지 않고, 동쪽에 있던 작은 항구로 간 그들은 다른 물자보다도 말부터 먼저 내린 후 군세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위기에 빠진 누벨 오를레앙을 향해 서둘러 돌격했다.

― 타타탕

― 다 죽여라!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독특한 기병이었다.

고려의 기병 전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경기병은 무장이 다양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 그들은 활과 기병총, 그리고 기병도(刀)를 가지고 있었다.

주 전술은 화약과 총탄이 미리 장전된 기병총을 이용한 원거리 사격.

화약을 쓸 수 없거나 소리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교를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만든 합성목궁을 쓴다.

추격상황에서는 근접전에 쓰는 기병도를 사용하여 적을 주살한다.

고려 기병대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본 에티엔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승마술이 상당히 뛰어난 기병들이다.’

기병은 육성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숫자만 맞추는 그런 장부상의 기병이 아니라 정말로 효율적으로 말을 다룰 수 있는 기병은 더더욱.

말의 숫자가 문제는 아니었다.

창강대평원이라는 아주 넓고 풍요로운 대지를 얻은 이후, 고려인들은 아주 강력한 농업전통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유럽과의 통상을 비롯한 강력한 중상정책을 펼치고 있었지.

따라서 목축업은 솔직한 말로 약간은 소외되는 감이 있었다.

객관적인 말의 숫자는 많았다.

사실 많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대평원 서쪽과 남쪽에 널린 것이 초원이었으니까.

문제는 말 위에 탈 기수였던 것이지.

그러나 제국의 막내아들이라고 불리는 자들, 마푸체의 일족 과트라체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영친왕 해강의 자손들은 지금까지도 반농반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그러나 에티엔은 조금의 아쉬움을 느꼈다.

‘강력하기는 하나, 공세가 어째 지지부진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저들이 강력한 중기병이라면 기마돌격을 통해 적의 예봉 자체를 꺾어버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불과 백 명의 기병으로 저들의 도시를 유린하며 조제프 사제의 유해를 수습할 때의 광경을 떠올려 본다면, 이천의 중기병이라면 저들을 정말 말 그대로 박살을 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갑주를 별로 착용하지 않은 유럽의 경기병이라도 창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

그러나 고려의 경기병대는 어딘가 약간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언제든지 도망을 칠 수 있게끔 한 발을 빼는 느낌.

돌격을 할 때에도, 그들은 선봉이 저들과 마주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모습이다.

물론 아즈텍의 투사무기가 기병대를 저지할만한 화망을 형성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다 보니 거의 코앞까지 가기는 했다.

그러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단지 총탄만 퍼붓고 좌우로 흩어져 뒤로 빠지는 모양.

에티엔은 다소 실망했다.

기사들로 구성된 프랑스 중기병의 강력함에 비해서는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중기병이 먹잇감을 포착한 뒤 내리꽂는 독수리라면 저들은.

“요란한 벌 떼 같군.”

에티엔은 어찌 되었든 저 벌 떼들이 야만인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들은 고려에 의해 목숨을 수차례나 구원받았구나.

* * *

그리고 그 후 한동안 아즈텍은 아차팔라야강을 넘어오지 못했다.

이토록 먼 장거리 원정을 시도하지 않았기에 보급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행정적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토록 친밀하며 유대감이 넘쳤던 형제, 몬테수마와 틀라카엘렐의 분열도 거기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몰아붙이면 누벨 오를레앙을 함락할 수 있다고 믿은 동생 몬테수마는 무리를 해서라도 정복을 이어가길 원했고, 형 틀라카엘렐은 우선 정비한 후 때를 기다리자고 전령을 보내 건의했다.

― 저들에게 그 말을 탄 전사들이 많아진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됩니다.

틀라카엘렐은 덧붙였다.

― 정복에 실패해 포로를 잡지 못한 이상, 아군은 가용한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 게다가 보급로가 길어지면 그들의 뛰어난 기동성을 자랑하는 말 탄 전사들이 아군의 후방을 유린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생기기에.

