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주의 이야기
1442년 4월.
누벨 오를레앙.
고려로 떠난 기사단장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었다.
잔이 저 이교도의 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갔던 이후부터 질 드 몽모랑시 라발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불안하다.’
질은 밤마다 악몽을 꾸며 괴로워했다.
꿈에서 그가 경외하는, 그리고 경외하다 못해 사랑하는 그녀는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빌어먹을!”
질의 표정과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평소 그와 투닥거리던 에티엔 또한 그를 슬그머니 피해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건드리면 터질 화약과도 같았다.
비열한 고려 놈들, 대체 그녀를 어찌하고 있단 말인가?
질은 식량을 싣고 오는 배에게도 성질을 부리려 했으나, 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고려가 아니라 저 멀리 카디스에서 온 한 척의 배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동봉되어 왔다.
“뭐라고?”
교황청에 대한 이야기들.
꽤 오랜만의 연락 서신이지만, 마티외 주교가 써 보낸 그 편지에는 차마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교황청의 만행들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교황청이 저지른 탐욕 섞인 비행들, 일어나고 있는 종교개혁, 그리고 마티외가 만들려고 하는 성공회의 청사진에 대한 이야기와 옛 전우들에 대한 설득.
그리고 잔이 펠릭스 5세에 의해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이 어마어마한 소식에 누벨 오를레앙의 여론은 순식간에 둘로 쪼개졌다.
“성하께서는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 편지에 쓰인 것들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 자신이 보고 듣지 못했으니, 교황은 여전히 무류하다.
당연스럽게 전 카톨릭 세계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는 이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그 긴 세월을 같이 있던 마티외 주교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잘 지어낸 거짓말을 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누벨 오를레앙에서 같이 살아오면서 보았던 마티외 주교의 개인적인 성품을 아는 자들은 이 편지를 받고 동요했다.
예전부터 교회가 그들을 자주 등쳐먹은 것이 사실 아닌가?
게다가 이 면죄부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라, 읽는 이들도 분개할 정도였다.
따라서 잔 다르크에 의해 뭉쳤던 프랑스 기사들은 거의 둘로 정확히 나뉘었다.
52대 48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 갈등은 비단 일반적인 기사단의 구성원이 아니라 정책을 집행하는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들은 그래도 대체로 교황청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백년 전쟁이 끝날 때, 일방적 손해를 보았던 잉글랜드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일방적 혜택을 받긴 했으니까.
잔 다르크를 대리하고 있던 장 포통 드 생트라이유는 분열되고 있는 집단을 통합하기 위해 갈등을 조장할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원체 성정부터 신앙심이 깊었고 교황청에 대한 믿음과 동경이 강했기에 마티외의 서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의외로 에티엔은 마티외의 말을 믿었다.
“흥, 애초부터 성직자란 놈들도 어중이떠중이가 많지. 그동안 허리를 함부로 놀리고 뒷구멍으로 돈을 챙기는 족속들을 한두 명 보았나? 유구한 역사 동안 교황 성하들께서도 정부를 들이고 사생아를 깠는데.”
에티엔이 이죽거렸다.
“따지고 보면 이번 ‘면죄부’ 사건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더 신뢰할 뿐이야. 마티외 주교께선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니.”
에티엔은 적어도 그가 곁에서 봐 왔던 마티외의 미덕들을 신뢰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논쟁을 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죽을 뻔했다고?’
불에 타 죽을 뻔했다고?
그 교황이라는 빌어 처먹을 늙은이에게?
다행스럽게 지금은 무사한 모양.
그러나 마치 가슴 위에 큰 돌덩어리가 떨어져 진한 타박상을 남긴 것처럼 그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죽을 뻔할 때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질은 자괴감과 불안감에 편지를 배달한 심부름꾼을 탈탈 털었다.
“대체 언제 오신다 하더냐?”
