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4)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흉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각기 수완은 있는 인물들이라 일견 허황되어 보였던 계획은 조금씩 앙상한 뼈 위에 그럴듯한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계획은 나름대로 치밀해졌다.
이 흉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고려는 건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을 겪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토의를 나누는 동안,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 자리에 있던 청기, 수연은 기택이 축객령을 내릴 때 주변의 무리들과 같이 빠져나왔다.
하지만 분위기와 대화 주제가 심상치 않았기에, 그녀는 내려오면서도 구석진 곳에 몸을 피해 사람들을 보낸 이후, 다시금 어물쩍 윗방 근처에서 머물렀다.
엿들으려 시도해볼까.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몇 초 지나지 않아 가로막혔다.
― 끼이익
쥐 상의 사내가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수연을 발견했다.
“네년은 무엇을 하는 게냐?”
수연은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곧이어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자신을 변호했다.
“제 거문고의 현이 끊어졌지 뭐예요?”
“…으음.”
사내는, 진짜로 그녀의 앞에 놓여 있는 거문고의 현 하나가 끊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청기는 자신의 악기들을 목숨과도 같이 여긴다고 하던데.
게다가 몹시 안타까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자신의 악기를 내려다보는 그 처연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홀려 사내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제아무리 법력 높은 스님이라 하더라도 저런 미녀의 눈물 앞에서는 부동심이 깨지고야 말리라.
쥐 상의 사내는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욕정이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을 자제했다.
이 문은 장지문이라, 문밖에 불청객이 있는 것은 썩 좋지 못했다.
“다만 빨리 해결하고 내려가거라.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참이니.”
그러나 청기의 사정을 어느 정도 헤아려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쥐 상의 사내가 그녀를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다시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뒤에 있어. 내가 엿들으려 하면 바로 들킬 거야.’
청기는 황급히 거문고 현을 뜯어버린 탓에 피가 줄줄 나는 엄지손가락의 끝을 흰 무명천으로 지혈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한동안 고민했다.
* * *
쥐 상의 사내는 잠시 뒤, 슬쩍 장지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없군.’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방들도 비어있는 모양.
뒤로 갈수록 노골적인 모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에 사내는 계속 문 바깥을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여인이 이곳에 귀를 기울인다면, 거사에 앞서 저년부터 자신들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제아무리 어여쁘고 재기 넘치는 청기라 한들.
목숨 소중한 것은 아는 모양이구나.
다소 다행스럽게 생각한 그가 방 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으신 분들이 억눌려 왔던 방광을 비우러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다 문득 바닥을 보니 사내는 무언가 긴 실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음?”
거문고의 현을 버리고 간 모양.
근데 거문고의 현이 저렇게 길었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은 사내의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한 번 그것을 무심하게 지나친 사내는 이윽고 뒷간을 다녀온 황족들이 다시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장지문을 다시 닫았다.
조금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끈이 조금씩 팽팽해졌다.
끈의 끝은 장지문과 연결되어 있었고 한쪽 끝은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 *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빛이 동쪽에서 다시금 떠오를 기미가 보일 때, 한 여인이 귀빈실에서 내려왔다.
오직 엄격한 소수만이 출입할 수 있는 최고 청기들의 탈의실.
내려온 여인과 비슷하게 아직 퇴근하지 못한 중년의 여인이 직접 널브러진 의복들과 청기들의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퇴근하는 것이냐?”
“네.”
수연은 그 방에서 나온 지 꽤 오래되었지만, 설화루의 주인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들고 내려온 거문고 술대를 자신의 옷장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 거문고의 첫 번째 현이 끊어졌어요.”
“알겠다. 조치하도록 하마.”
훌렁훌렁 옷을 벗고 빠르게 환복하는 그녀를 바라본 중년의 여인이 질문을 했다.
“부름차를 불러주랴?”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수연이 환복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작은 마차가 설화루 밖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 1~2인용 작은 마차는 말 두 마리와 마부 한 명이 끄는 마차인데, 가끔은 한 마리만 끄는 경우도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고는, 그 위에 이상한 표식이 올려져 있다는 것.
부름차라고 쓰여있는 저 팻말은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연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오셨소?”
기사가 다소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설화루의 기생들은 단골 부름차 조합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자체적으로 가격을 조금 더 지불하면서도 그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용역을 제공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녀린 여인들이다 보니 치안이나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더 면밀히 챙겨달라는 것이었다.