― 적어도 이번에 심은 옥수수를 수확하여 휴대하고 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터.

틀라토아니의 현명한 결단을 바랍니다.

틀라카엘렐은 최대한 격식을 담은 말을 전령을 통해 동생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몬테수마는 형제의 충고를 조언이 아닌 힐난으로 받아들이고야 만 모양.

보냈던 전령은 거의 곧바로 되돌아왔다.

― 형제여. 그대는 친애하는 내 형이지만, 엄연히 아즈테카의 틀라토아니는 이 몬테수마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두 형제의 불협화음 사이에 낀 전령은 온몸을 떨며 틀라토아니의 말을 전했다.

틀라카엘렐은 두려움에 떠는 전령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는 동생의 분노와 상처받은 자존심에 고개를 저었다.

선대 틀라토아니는 불같은 성격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몬테수마를 틀라토아니의 자리에 앉혔고, 이는 그 형 틀라카엘렐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었다.

강력한 전사들을 묶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선천적인 능력이 필요했으니까.

몹시 냉철하고 계산적인 그는 전사들의 지도자에 스스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틀라카엘렐은 동생의 그런 완고한 성품이 또한 한 번은 그 스스로를 위기에 빠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패배감….’

이는 동생을 진정으로 시험하는 심판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면, 아즈테카는 진일보할 수 있겠지.

그러나 몬테수마는 같은 자들에게 두 번째로 맛본 거대한 패배감에 그야말로 압도당한 모양.

정복을 강행하려는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선택을 내리고야 만 것.

몬테수마 틀라토아니는 지금까지 수개의 민족을 박살 내었다.

이것은 마치 선대 틀라토아니들의 위업에 버금갈 만했다.

심지어 정복한 영토는 어떠한 선조들보다도 넓었으니까.

치치멕강 이북에 살던 아파치계의 리판.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몬테수마우아칸 근처에 먼저 살았던 카도계의 수많은 민족들.

자신이 가는 곳마다 원주민들은 무기력하게 정복되었고 제국의 먹이, 혹은 노예가 되었다.

틀라토아니의 권위는 몹시 드높았으며, 그들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제대로 된 원칙, 즉 가장 가까운 핏줄에 의해 상속되는 왕조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면 말이지.

‘실망이 크다, 동생아.’

틀라카엘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음 원정의 성공을 위해 있는 곡물이라도 박박 긁어모아 다시 한번 북쪽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진.

“시우아코아틀(Cihuacoatl, 아즈텍의 재상)이시여! 남쪽의 상황이 수상합니다!”

그가 관리하는 테노치티틀란에 전령들이 들이닥쳤다.

공통점이라고는 남쪽에 주둔해 있는 틀라카텍카틀(Tlācateccatl, 장군)이 보낸 전령들이었다.

“마야 놈들이 미나미틀란강 서쪽으로 병력을 집결하고 있다 합니다!”

틀라카엘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마야 놈들이?”

멕시카의 땅보다도 훨씬 더 무덥고 울창한 열대우림에 있는 마야는 황열과 학질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는데.

아즈텍도 미나미틀란강을 넘을 생각은 없었지만, 마야인들이 설마 그 병을 수습하고 진격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틀라카엘렐은 침음성을 삼켰다.

“내가 직접 후악사카(Huaxyacac, 오악사카) 요새로 내려가야겠다.”

후악사카 계곡에 지어진 후악사카 요새는 아즈텍이 그 땅을 지배했던 자포텍과 믹스텍을 정벌하며 그들의 영토에 세운 요새였다.

지리적으로 자포텍과 믹스텍 잔당들을 토벌할 수 있었고, 미나미틀란에서 북진하는 마야의 병사들을 막을 수 있는 절호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에 틀라카엘렐은 손수 그곳으로 자신이 내려가 불안한 남부를 막기로 결정했다.

다른 틀라카텍카틀들은 대규모의 공세를 막아낼 역량이 되지 않는 자들이 수두룩했기에.

