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9화 (149/653)

정북행성

1443년 3월의 일이었다.

시중이 황상에게 표문(表文)을 올리었다.

이는 후대에 북려출사표(北麗出師表)라 칭해졌다.

[천신(賤臣)이 삼가 아뢰옵니다.

본디 태조 대제께서 이 땅에 창업하신 것은 실로 하늘의 내린 만세의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아무것도 심어지지 토지에 하늘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지 않은 이곳에 아국은 오직 사만 명의 인원으로 시작하여 오로지 선제들의 위대함과 신민들의 일치단결로 만년토록 번영할 문명을 세웠습니다.

지난 150년간, 고려는 팽창과 번영 일로를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분열된 우리의 형제들을 다시금 한 지붕 밑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우리는 비옥한 땅을 이용하여 기근이라는 공포를 물리쳤으며 또한 질병의 위험을 극복했습니다.

아국의 영토는 대동양에서 태평양을 이었으며, 저 태동산맥 또한 우리의 등줄기가 되었습니다.

창강과 광하에서는 수많은 선박이 오가고 있으며, 또한 바다에서도 우리의 함대가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우리는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드높고 험준한 산악에서 우리에게 맞서온 타완틴수유는 그 간사하고 끈질긴 성정으로 오랫동안 아국의 후환이라 칭할 수 있었으나, 친정하신 선제 폐하의 공덕으로 인해 이제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되었으며 잔인한 왕조 아래 핍박받던 신민들은 우리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그 뒤, 유럽이 아국을 침략했습니다.

종교란 미명 아래 스스로의 눈이 먼 것을 인지하지 못한 저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예주에 마련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형언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죗값을 물었으나, 이는 그들이 저지른 짓에 비하면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대양 팽창 야욕은 저지되었고 왕가는 분열되었으며 종교 또한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감히 소신이 입을 열어 말한다면, 우리의 시대가 이제 눈앞에 왔습니다.

하오나 이 고려는 지금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필히 몸을 다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혁신은 영원토록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갈등하고 있으나, 그 갈등이 끝난 이후에는 각성할 것입니다.

저들은 패배하였으나, 그 패배로 어떤 것을 알아차릴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운명에 처해졌을 구대륙의 옛 땅은 이제 숨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 넓은 땅과 그 엄청난 인구 그리고 그들의 왕조가 가지는 시간적 여유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이 천신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채, 불안함에 몸을 웅크리고 떨어야 할 뿐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아국은 오로지 조금의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대동양의 방벽은 우리의 함대가 지키는 한, 넓고 견고할 것이지만 그 방벽은 항상 도전받을 것입니다.

폐하.

망측한 말이지만 고려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당금의 고려는 부강해졌으나, 강력하지 못하고, 뻗어가는 것에 막힘이 있으며, 또한 다스리는 것에 한계가 있사옵니다.

서북으로는 우리의 팽창을 저지할 거대한 산악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압도적으로 넓으며 뜨겁고 습한 열대의 밀림이 펼쳐져 있습니다.

동과 서를 오가는 항로 또한 우리의 남쪽에 있는바. 우리는 이 제국을 정녕 효율적으로 다스리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황상 폐하.

소신이 감히 생각하건대 남려는 천자의 기운을 품고 있는 땅이옵니다.

남려를 아국이 온전히 손에 넣는다면, 세상 어떤 나라가 감히 아국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역대 번성한 중원의 황조도, 저 옛날에 있던 로마의 황실도, 그리고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몽골의 카간도 우리의 위세에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오나 폐하.

소신은 감히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사옵니다.

만약 황상께서 북려 또한 손안에 거머쥐실 수 있다면, 세상은 또다시 바뀔 것입니다.

남려만큼이나 북려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는 곳입니다.

저 땅의 잠재력은 마치 창수의 대평원과 같아, 그곳에 터를 잡는다면 수천만 명의 신민들이 수억 명의 신민을 먹여 살릴 곡식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수천, 수만 척의 배를 운용할 나무를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기술의 진보에 어울리는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땅일 것입니다.

삼가 이는 이 땅 최고 제국의 영토라 할 수 있으니.

