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3화 (143/653)

가지치기

* * *

물론 연방제국제를 만들기 위해선 선결과제가 필요했다.

개천 168(CE 1443) 1월.

오랜만에 종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건강상의 이유로 아들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태상황 해윤의 환후가 요양 후 꽤 괜찮아진 것을 기념하기 위함도 있었고, 현 황제 해광과 황후와의 사이에서 무사히 탄생한 국본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 와하하!

거대한 연회장은 거의 삼백 명이 넘는, 실로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시끌했다.

기다란 탁자 위에는 진수성찬이 가득했고 향기로운 술도 넘쳐 흘렀다.

궁궐에서는 평상시 잘 보지 못한 아름다운 궁녀들이 나와 이곳저곳에 음식을 날랐다.

음식만큼이나 참석자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의 연회는 황실 종통은 물론이고 친왕들의 혈통까지 전부 모였다.

물론 이 삼백 명은 그 혈통들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자들이다.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으며 혈통이 정통에 가까운 사람들.

만약 한미한 방계까지 전부 모이도록 했으면 아마 작은 도시가 꽉 차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지금의 광경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에 속한 인간들만 따로 모아놓은 느낌이겠지.

‘천룡인이 따로 있나.’

상민은 술을 마시며 그들을 죽 둘러보았다.

창양 해씨 일족.

자신으로부터 근원하여 명실공히 자신의 피가 흐르는 이 혈족들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물론 해씨 말고도 고려에서 기원한 다른 가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초 이 땅에 떨어진 고려인들, 즉 삼별초의 후예들은 아무리 주변 민족들과 동화가 되었더라도 그 내부에서 서로 통혼하는 것이 빈도상 가장 흔했으니까.

어쩌면 사람들끼리의 DNA의 동질성이 상당히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동화 또한 고려인과 이민족으로 묶였지, 이민족과 이민족으로 묶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기본적 줄기는 다소 이동해가고 있을지언정 어딘가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

그래서 후손들의 외모는 다소 특이할지라도, 괴리감이 극심하진 않았다.

물론 앞으로 이질적인 유럽인들이 섞이면 조금 달라지겠지.

‘더군다나 황족들은 이민족과 자주 통혼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국의 통합을 위해 맨 처음 거느린 이민족들의 후궁들을 제외하면 황실에서 이민족과 적극적으로 통혼한 세대는 드물었다.

타완틴수유 출신 모후에게서 낳은 현 황제 해광을 제외하곤.

점차 구상이 되어가는 자신의 대계를 생각해보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한 잔 받으시옵소서.”

― 쪼르륵

해광이 두 어른에게 술을 따랐다.

어른과 자식의 관계라 하더라도 엄연히 황제의 어사주였기 때문에 해윤과 상민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 술을 받아 마셨다.

해윤이 잔을 비운 뒤 다시금 손을 뻗어 술병을 잡자 상민의 손도 같이 뻗어왔다.

술병을 잡은 두 손이 기 싸움을 벌였다.

늙어버린 나이도 나이지만, 젊었더라도 해윤이 힘에서 상민을 이길 순 없었을 것이다.

해윤은 금세 술병을 빼앗겼다.

“태상황은 음주를 절제하시게.”

상민은 황위에서 물러난 후손에게는 얄짤없었다.

“예….”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해윤이 실망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몸을 털고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리 음주를 해서야 쓰는가?”

“할아버님, 이 늙은이도 이제 예순이 되었으니 지금 가나 나중에 가나 별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계속 말대답을!”

“…….”

해광은 아웅다웅하는 자신의 아버지와 아주 먼 할아버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종친들 사이, 해광과 해윤, 그리고 상민은 따로 마련된 상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무리 종친이라 하더라도 허락도 없이 감히 머리를 들이밀 수 없었다.

일부 젊고 혈기왕성하거나 반골 기질이 강한, 혹은 품행이 썩 좋지 않은 종친들은 왜 해씨 가문이 아닌 재상이 저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하거나 약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힘이 세거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죄다 입을 꾹 다물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어떠한 불만도 제기하지 못했다.