‘또한 능력이 있는 것도 문제지.’

천재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틀라카엘렐, 그리고 군재에 일가견이 있는 몬테수마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다른 틀라카텍카틀들을 경계했다.

이츠코우아틀로부터 내려오는 직계 왕조를 계속 이어가려면 군공이 큰 장군은 유능한 부하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경쟁자니까.

형제는 그렇기에 아직까지는 서로밖에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북부로 수송할 곡물들을 남부로 내려보내거라.”

“하지만 틀라토아니께서….”

“어쩔 수 없지. 우리가 곡물을 보내지 않으면 틀라토아니께서도 어쩔 수 없이 원정을 중단하실 것이다.”

* * *

“흐흐하하!”

과트라체들은 이상한 놈들이었다.

전장 정리가 끝나고, 그 대규모의 기병대가 성 밖에 야영하는 꼴을 보고 있던 누벨 오를레앙 기사들은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불가에 둥글게 둘러앉아 이상한 북을 치며 승리를 자축하는 그들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고려인들과도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저들도 고려인이오?”

에티엔이 프랑스어를 잘하는 무승에게 물었다.

소신연비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이후, 에티엔은 어쩐지 무승들이 그렇게 싫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는 전사한 망자들의 명복을 비는 불제 비슷한 것에 참석해서 묵주 비슷한 것을 승려들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지.

부하나 다른 기사들의 시선은 알 바 아니었다.

‘전사에게는 전사로서의 대우가 마땅한 법이다.’

프랑스어를 잘하는 무승이 어깨를 으쓱했다.

“서쪽 방언이 심하고 풍습이 독특하나, 저들도 엄연히 고려말을 쓰고 황상께 충성을 바치는 고려인들이 틀림없습니다.”

“…….”

외견상으로는 기존의 고려인들과 아직도 약간 이질적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서로를 같은 국가의 구성원이라고 완전히 받아들인 모양.

에티엔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지휘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휘부에선 한창 말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즈텍에게서 큰 승리를 쟁취해낸 이상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아졌다.

“당장 저들을 공격해서 보급로를 끊어내야 합니다.”

기사들이 주장했다.

그러나 상석에 있는 장은 한참이나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 야만인 기병대(그들은 저자들을 고려인이라 인식했음에도 야만인 기병대라 부르기로 했다.)들에게 우리가 지휘권을 행사할 수나 있는가?”

목소리가 요란하던 기사는 어찌 그 말엔 대답이 없다.

장은 팔짱을 꼈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네.”

“…….”

“바로 이곳이 어찌 될 것인지 논해야 하는 시점이란 말일세.”

보게나.

장의 말에 기사들은 서로를 둘러보았다.

“저 밖을 보라는 말이야.”

지휘부에 뚫린 창으로 성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우리 프랑스인의 땅으로 보이나?”

“…아닙니다.”

고려의 갑옷들이 보이고, 고려의 식량들이 보이고, 고려말들이 들려왔다.

장을 비롯한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 대부분은 이 상황에서 극도의 찝찝함을 느끼는 듯했다.

“또한 우리의 친애하는 기사단장께서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지.”

장은 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의 나이답지 않게 초조해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질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신색을 가다듬었다.

“분명히 어떠한 거래조건이 있었기에 이런 원군이 여기로 온 것이 분명하지만….”

장은 덧붙였다.

“나는 이 상황 자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와 교황 성하에 반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드는군.”

“하지만 마티외 주교께서….”

일부 기사들이 항명했다.

“그만!”

― 쿵!

장은 바닥을 내리쳤다.

“명심하게! 만약 기사단장께서… 아니 그녀가 정말로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했으면 그녀의 법적 지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까!”

이곳은 애초에 교황으로부터 임명받은 그들의 영지였다.

‘교만스런 놈.’

에티엔은 장을 바라보았다.

잔을 대리해서 전권을 위임받은 자신의 동료는 마침내 자신만의 야망을 개화한 모양.