두 땅을 모두 온전히 아국의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사해와 사방은 우리의 위명과 우리의 찬란함에 압도당할 것이고, 또한 우리의 위대함을 대대손손 경배할 것입니다.

폐하.

오직 강력한 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고결한 가치관과, 아름다운 문명과, 또한 경이로운 혁신들을 이 세상에 널리 퍼트려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에 걸맞은 압도적인 강함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황상 폐하.

중려의 백성들이 거대한 악에 의해 슬픔과 비통에 젖어 울부짖고 있나이다.

또한 아국의 품으로 들어올 백성들 또한 그 동일한 악에 의해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땅의 신민들은 황상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떠한 피부색을 가졌는지, 어떠한 외모를 하고 있는지 어떠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명들의 보편적인 도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차별 없이 흡수하여 안온한 삶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먼저 살고 있던 자들에 대한 예우기도 했으며.

먼 곳에서부터 개척지에 억지로 끌려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동정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제국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들 또한, 우리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허나 분명히 현 고려는 원정을 나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학질은 조금씩 정복되고 있으나 황열은 그렇지 아니하고,

아국이 이제껏 치러온 큰 규모의 정벌이 최근이었기도 하였고.

또한 막 정복된 곳의 백성들을 온전히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항구적인 병력이 주둔해야 함을 소신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파견된 병력은 실로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소신은 감히 마지막으로 황상께 간청하옵니다.

소신이 북려로 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폐하.

그리하여 북려라는 여의주를 손에 넣으소서.]

황상께서는 서신을 보시고는 용루를 흘리시며 시중의 북려행을 승인하셨다 한다.

국정을 대리할 자는 내무상서 이도였으며 황제의 장인이 시중의 전권을 대리할 상서령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반대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중략…….

시중의 일행들은 상당히 많았다.

정북등처행삼서성(征北等處行三書省, 정북행성이라 불렸다.)은 북려 3주(미주, 앙주, 화주)의 중앙, 앙주에 설치될 것이기에 시중은 그곳의 지배자인 잔 1세 그리고 그녀의 남편 정원후 해우석의 일행과 동행했다.

수행원들의 규모 또한 적지 않았으며, 시중이 관할하고 있는 청해의 인원들 또한 많은 수가 앙주로 향했다.

[예종실록]

* * *

북려로 떠나는 여정길.

바다를 달리고 있는 새벽호의 위에서 상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먼 후손을 바라보았다.

우석은 온몸이 밧줄에 포박된 채 꿇어 앉혀져 있었다.

“읍 읍!”

신원을 알 수 없게 옷가지를 모두 벗겨버린 탓에 알몸이 되어버린 우석이 꿈틀거리자, 근위군이 그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감정이 실린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근위군은 이제는 꽤 승진해 고려군 정교의 지위를 차지한 김안섭이었다.

침이라도 뱉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복수할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는 것 자체로 감사할 일이라, 그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우석의 발에 묶여 있는 무거운 추를 점검했다.

상민은 달빛 아래 파도치는 바닷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친족을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너는 망설임이 없었느냐.”

안섭은 시중의 말을 듣고는 우석의 입에 물린 재갈을 거칠게 풀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 않소이까! 그리고 분명히 두 가지 일을 해 준다면 살려 준다고 하였거늘!”

상민은 대답하지 않고 마치 심문하는 투로 그의 말을 이어갔다.

“피를 뿌리고, 물고기에 뜯어먹히게 하라 했었다지?”

우석은 거칠게 저항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족이요, 두 마리 용의 피가 흐르는 지고한 존재이다! 그대가 제아무리 시중이라고 한들, 감히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고귀함에 비할 바는 아니니!”

여봐라! 어서 이것을 풀지 못할까!

우석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갑판 위의 사람들 중에서 그에게 시선을 돌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민은 그 추한 행동에 힘줄과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꽉 주먹을 쥐었다.

그래, 두 마리 용의 후손.

그것 때문에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우석 또한 진작에 기택처럼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화가 났다.

이런 놈에게 자신과 왕예의 피가 흐른다고?

상민이 천천히 우석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너 같은 놈을 후손으로 둔 적이 없다.”

