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8화 (148/653)

Commonwealth

― 끼이익

중죄인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은 쥐 한 마리도 가볍게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엄중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우석은 어느 날 뜬금없이 석방되었다.

저지르려 한 죄가 있기에, 이렇게 쉽게는 석방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손목을 쓰다듬으며 감옥의 바깥으로 나왔다.

자신과 일을 꾸미던 자들은 모두 죽었단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심지어 기택까지.

자신과 동일한 신분인 황족까지 가차 없이 죽일 수 있으면서, 왜 자신은 이렇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을 풀지 못했던 우석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거의 역모나 다름없는 황족의 죄를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 권세가 대단한 자.

우석은 그럴 수 있는 자가 시중을 제외하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는 두 가지 일을 하면 된다.”

감옥에 찾아온 의문의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풀어주는 대가로 요구받은 것은 약간 의아한 것.

“그대는 고려에 귀화할 유럽인 여성과 약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다요?”

“그리고 세습 국왕의 자리에 오를 그대의 아내와 함께, 국서(國壻, 여군주의 남편)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국서가 뭐요?”

동양에선 여성이 보위에 오르는 것이 흔하지 않았다.

태후나 황후가 실권을 잡은 것은 꽤 많았으나 엄연히 핏줄 자체는 부계로 이어졌다.

이것은 여태껏 고려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여왕의 남편이라는 국서의 개념을 의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의 몇 개 국가도 살리카법의 재발굴 이후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긴 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크의 후예, 프랑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상황 자체가 조금은 모순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 결국 외국 승계법의 차용은 상민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었다.

“여왕의 옛 지위에 따라 군주의 권한은 오롯이 여왕에게 귀속될 것이다. 또한 그대와 여왕의 자식들은 해씨의 피가 흐를 것이나 여왕 가문의 이름을 따를 것이니 그대는 단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해주면 된다.”

우석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나보고 지금 내 후사의 성을 근본도 없는 유럽인의 성으로 하라는 것이오? 그리고 뒷방 늙은이가 되라고?”

“혹은 역모의 수괴로 목이 잘린 뒤 장대에 꽂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전달자는 전혀 감흥조차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우석은 삽시간에 얼굴의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제 목숨 소중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개똥밭도 이승이 나은 것이 당연했다.

* * *

그래서 우석은 생전 처음 보는 성공회의 성당(교회의 정식 이름이었다)에서 생전 처음 보는 프랑스 여인과 약혼을 올려야만 했다.

청해의 성공회 대성당은, 프랑스 랭스 대성당을 모방하여 건축하고 있는 고려의 걸작품 중 하나였다.

고딕 양식이 돋보이는 정면의 두 탑과 십자 모양의 신랑(Nave)과 수랑(Transept)이 교차되는 지점에 세워진 첨탑(Flèche)의 높이는 이제껏 고려에 지어진 건축물 중 해문의 해룡사에 지어진 9층탑 다음으로 높은 높이를 자랑하게 될 것이었다.

비록 건설 중이었으나 회랑은 전부 지어진 상황. 예식을 하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이 넓은 곳에 들어찬 수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혼약을 맹세한 우석은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듯한 이 진행속도에 의문을 가졌으나, 이윽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왕이 될 사람을 바라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쁘지 않다. 과연 나쁘지 않아.’

잔은 예식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고 있지 않았지만, 우석은 계속하여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참이었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국적인 미녀를 아내로 삼기까지 하는구나.’

어쩌면 여왕의 남편이라는 자리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수만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그는 예식이 끝나고 아내이자 여왕이 될 자와 따로 만남을 가지려 시도했으나 곧바로 저지당했다.

“영공 전하께서는 대관식 직전까지 운신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 부부는 어떠한 교류도 없이 헤어졌고 우석은 다시금 엄중한 감시의 눈길 아래 모처로 끌려가 한동안 다시 연금당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일한 장소에서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파주와 미주, 화주와 기주. 이 4개 주의 군왕에 대한 대관식은 이미 끝나 있었고 오로지 누벨 오를레앙만이 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누벨 오를레앙은 앞선 네 주와는 처지가 확연히 달랐다.

영토(과거 분쟁의 여지는 있었지만)와 백성들을 가지고 있던 외부의 국가가 스스로 복속을 청하는 절차였던 것이다.

물론 그 규모는 몹시 작았으나 상징성은 충분히 있었고.

고려 황실과 조정에서도 이 사건을 권위를 높이는 것에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개척지에 군왕을 파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그들의 지도자를 고려의 봉신으로 임명하는 절차였기에 그녀가 가질 권한은 다른 친왕들, 그리고 군왕들과는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독립 봉신국가인 마야가 가장 비슷하겠지.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마야가 즉위식을 이곳 청해까지 와서 하진 않았다.

누벨 오를레앙은 독특한 운명을 맞이했다.

“짐은 고려의 천자로서 아르크의 잔을 적법한 앙주(央州, Angju, 누벨 오를레앙의 정식 국호)의 여왕으로 인정하니, 맡은 영역을 수호하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것을 종용하는 바이다.”