‘일궈온 영지가 박살 난 것이 그렇게 한스럽던가?’

그의 영지 생트라이유가 건설되자마자 아즈텍에 의해 짓밟힌 것은 에티엔 또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의를 꿈꾸는 것은 옳지 않았다.

교황에 의해 임명받았지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까닭은 엄연히 그녀 덕분이 아닌가?

장은 중재자였지 지도자는 아니었다.

에티엔과 질 또한 유능한 장군이었지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승리의 성녀가 그들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잔의 등장 전까지, 프랑스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으니까.

그러니 이 영역은 순전히 그녀의 공이었다.

장은 계속 입을 열어 말했다.

“여러분께 두 가지 제안을 하리다.”

그는 손을 꼽았다.

“첫째. 다시금 우리의 조국,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

그 말에 기사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 선택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당연한 소리.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물론 화려한 문명과 비옥한 땅, 그리고 이웃들은 존재하겠지.

그러나 ‘그들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으로 내쫓긴 사람들은 승계 서열에서 멀어진 자들이거나 가문의 문제아로 찍힌 사람들.

혹은 방계와 사생아들.

귀족이라는 지위가 영토에서 근원되는 만큼,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은 자신만의 땅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두 번째,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

충격적인 말에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어디로 말입니까?”

옆 동네는 이미 진작 고려의 품으로 귀속되었다.

지금은 미쳐버렸다는 갈리시아의 엔리케가 저지른 실정으로 인해 카스티야 출신의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 땅을 고려에 가져다 바쳤다.

그러니 가려면 동쪽을 제외한 곳을 가야 했다.

“북쪽.”

장은 지도에 그려진 거대하고 긴 강을 가리켰다.

“이 근처 원주민들의 언어로 이 강은 미시시피라 불리우지.”

“…….”

“이 강을 따라 북진하는 것이오.”

기사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겼다.

장은 그들을 보며 덧붙였다.

“이 땅은 어쩔 수 없소. 탐욕스러운 고려가 말도 안 되는 돌 쪼가리로 영유권을 주장한 이상, 우리는 그들과 예정된 충돌을 벌여야 할 운명에 처했지. 그리고 그들이 베푼 갚을 수 없는 이 채무 관계는 목줄이 되어 우리 스스로를 구속하겠지.”

기사들은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저런 더러운 야만인들을 우리가 상대할 필요는 없소. 고려가 이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틈을 타, 우리는 다시 진정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북부에 건설하면 되니까.”

장은 계속 말했다.

“유럽의 소식에 따르면 저들은 압도적으로 강력한 함대를 가지고 있다 하오. 그들의 육군 또한 강력하다 들었으나 우리가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그 대단한 육군도 우리를 정복한다는 일념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이 드넓은 땅을 가로질러 올 수는 없을 게요.”

미시시피강을 따라 몇 번 탐사대를 보내 본 장은 이 땅의 규모가 상상외로 지극히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를 통하지 않는다면, 병력이 오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기사들은 제각기 논쟁을 벌였다.

사방에서 들리는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정작 이 제안을 발의한 장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가 찬 에티엔이 다가가 말했다.

“음흉한 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었나?”

“…라 이르.”

“그 좆같은 별명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화를 잘 내는 에티엔을 비꼬아 붙인 별명, 라 이르는 항상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꽃과도 같았다.

“그대는 정했는가?”

“이 논의는 적어도 당사자가 오기 전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에티엔이 씹어댈 듯 말했다.

장은 덤덤한 눈으로 같은 가스코뉴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우를 바라보았다.

둘 다 후대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한미한 귀족 출신.

동향 출신에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함께했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그들은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멧돼지는 그 불같고 난폭한 성정과는 달리 의외로 충직한 면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초조한 목소리, 질의 끼어듦이 있었지만 장과 에티엔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갈등을 깨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 뿌우우

배를 발견했다는 신호.

드디어 이곳의 주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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