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2화 (142/653)

연방제국의 기틀

답답함을 느낀 상민은 흰 복면 위에 있던 가면을 벗었다.

어차피 주변에 사람들은 없었다.

담당의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외모가 아름다워서?

글쎄.

지금 이 순간만을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적당한 근손실 덕분인지는 몰라도 잔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갸름해지고 청초해져서 외모적으로는 자신의 이상형과 훨씬 더 가까워졌다고 봐도 되겠지.

전형적인 프랑스 미녀의 얼굴이 저럴까.

본신의 키도 상당히 커서, 장신인 자신과 딱 어울린다.

그러나 상민은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경험을 한 끝에, 이성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그런 범인의 경지는 이미 초월한 지 오래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는 과거의 그녀에게도 약간의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일단 실력의 차이는 있지만 검을 나눌 수 있는 무인으로서의 동질감도 있겠고.

두 번째로는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한 집단을 이끌고 있다는 지도자로서의 동질감도 있겠고.

둘 다 태어난 출신이 근본 없다는 동질감도 있었겠고.

그녀의 행보가 어쩐지 초창기 삼별초를 이끌고 고군분투하며 맨땅에 헤딩하던 자신과 닮아있었던 것도 있었고.

역사서에 적혔던 그녀의 최후가 몹시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이라 이미 가지고 있었던 동정심도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그 사람 자체가 선하고 책임감 있으며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긴 했으니까.

사지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은 인정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민은 처음 그녀를 볼 때, 상당히 거부감이 들었다.

앞서 말한 모든 감정을 막고 있었던 것은 그녀의 종교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모든 의지와 생각, 판단의 근거를 맡겨 버리는 몰상식함.

그 심각할 정도의 광신에 상민은 치를 떨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

그래서 오히려 적대시하며 사지로 내몰았지.

죽어도 상관없는 패라고 계속 말하며.

하지만 반대로 이 순간 상민은 그녀에게 빠져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장 믿고 있었던 존재들에게 경험한 배신감, 절망감 혹은 자괴감에 치를 떨고 있는 잔의 모습에.

‘그랬지.’

기억해보면 자신이 필요할 때 신은 없었다.

천주교 보육원에서 자라, 몇 번의 입양을 거절당하고 다른 이들이 떠나는 것을 볼 때도.

안 그래도 억울하게 태어난 인생에서 수많은 시련을 억울하게 당할 때에도.

결국 자신을 구제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는 참다못해 그녀를 질타했다.

“계속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을 거요? 들어주지도 않는 주님을 원망하며?”

“…….”

화가 났다.

그놈의 신. 당신 태워 죽이려 했어. 알아?

오지 않을 구원을 찾는 건가, 여전히?

그 꼴을 당하고 있더라도?

그는 불쑥 말을 내뱉었다.

“나는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소.”

흠칫, 놀라는 떨림이 보였다.

“…….”

“치료법이 있소.”

경청하고 있는 것 같다.

“이건 ‘기적’이 아니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수없이 많은 희생 아래 아국의 학자들과 의원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발견해낸 문명과 이성의 결과물이오.”

누벨 오를레앙에 붙어 있는 프랑스인들을 전투와 희생 없이 고려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학질로 인해 북부개척이 미진한 지금(치료제인 키닌이 발견되었더라도 값은 여전히 비쌀 것이기에) 북부에 안전히 정착한 그 정도의 인력은 상당히 소중했다.

“썩 괜찮은 확률은 아니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선택은 그대 스스로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치료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한 듯하다.

이제는 그녀의 너덜거리는 의지를 봉합해야 했다.

사람은 가장 절망스러울 때 의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빠져들게 되는 법.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만약 당신이 더 이상 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시오.

만약 당신이 더 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시오.”

그도 아니라면, 내 말을 듣든가.

상민은 마침내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알고 있소. 당신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얼굴에는 역시 붉은 반점이 피어나 있었다.

보기에는 약간 흉측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상민은 그런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신과 그 목소리를 듣는 성녀의 시대는 끝났소.”

당신도 알고 있겠지.

잔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상민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기겁하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상민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시선이 수만 가지 감정을 담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생명의 은인이자, 알지 못할 호감과 걱정을 담고서.

상민은 드디어 그녀의 얼굴에서 인간적인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성공이 눈앞에 있었다.

진심은 진심으로 설득해야만 했다.

“약속하지.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저번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잔을 사지로 걸어가게 한 것은 자신이었으나, 그녀를 사지에서 구출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

“전적으로 나를 믿으시오. 나를 따르시오. 내가 그대의 신념과 백성들을 지켜주도록 하지. 비단 저 식인종들뿐만 아니라 기근과 재해 그리고 수만 가지 질병에서도.”

그가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말했다.

잔은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다, 이윽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상민이 오히려 그 손을 잡아채,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도록 했다.

“주…군….”

잔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 단어가 샤를 7세도, 그리고 교황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자격조차 없었던 이들인데.

하지만 눈앞의 사람은 달랐다.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그러한 사람.

잔은 다소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왜 이런 추한 꼴을 보여주게 되었을까.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지는 못했을까.

“당신을 왜 지금에서야….”

“지금도 늦지 않았소.”

잔은 가만히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동레미에서 계시를 받았던 날, 저는 그날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성인들과 천사들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크나큰 환희를 느꼈어요.”

“…….”

“바로 지금처럼.”

상민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누벨 오를레앙엔 지도자가 필요했다.

또한 북려의 대륙에도 적법하며 거부감이 적은 지도자가 필요했다.