“네, 삼촌.”
기생과 마부는 꽤 독특한 관계였다.
조선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곳에서도 기생은 양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천하게 취급당했다.
마부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두 직업은 어떠한 유대감 비슷한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부의 딸 중 기생으로 들어가는 여인도 많았고 반대로 기생의 아버지들이 마부를 하는 것도 많았으니까.
“그럼 항상 같은 곳으로 모실까요?”
자신의 집이 있는 곳으로 익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려는 마부를 제지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추밀원으로 가주세요.”
“으음?”
마부는 재차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왜?
그러나 질문을 삼킨 그가 창양의 십부 거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통금 제한을 푸는 종이 친 것은 바로 전의 일.
다른 고관대작들의 마차보다 확연히 작은 마차는 꽤나 신속하게 창양의 새벽 거리를 내달렸다.
‘피곤하네.’
부름차가 자신이 요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청기가 마차 좌석에 기대었다.
기생들 사이에선 장난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거문고 현이나 그런 탄성 있는 실을 오목한 금속 그릇(주로 분이나 기타 화장품을 얇은 황동그릇이었다) 뒤에 홈을 내어 부착한 것.
그것을 끊어지지 않을 만큼 팽팽하게 유지시킨 뒤 오목한 금속 그릇에 대고 말을 하면, 꽤 먼 거리를 떨어져 있다 해도 어느 정도 알아듣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곳에 대고 가장 절친한 동료와 함께 남들이 듣지 말아야 할 욕들, 혹은 어디 가서 발설하지 못할 농밀한 소문들을 속살거리며 쌓인 나쁜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지.
수연이 그것을 떠올린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거문고 실을 풀어 장지문에 견고하게 묶었다.
장지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음판 역할을 하게 되니 청기는 나름대로 그들의 대화를 수집할 수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들은 여인의 목소리들보다 꽤나 잘 들리는 편.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일반적인 그릇과 실로 만든 장난감에 비해서는 소리가 다소 불규칙하고 불명확했지만 몇 가지 단어를 알아듣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
부름차가 추밀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급히 기록한 수첩을 들고 뛰다시피 내렸다.
대외적으로는 일반적인 조정의 건물에 불과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이곳이 고려 추밀원, 조금 더 정확하게는 정보총국의 총본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약간 회색빛의 건물은 그 특유의 업무만큼이나 칙칙하게 보였다.
애초에 일부러 저렇게 단순하게 건축했다던데.
단순한 외견에 더해 어쩐지 음울한 분위기까지 서려, 일반 백성들은 이곳에 잘 오가지 않았다.
그 업무의 특성상 24시간 동안 업무를 보는 자들의 한이 서려 있어서 그러한가.
이른 새벽에도 이곳 주변의 화로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들의 특성상 분명히 이제 막 출근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여기 있기 싫었어, 항상.’
물론 그녀의 외모가 실로 아름다웠기에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겠지만.
현장업무를 하는 자들이 책상업무를 싫어하는 것은 성별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황급히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청기를 제지한 추밀원 소속 병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쇼? 이곳은 오직 허락된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소.”
주변을 둘러본 청기가 품에서 청색 패를 꺼냈다.
청색의 나무 패 안에는 푸른 꽃이 새겨져 있었다.
병사는 청색 패를 확인한 이후, 확연히 달라진 어조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 * *
큰 연회의 날이다.
창강에선 거대하고 화려한 유람선들이 떠다녔다.
군왕위에 오를 후보자들을 대충 선별한 상민은 낚시를 하고 있는 해광과 해윤에게 가 그 사실을 알렸다.
“할아… 아니 시중이 결정 내린 대로 하시오.”
“알겠습니다.”
이 오랜만의 외유는 어떠한 잡음조차 없었다.
유람선 두 척은 무사히 처음 출발한 나루터로 도착했다.
친척들과 오랜만에 재회를 나눈 황상도, 그리고 종친들도 모두 만족했다.
특히나 해윤은 인치어(人齒魚, 파쿠)로 대표되는 큰 고기들을 몇 마리나 낚아 그중에서도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종친들이 주변에서 태상황을 치켜세우는 것이 보였다.
나루터에 도착한 그들은 강이 잘 보이는 해변에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게 한 뒤, 해광이 잡은 인치어를 요리했다.
민물고기인 만큼 그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진한 흙냄새가 있었지만, 그것은 황실의 숙수들에겐 별문제가 아니었다.