“…저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강력한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대롱거리던 심부름꾼이 질의 일그러진 얼굴 앞에서 차마 소리치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젠장!”
그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리자 질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 * *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던 서쪽에서 갑자기 몇 명의 무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정찰병으로 보이는 자들.
하지만 그자들이 아즈텍 특유의 갑주를 입고 있으면 이야기는 달랐다.
아즈텍인들은 초기 철기시대에 걸맞는 자신들의 갑주를 만들어 착용하고 있었다.
아즈텍의 정예들, 독수리 전사와 재규어 전사들은 이제 틀라우이스틀리(tlahuiztli, 전신 면복)를 입지 않았다.
대신 전사들은 대부분 면으로 된 에우아틀(ehuatl, 아즈텍의 튜닉)과 이츠카우이필리(ichcahuipilli, 조끼 형식의 갑옷)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예전과는 달랐다.
갑옷은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독특했다.
예부터 직조기술이 꽤나 발전한 아즈텍답게 의복은 나름대로의 형식이 있었다.
에우아틀 상의를 착용한 뒤, 치마와 같은 하의를 착용한다.
그 위에 얇은 철판을 실로 단단히 엮어 만든 미늘 이츠카우이필리를 걸친 후, 허리띠를 차 갑주와 안의 옷이 따로 놀지 않게 고정시킨다.
본래 이츠카우이필리는 에우아틀 밑에 입기도 했으나, 이제는 쇳독을 예방하기 위해 위에 걸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신분이 높은 자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튜닉, 쉬콜리(Xicolli) 위에다 미늘 이츠카우이필리를 걸쳐 입기도 했다.
미늘 찰갑은 문명의 수준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 세계 숱한 곳에서 등장했던 만큼, 아즈텍 또한 기본적인 초기철기 갑주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혹은 고려의 영향을 받았던 마야가 아즈텍의 침략을 남쪽에서 격퇴했을 때 그들의 찰갑 복식을 보고 뭐라도 배운 것이 있을 수도.
야금술의 한계로 아직 강도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지만, 미늘 이츠카우이필리 또한 엄연히 철제 방어구였다.
철제 방어구는 그 자체의 기본적인 방어력이 골재와 목재, 그리고 기존의 천 방어구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수를 차지하는 일반 보병들은 겨우 성기만 가릴 정도의 멕스틀라틀(maxtlatl, 기저귀와 비슷한 의복)만 입고 있었다.
그러나 정예병과 일반병의 현격한 차이는 세계 어딜 가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항이기에, 딱히 그들만의 약점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직 소수의 정병들이 치르는 것이고 나머지는 머릿수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의 갑주 때문이 아니었다.
철갑주와 철창은 이미 그들이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아즈텍이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저 모습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러나 저 익숙한 놈들이 익숙한 동물을 타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프랑스인들도 이 땅에 말이란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까진.
“이런 미친.”
누벨 오를레앙 왼쪽에 있었던 그들의 영지, 생트라이유가 저들에게 함락당하면서 마구간에 있던 말들을 가져간 모양.
그 수는 별로 많지가 않았으나, 이 넓은 대지는 말과 같은 짐승들을 방목하기에 무척이나 좋아 금방 그 수가 불어날 것이 뻔했다.
저런 정찰병부터 말을 타고 있으니, 이미 어느 정도는 번식에 성공한 것인가.
누벨 오를레앙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그리고 다시 지긋지긋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천연 해자라 볼 수 있는 아차팔라야강 너머에 있던 자들은 카누를 타고 도하해 누벨 오를레앙을 위협했다.
틈날 때마다 보강을 거듭하여 이제는 상당히 높고 험준한 요새를 억지로 큰 희생을 안고 공성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바깥에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 공격당했다.
잠잠해진 틈을 타 파종했던 들판은 다시금 그들에 의해 짓밟히고 불태워졌다.
장은 불타고 있는 들판을 바라보며 비명 섞인 분노를 터트렸다.