적어도 동화정책이 궤도에 오르기 전까진, 그들과 같은 혹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지도자가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엮어져 어떤 누구보다도 자신의 뜻에만 ‘맹목적으로’ 따를.

그리고 자신의 피를 이을 자식을 생산하여 그 혈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그 자식은 고려인과 프랑스인의 혈통을 모두 타고남으로써 정착지에서 귀화인과 고려인을 모두 통치할 수 있는 혈통적 권한을 가지게 되겠지.

성공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될 것은 물론이고.

따라서 그녀는 동화정책의 가장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고려인과 혼인하여 고려―유럽인 왕가를 만들어낼 최초의 여군주가 됨으로써.

“나의 가호 아래, 북부의 여왕이 되시구려.”

그는 잔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 후우

문을 닫고 나온 상민은 한숨 한 번을 내쉬고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담당의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란 인간은 자신의 감정까지 이용해 먹을 만큼 계산적이구나.’

어설픈 감정을 모방하는 것은 잔과 같은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진심은 진심으로 설득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감정이 앞서 말했다시피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잔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마치 뇌의 회로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바뀌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라는 존재가 이제는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개인이 이제 국가가 되어버리고 있는 걸까?

흰 복면은 담당의가 들고 있는 폐기물 상자에 버렸다.

철제 금속 가면을 만지작거린 그가 다시금 그것을 얼굴에 썼다.

방금 전까지의 격정 섞인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집으로 가자.

연화에겐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아무것도 모를 텐데.

‘그러나 이 미안한 감정도 결국 거짓이겠지.’

자신의 가치판단의 근거는 오로지 제국의 이득일 테니.

* * *

1443년 초, 동예라는 국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죄를 저지른 왕비는 처형당했고, 어린 왕 또한 어미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왕실의 종통은 끊겼고 오로지 방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학질과 황열이 한바탕 그들의 영토를 휩쓸어 대었고 이제는 영역의 존폐마저 걱정하는 상황이 닥쳐왔다.

멸망한 국가 대신 고려의 깃발이 세워졌다.

고려의 깃발이 동예와 합쳐져 약간 다르게 바뀐 것은 사소한 일이다.

남려대륙은 이제 미개척지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고려의 품에 들어온 셈.

동예는 큰 교훈을 남겼다.

결국 어떠한 봉신국도 믿음직스럽지가 않다는 결과를.

남북으로 길었던 동예는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예주와 온주, 원주로.

해광과 상민은 종친회를 소집하여 해씨 방계 황족 중 근면하고 성실하며 야심이 없는 자들을 동예의 방계 왕족들과 결혼시켜 그곳의 왕위에 앉혔다.

내방에 예친왕과 온친왕, 그리고 원친왕의 작위가 생겨났다.

이 친왕들은 권력이 아예 없다 해도 무방했다.

심지어 현 황제조차 실권이 없는 마당에 무슨 친왕따리가 뭘 하겠느냐마는.

그러나 지방의 얼굴마담 노릇은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인기가 대체로 없을 수밖에 없는 신민들의 샌드백, 중서성 의원과 지방관을 견제하는 역할.

역성혁명과 반정, 그리고 기타 민란을 감시하는 역할.

또한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몇 가지 안건을 들고 중앙에 시정 요구를 하는 역할까지.

‘말하자면 상원의원인가.’

상민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가졌다.

비단 내방뿐만 아니라 외방에도 이를 적용하면 어떨까?

봉신국이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처럼, 개척지도 마찬가지다.

인구가 커지고 경제력과 무력이 갖춰진다면 그들은 서서히 독립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과 무장 또한 얼마든지 그들의 편에 서서 독립을 요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북려대륙의 그 끝도 없는 잠재력이란.

물론 상민은 그 넓은 대륙을 하나의 단일한 곳으로 묶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 나눌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그러나 여전히 위험성은 잔존했다.

고려 조정의 입장에선 분명히 그들을 구속해야만 했다.

솔직한 말로 지금 믿을 것은 오직 피, 즉 혈통밖에 없었다.

‘혈통에 의한 지배는 아직 유효하다.’

그들은 명목상의 왕이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성씨는 창양 해씨여야만 했다.

‘지방에 왕작위를 설치하자.’

외방의 왕작위는 내방의 친왕위처럼 사실상 유명무실할 것이다.

앞으로도 민정을 담당할 주지사(총독의 이름이 바뀌고 주지사로 확정되었다)는 중앙에서 임명할 것이고 군정을 담당할 장군 또한 계속 숭무감에서 배출할 것이니.

그러나 주지사와 장군의 일탈을 감시하고 또한 중앙과의 동질감을 부여하며 독립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선 명목상이나마 그곳의 군주를 임명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

‘너무 큰 자치성을 부여하면 잘못하다간 미국 꼴이 나니까.’

개척지의 신민들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는 것이 항상 최상의 방책은 아니었다.

고려는 현재 외방의 네 주를 운용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정착지, 즉 칼리나 해의 거류지들과 하와이는 논외로 하자.

미주(美洲, 캘리포니아).

기주(崎州, 히스파니올라)

화주(花州, 플로리다)

파남(派南), 혹은 파주(派州, 파나마)

이 네 곳에는 이제 군왕들이 임명될 것이다.

다민족을 혈통에 의한 지배로 묶는 것.

그러면서도 조정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

중앙집권과 봉건제의 장점만을 흡수한 정책.

상민은 이 체계를 연방제국제도라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