몇 번이나 해감을 하고 온갖 향신료로 냄새를 확실하게 잡은 인치어 매운탕이 종친들의 식탁에 나왔다.
이제는 익숙한 붉은 고춧가루가 무척이나 많이 들어간 이 매운탕은 실로 향수를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아 실로 고향의 맛이로구나.
상민은 별것도 아닌 것에 이렇게 감격을 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실제적 나이가 상당히 많아졌음을 실감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 상민을 제외하곤 비어있는(왜 비어있는진 얼마 전의 일로 주변에 살기를 뿌려대고 있는 당사자인 그만 몰랐다) 시중의 천막에 누군가 와 앉았다.
“시중을 뵙습니다.”
성종의 아들들은 지금 오직 세 명만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중 거동이 가능한 자는 두 명뿐이었는데 상민의 앞에서 방금의 말을 꺼낸 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연배가 많은 숙(肅)왕이었다.
평소 대나무가 질색할 정도로 강직하고 성품이 올곧았지.
그의 아들들 또한 그러한 아버지의 기질을 받아 청렴하고 모범적인 황족으로 꼽혔다.
이런 가지는 푸르고 단단하여, 보기에도 몹시 흐뭇했다.
그리고 겸양의 덕도 있단 말이야.
“제 미력한 자식들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왕작위를 두 자리나 차지하는 것이 실로 우려스러워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까 인사말도 비롯해 지금도 다소 어법이 이상하다.
무품의 왕들은 황상 다음으로 지고한 존재로 취급받아, 시중에 비해서도 오히려 위계가 높았다.
상민이 존대를 해야 할 판.
그러나 반대로 이 정도 위계의 친왕들은 자신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상민도 하대를 하고 있었으며, 숙왕은 오히려 주변의 시선이 없었다면 아마 절이라도 할 듯 보였다.
“길천공의 평소 성품이 뛰어나고 박학하며 애민하는 마음이 투철해 미주의 군왕으로 임명된 것은 상명공(온친왕의 옛 지위)이 온친왕이 된 일과는 독립적인 문제요.
후사를 뛰어나게 기른 그대의 공이니, 오히려 내 개인적으로 치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려.”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이 일은 이미 끝났으니 넘어갑시다.”
상민의 단호한 말에 숙왕이 주변을 살펴보다 깊게 고개를 숙여보았다.
이윽고 공손하게 일어나 뒷걸음질로 빠져나가려는 숙왕을 붙잡은 상민이 입을 열었다.
“종친부의 수장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숙왕은 현 종친부의 ‘명목상’ 수장이었다.
누가 실제적 수장인지는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하명하시옵소서.”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하는데, 그대와 정남공의 묵인이 필요하오.”
숙왕은 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인치어의 살을 발라내던 상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정남공을 어찌 설득해주시오. 그와 장남 정원후와의 관계는 거의 의절할 정도로 좋지 않다 들었으니. 어쩌면 그 또한 동조할지도 모르겠지.”
* * *
군왕의 지위에는 죄다 성품이 올곧고 야심이 없는 자들이 채워졌다.
뽑히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 서운하긴 했으나,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을 한 모양인지 덤덤하게 속으로 삼키는 것이 보였다.
마땅히 자리가 돌아갈 사람들에게 간 것이다.
게다가 군왕위가 저렇게 명목상에다 단일 봉작위에 불과하니, 소수는 외방에 나가 고생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뽑히지 않길 기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은 꽤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몇 가지 문제만 빼곤.
‘잡스러운 것들이 내 코앞에서 일을 벌이려 하다니.’
어이가 없어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
상민의 다양한 재능 중 이 시대에 독특하게도 발휘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음모력이다.
국초부터 설립한 그의 정보총국 여의국은 동시대 어떤 단체나 국가도 이와 비견되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아비뇽과 같은 생판 처음 보는 외국 땅에 나가서도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할 정도인데 하물며 자신의 근거지인 창양과 청해에서는 오죽하겠나.
설화루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정보 수집처 중 하나였다.
물론 겉보기에는 흠결 없는 청루였지만 그 속은 달랐다.
실로 암호랑이 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모처에서 감금당해 있는 자들을 떠올린 상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긴 했을까?
후손이 저렇게 멍청하면 선조 된 입장에서 어쩐지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민은 이번 기회가 그에게 꽤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