그 출신 문화의 예법을 존중하여 해광은 도성에서 직접 청해에 행차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

북쪽에는 마땅한 성당이 없어 이렇게 했다지만, 사실 이곳 고려의 땅에서 즉위식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누벨 오를레앙은 국가의 권위 중 상당 부분을 고려에서 의지하게 되는 셈이니까.

해광은 마티외에게서 금관을 받아 들어 그녀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예복을 입고 있는 여인은 무릎을 꿇은 것을 펴고 계단 밑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앙왕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많은 부분은 바람잡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군중은 천세를 연호하며 제국의 일원이 된 그녀의 행운을 빌었다.

동레미 출신의 시골 소녀가 드디어 한 국가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한 걸음 물러난 해광과 그 옆에 서 있던 상민은 흡족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저 여왕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자는 끔찍한 일을 꾀한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었지만.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으니 상관하지 말도록 하자.

‘보기에 나쁘지 않다.’

제국(帝國)이라 함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뜻한다.

하지만 국가적 의미로서의 제국은 한 국가가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나라의 구성원에게까지 통치권을 확장하는 체제를 가리켰다.

물론 그동안 고려는 수많은 외부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제국이라 칭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으나 이 외부인들은 따지고 보면 현격한 문화적 차이에 의해 곧바로 흡수되는 야인 부락들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가장 큰 집단은 최근의 타완틴수유밖에 없었지. 그리고 이제 동화기를 거쳐 내방이 될 것이었고.

그러니 이 연방제국은 사방의 군왕들과 여왕을 임명한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틀이 잡히는 것 같았다.

상민이 설계하는 이 국가와 국가 간의 연합은 중원의 천조가 거듭하여 되풀이하는 잘못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의장이며 부국(父國 아버지의 국가)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나,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진 못할 것이다.

자국(子國 아들들의 국가)들은 연방의 회의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낼 것이고 부족한 점과 불만을 아버지에게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피로써 서로 뭉쳐 있기에 식민지와 본국 이상으로 서로를 긴밀히 여길 것이었다.

제후국을 짓누르며 위엄을 펼치려던 중원의 황조들.

그러나 그들은 제후국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론을 수집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제후국을 천명에 대한 잠재적 경쟁자 혹은 위엄을 세워 공포로 짓눌러야 하는 존재로밖에 인식하지 않았기에.

개척지에 자유를 준 대영제국.

그러나 그 개척지는 결국 반기를 들고, 새롭고 거대한 공화국을 세워 독립을 쟁취해냈다.

그들 또한 식민지를 단순히 착취해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기에.

하지만 연방제국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다.

상민은 그렇게 선포했다.

비록 역경이 있을지언정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고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인 착취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여론은 황제가 직접 들을 것이며 수렴하여 연방의 정책에 반영할 것이다.

우리는 외적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이며, 여러 재난에도 서로를 최대한으로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같은 말과 같은 통화를 쓸 것이며 최대한 비슷한 문화를 서로 유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이익(Commonwealth)을 수호하리라.

해광 또한 자신의 선조가 이것으로만 끝내려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떠나시겠지요?”

“국구(國舅, 황제의 장인, 이도)께서는 유능하며 청렴하니, 뭇 대신들 또한 등용을 그리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외척의 등용에 대한 전례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옵니다.”

“하하. 황상 폐하. 저라는 전례 또한 딱히 건전한 것은 아니옵니다.”

상민은 껄껄 웃었다.

웃고 있기는 한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종신 독재자라.

결국 어느 순간부터 신하들은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 쳐진 벽에 대해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권력이란 결국 손에 쥐어야 하는 대상이니까.

또한 그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제국은 그가 없어진다면 크게 흔들릴 것이고.

마지막으로 그가 가진 일신의 능력이 과연 같은 세기의 천재들과 비교해 볼 때 우위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고.

‘나는 사실 수많은 거인들이 쌓아 올렸던 문명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참이니. 스스로가 거인이라고 느끼면 안 된다.’

자신은 재능이 있었다.

북려로 떠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계자, 혹은 창시자.

맞아. 프로건국러겠지.

상민은 스스로의 재능을 그렇게 인지했다.

백지에서부터 시스템을 갖추어 다른 사람들이 그 이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맨땅에 도시를 세우고, 도로를 건설하여 문명을 세우는 것.

현존하는 개척자 중 가장 뛰어난 선구자.

자신의 재능은 그곳에 있었다.

이미 거대해진 조직을 이끄는 것은 솔직한 말로 더 괜찮은 자들이 많았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관계에 능한 자.

혁신의 기운을 불러일으킬 자.

등용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쓸 자.

백성들을 자신 못지않게 아낄 자.

마치 이도와 같은 자들.

그렇다면 엄선된 천재를 제대로 육성하여 그들에게 재상의 지위를 주는 것이 어떨까.

상민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때를 접었다.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

“…그렇긴 하지요.”

해광은 상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손은 시중의 지위를 완전히 다른 자에게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할아버님의 후손으로 할아버님께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앙탈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구께서 세월의 흐름에 훙하신다면, 이 사람은 다시금 그 자리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해광은 확답을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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