― ♪ ♩ ♬

연회장에는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듣기 좋은 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현악기와 관악기 그리고 건반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작곡을 한 것이 해광이라고 했었지.

“듣기에 참 좋습니다. 황상.”

“과찬이십니다. 할아버님.”

고려의 아악(雅樂)은 한동안 거의 그 명맥이 끊겨 소실될 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초에 삼별초가 강화에서 진도로 떠날 때 그 누구도 아악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삼별초 무리에 악공 또한 존재치 않았고.

가지고 온 것은 오로지 몇 개의 악기가 전부였다.

태조 상민 또한 딱히 안타까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동안 복원하려는 시도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근원 자체가 주나라로 대표되는 중원 고대 국가의 음악인 데다가 고려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이라는 것은 사실 송의 아악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근본이 좋지 않다고 영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생활에서 쓸모가 있어 포용하는 것이 확실히 도움 되는 몇몇 중원의 풍습과는 달리, 지금까지의 아악은 그런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듣기 지루해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아악이라 함은 좁게는 태묘나 문묘의 제례악으로, 그리고 넓게는 궁중에서 쓰이는 음악을 총칭한다.

그러나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이 땅에 세워질 리가 만무했기에 문묘제례악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지.

태묘(종묘의 황제격)는 당연히 국초부터 세워졌으니 태묘제례악은 존재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현존 남아있는 그럴듯한 아악은 오직 태묘제례악이라 봐도 무방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럴듯한’ 아악이다.

과거 건양의 동고려가 정통이던 시절, 문신 몇 명이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만든 아악들은 솔직히 좀 두서가 없고 음과 절차가 엉망이었다.

세종 해권이 개천 70년에 기존에 존재하던 고려의 악기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던 기존의 아악의 틀에 고려의 기풍을 채워 넣은 정형악(定形樂)이라는 종합제례악을 새로 정하기 전까지, 상민은 음악이란 낙을 포기한 삶을 살아와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흐르고 지금 해광의 치세에 정형악은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럽과의 접촉 후, 유럽이 고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처럼 고려 또한 유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오선보는 물론 피아노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비코드까지.

건반악기라는 새로운 종류의 악기 분류가 만들어진 셈이다.

자신은 그냥 지난 원정 때 획득했던 유럽의 물품들을 진상한 것에 불과했는데 음악적 조예가 몹시 뛰어난 해광은 그 진상품들 안에 껴 있던 초창기 클라비코드에 깊게 매료된 듯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음을 정확하고 민첩하게 연주해 낼 수 있는 악기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화성학(和聲學)이라고 이름 붙였던가, 그동안 정형악을 손대며 소리와 소리의 조화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던 해광은 건반이라는 것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라고 느꼈다.

그는 이 클라비코드를 건반(鍵盤)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이 건반악기도 아주 엄밀히 말하면 현악기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그렇소?”

“결국 음을 내는 부위는 망치로 가격당한 현이니까요.”

“으음….”

그런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음악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상민은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인생은 돈과의 투쟁이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자신의 먼 후손이 이런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실로 축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도 재능이 있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뭐 저번에 가져온 비우엘라(Vihuela, 이베리아반도에 현존하는 기타의 원형)를 개량해서 한번 연주해 봐?

“이 건반은 실로 정형악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할 만합니다.”

해광은 정형악을 이 건반 중심으로 다시 재편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피아노가 섞인 아악이라니 이 얼마나 혼종인가.

그러나 솔직한 말로 꽤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상민이 막귀라도 퓨전 음악을 들었을 때 그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으니까.

다양성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기 마련이다.

해광의 설명에 따르면 건반은 혼자 떨어뜨려 놓아도 좋은 악기지만 뭉쳐 있을 때에도 운율을 주도하며 다른 악기들이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중심이 된단다.