“이 야만인 놈들!”
그동안 고려의 지원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장은 어쩐지 자꾸만 길들여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 낯선 이를 향해 으르렁거렸던 덩치 큰 개도, 자꾸만 고깃덩어리를 주는 그 낯선 이에게 어느 순간부터 침을 질질 흘리다가 결국 꼬리를 흔들게 되는 거지.
기사단국은 단순한 기사단에서 나아가 엄연히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집단이다.
구성원 모두가 다 인내와 용맹, 긍지를 갖춘 기사는 아니라는 말.
당연한 소리겠지만 일반적인 백성들, 즉 프랑스에서부터 자의로 타의로 온 자들이 인구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강제로 카스티야에서 끌려온 화주, 옛 누에바 갈리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누벨 오를레앙의 백성들은 항상, 특정한 시간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일과가 있었다.
그날, 혹은 그다음 날에 저 지평선 너머에서 밀가루를 실은 배가 오기 때문이었다.
빵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프랑스인들은 더더욱.
장은 이 학습된 의존성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다시 시간이 지나고, 재개된 공세에 피로가 누적된 누벨 오를레앙의 주민들에게 호재가 다가왔다.
이번에 누벨 오를레앙의 항구에 기항한 정기선에는 식량뿐만이 아니라, 일단의 무리들도 동승해 있었다.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들.
가슴에 다소 특이한 문양을 그려 넣은 이자들은, 꽤나 커다란 구슬로 된 염주를 들고 괴상한 복식을 하고 있었다.
승려의 가사(袈裟) 대신 갑주를 입은 만자군이 그들이었다.
“…….”
“…….”
기사들과 무승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이교도의 승려들마저 자유롭게 이곳에 쏘다니게 되었구나!’
“크흠….”
대다수 기사들은 몹시 분개했다.
하지만 일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정신을 사납게 하는 아즈텍인들에 의해 스멀스멀 감기기 시작하는 눈꺼풀 때문에 저 승려들이 아주 약간은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
승려들도 이 상황을 절대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즈텍이란 놈들은 불가의 본래 교리와 상당히 멀어진 그들로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그들의 살육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라는 자들 또한 계도할 가치도, 계도할 수도 없는 무뢰배들인 것은 같으니… 시중의 뜻을 참으로 모르겠구나.’
“나무아미타불….”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기사들은 몹시 이질적인 이교도들을 쉽사리 성 바깥으로 내쫓지 못했다.
받아먹은 것이 얼만데.
게다가 누벨 오를레앙 또한 계속 밖에서 경작을 시도하는 장에 의해 알게 모르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기에 방어 병력은 조금 필요했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기 위해, 성의 한 구역을 점거하던 이 무승들은 어느 날 큰 실적을 올렸다.
누벨 오를레앙 동쪽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 억지로 가용 인원들을 긁어모은 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이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아즈텍인들은 야음을 틈타 높은 성벽 너머로부터가 아닌 바다로부터 카누를 타고 몰려들었다.
항구까지 방어시설이 증축되지는 않았기에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위기였다.
난전으로 바뀐다면 아무래도 기사와 병사들 또한 큰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 또한.
하지만 만자군의 무승들은 그 좁은 곳에서도 능숙하게 아즈텍인들을 제압했다.
애초에 무승들은 일반적인 군대처럼 집단과 집단 간의 전투를 준비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반대로 개인적 수련이 일상화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런 혼전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빛났다.
물론 머리로가 아닌 손으로.
― 퍼억
무승의 곤봉에 맞은 독수리 전사의 얼굴이 함몰되었다.
나무로 깎은 투구가 박살 나고, 꽂힌 장식용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자 잔당들은 도망쳤다.
적들이 즉각 공세를 중지하는 것을 보면 꽤나 지위가 높은 지휘관이었던 모양.
그날의 공세는 그렇게 만자군의 활약으로 끝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