뜻 모를 말에 우석이 채 의문을 표하기도 전, 상민이 가면을 벗었다.

드러나는 얼굴.

강인함과 단단함이 어우러진 얼굴은, 분명히 미청년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마치 흉신악살과도 같았다.

우석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저항의 욕구가 거세된 듯 기가 질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마치 끓어오르는 듯 떨고 있었다.

“똑같이 해 주는 것이 도리겠지.”

씹어뱉듯 말한 상민이 뒤에 서 있는 안섭에게 명했다.

“아킬레스건, 아니 발뒤꿈치의 힘줄을 잘라 행여 헤엄칠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하라.”

안섭은 놀란 얼굴로 흘깃 시중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추가적인 지시는 따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며 도를 뽑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우석에게 접근할수록 차츰 가셔졌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안섭은 우석의 재갈을 다시 물렸다.

“네놈이 범할 뻔한 근위군의 아낙이 바로 내 아내거든.”

― 스릉

“끄흐흑…!”

발뒤꿈치의 힘줄이 베이자, 우석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안섭은 분노가 뒤섞인 힘으로 그 무거운 추를 다리에 달고 있는 우석을 질질 끌고 배의 귀퉁이로 향했다.

― 풍덩

그리고 마침내 깊고 푸른 바다에 던졌다.

달이 떠도 아직은 어두컴컴한 밤이라, 비참하게 죽어가는 꼴을 자세히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

안섭은 후련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조금의 시간 뒤에는 약간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잠깐만.’

왕시해자.

아니, 후의 위계였으니 후시해자라 불러야 할까.

명에 따랐다 하더라도 어찌 되었든 고위 황족의 피를 손에 묻힌 안섭이 슬그머니 시중의 눈치를 보았다.

“…….”

그러나 상민은 망망대해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 손으로 먼 손주를 죽인 상민은 어떠한 후회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친족을 해했다는 감정보다도, 그들이 자칫했으면 무고한 친족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컸으니.

결자해지겠지.

상민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우석의 신원부를 바라보았다.

고위 황족을 뜻하는 옥의 패에는 두 마리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늬가 양각되어 있었다.

재질은 마야산 특등 경옥이 분명했다.

장신구로서 옥, 예를 들면 옥비녀나 옥반지는 일반 사람들도 금전적 여유가 허락되는 한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옥으로 된 신원부는 그렇지 못했다.

신원부의 재질이 규정된 이후에는 오로지 황족들만이 이런 옥패를 패용할 수 있었으니까.

지체 높은 관리나 부유한 상인들은 적강목 신원부에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것의 귀함은 재질의 문제가 아니다.

황실의 계보도는 종통에 가까워질수록 철저하게 관리된다.

황제의 팔촌이라는 신분은 자신도 어떻게 함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물론 먼 방계를 국서로 임명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군왕위를 임명하며 만들었던 여러 가지 원칙들을 처음부터 스스로 위반하는 셈이 된다.

상민은 옥의 신원부를 한동안 만지작거리다 이윽고 품에 넣었다.

해우석이라.

그는 이름을 곱씹었다.

이제는 나름대로 익숙해져야겠지.

나무에게서 잘라낸 썩은 가지.

가끔은 그 가지로도 유용한 것을 만들 수는 있는 모양이다.

* * *

정북등처행삼서성.

줄여서 정북행성.

정동행성은 옛 고려의 트라우마겠지만, 지금의 고려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저 기구를 설치하고 관직을 내림에 있어 잡음은 별로 없었다.

정북행성은 북려의 3주를 대리 통솔할 권한을 갖는다.

미주와 화주의 주지사는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이고, 앙주의 여왕 또한 어느 정도의 존중을 해야 할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후자는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 당사자는 오늘도 내일도, 그의 곁에 꼭 달라붙어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아주 당연하게도 이곳 누벨 오를레앙에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지평선에 몰려오는 대대적인 규모의 고려 무리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 선두에는 뜬금없이 성녀에서 여왕으로 변한 그들의 그랜드 마스터가 있었다.

그것도 서서히 배가 불러오는 것이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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