“물론 소손은 아직 그리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일단 소리가 다른 악기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 흠이고 또한 음색이 불안정한 것이….”

“…호오, 그렇소?”

무의식적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해윤 또한 아들의 말보단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해결책은 조금 더 견고한 현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현을 조금 더 강하게 때리는 것이 있겠지요. 소리를 크게 증폭시키는 장치도 만들면 좋겠고.”

“뭐 현을 망치 같은 것으로 치면 되지 않겠소?”

상민은 그냥 대충 아무 말이나 툭 던졌다.

소리를 키우려면 뭐 확성기라도 옆에 달아두면 될 일이지.

물론 전형적인 알못의 발상이다.

“오, 실로 좋은 발상이옵니다.”

하지만 해광은 선조의 말에 또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음식을 먹는 것을 그만두고는 천장을 쳐다보며 한동안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크흠, 흠.”

그러나 지금 이곳에 온 것은 그런 시시콜콜한(상민의 입장에서는) 담소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황상.”

해윤이 상민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 아버지.”

해광이 그의 선조들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황상에게 아뢴 것이 있소. 대명을 주셔야 할 시기가 닥쳐왔구려.”

해광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꼭 그리하셔야만 합니까?”

그가 다소 안타까운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상민과 해윤의 얼굴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아들아.”

주변을 한 번 살펴보던 해윤이 말했다.

“이 아비는 너를 가진 것을 실로 축복이라 생각한다. 네가 지금 보위에 오른 것 또한 마찬가지. 내가 내 손으로 자식을 죽여야 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죽은 해제를 언급하는 말에 해광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리고 가문의 일 또한 그와 동일하다. 이 문제들은 아비로서, 그리고 태상황으로서도 두고 볼 문제가 아니다.”

해광은 해윤의 말을 듣다가 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만류를 원하는 것 같았지만, 기대에는 부응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님.”

취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계속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상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황상께선 사과를 좋아하시지요?”

기존 고려에 자생하던 능금 말고 이슬람과 유럽을 통해서 넘어온 ‘사과’는 떠오르는 고려의 인기 과일 중 하나였다.

능금보다 클뿐더러 온대기후에서도 잘 자라며 맛도 좋았다.

지금 이 연회의 탁상 위에도 사과의 과실 혹은 즙을 이용한 요리가 몇 가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예.”

“맛있는 사과는 철저하게 관리된 사과나무에서 나오지요.”

“잘 관리된 나무라….”

당연스럽게도 해광 또한 그의 교육을 충실히 받은 모범생이었기에, 지금 상민이 하고있는 말이 다른 것을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해광이 씁쓸한 얼굴로 연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거의 이백 년이 다 되어가는 거대한 고목, 창양 해씨.

“나뭇가지가 무성하고, 잎사귀가 잔뜩 달린 나무는 보기에는 기운이 융성할지 몰라도 건강하지 않소이다.”

상민 또한 그들을 바라보았다.

같은 피가 흐르는 후손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아들이고 딸들이다.

아주 약간의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죽었거나 병든 가지는 잘라야 합니다.”

해윤과 해광은 마치 주위의 온도가 몇 도는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병든 가지는 속으로 썩어들어가 마침내 나무 전체를 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니.”

그 기운은 연회장까지 퍼졌는지, 몇 명의 사람들이 상석을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소서. 올바른 가지들은 어떠한 해도 입지 않고 제 자리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님.”

해광은 말을 흐렸다.

다른 사람보다도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괜찮소. 황상.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이 사람만이 해야 하는 일이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주가 잘못된 구성원을 단죄하는 것은 엄연한 직무였다.

원망과 비난, 그리고 슬픔은 이제 내성이 생겨 괜찮았다.

해제를 폐위시키고, 마침내 죽인 이후 상민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무엇인가가 약간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한참 뒤, 마침내 해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얻은 상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은 충분히 먹고 마셨으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술병에 손을 뻗으려는 해윤을 노려본 상민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친왕위와 외부 주들의 군왕위를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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