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고려는 강대했다.
잉글랜드와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이베리아의 국가들을 유린했던 그들의 군사력은 잉글랜드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특히나 잉글랜드인들은 ‘섬사람’이라는 민족적 관념이 자리잡은 사람들이었다.
바다를 빼앗기게 된다면 어떠한 꼴이 일어나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고려가 가진 해양기술의 잠재력에 찬탄하기도 했지만 두려워하는 감정 또한 품었다.
바다를 지키지 못한다면 제2의 ‘이교도 대군세’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기독교인으로서, 바다 건너의 이교도 제국에 기독교가 퍼지는 것은 당연히 권장해야 할 일이다.’
편지에 담긴 내용을 본 헨리 보퍼트는 당연스럽게도 다른 모든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대 세계의 대부분의 문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럽 또한 엄연히 차별이 존재했다.
종교, 민족, 언어와 문화까지.
그러나 아직은 ‘인종’차별에 대한 관념이 크게 뿌리내리진 않았다.
차별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모든 부류의 이방인, 즉 이베리아 문화권과 프랑스 문화권 사이에서도 성립했다.
유럽인들이 백인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로 묶여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당연한 소리였다.
동양계의 인종 특성이 돋보이지만 엄연히 유럽인이라 여겨지는 헝가리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도 있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이 그러한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인 대항해시대를 제일 먼저 열지도 못했으니.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동양 유목민 카칸의 후손들이었다.
현시점 스콜라 철학이 주류인 유럽 사회의 혁신들은 상당수 외국에서(이슬람과 고려 같은 나라들) 들어오거나 그리스의 옛 유산에서 발굴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그러니 개인의 종교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언어 그리고 문화, 혹은 피부의 색깔과 이목구비가 다르더라도 같은 종교권이라면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에티오피아가 그 예였다.
이제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주도하며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지만 아직 아프리카 동쪽 에티오피아 땅에 자리한 콥트 기독교 국가는 유럽 사회에서도 나름대로의 존중을 받고 있었으니까.
고려에 기독교가 퍼진다는 것은, 유럽인들이 그들을 이제 마냥 적대하기보다는 협상의 여지가 있는 국가로 본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결혼도 가능할 것이고 동맹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헨리 보퍼트는 고려와 손을 잡길 원했다.
설령 손을 잡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날카로운 이빨이 잉글랜드에 닿지 않길 바랐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교황의 봉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추기경 자리 또한 본인은 딱히 원하지 않았었지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 억지로 받았으니까.
잉글랜드의 봉신으로서 그는 국왕과 가문의 이득을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헨리 보퍼트는 자신이 속한 보퍼트 가문, 더 나아가서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삼는 본가 랭커스터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
이 시대, 잉글랜드는 혼란스러웠다.
백년 전쟁이 교황청의 강압으로 다소 허무하게 끝난 이후 마르티노 5세에게 굴복한 국왕의 권위는 바닥을 쳤다.
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이제 스무 살이 넘은 왕이었으나 그 젊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약하고 정신도 어딘가 약간 모자랐다.
병신왕의 치세는 봉역 내의 혼란만 가중하기 마련.
이때를 틈타 흰 장미를 상징으로 삼는 요크 공작 리처드가 공공연하게 파벌을 모아 랭커스터 가문의 권위에 도전하니 분위기가 몹시 흉흉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가 아직은 불리함을 알았는지 자꾸만 외부의 세력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황청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백년 전쟁이 끝난 지 십 년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원수인 프랑스의 샤를 7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잉글랜드, 부르고뉴, 포르투갈 동맹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군주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 이외에도 다른 것이 필요했다.
교황청의 말 한마디에 엎드려 벌벌 떠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헨리 보퍼트는 과거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종군한 적이 있었다.
별 성과가 없어 교황의 가벼운 질책만을 받은 뒤 철군했지만 실상 속내는 달랐다.
그는 공을 세울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후스파를 토벌하지 않고 군대를 물렸었으니까.
갑자기 그가 전쟁은 나쁜 것이며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가 부도덕하다 깨달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존 위클리프와 롤라드파의 영향을 받은 후스파의 맹활약.
그러한 후스파의 성장과 교황청의 권위 하락.
헨리 보퍼트는 그곳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영감은 아직 구체화되지도 않은 단순한 상상에 불과했다.
‘최근까지는 그랬었지.’
그러나 저 증오해 마지않는 성녀가 던진 불길.
그리고 교황 스스로가 초래한 유럽을 진동하고 있는 종교개혁의 물결은 추기경의 마음을 다시 흔들었다.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시간을 더 무의미하게 흘려보낸다면 다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까.
요크 가문이 프랑스와 교황청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침내 그의 주군 헨리 6세를 파문하게 된다면 그들로서는 손도 못 쓰고 당해야만 하니까.
헨리 보퍼트는 자꾸만 집중이 되지 않는 까닭에 책상에 책을 내려놓았다.
유해조차 불타버린 존 위클리프의 저서, 이단 롤라드파의 성경.
추기경으로서는 감히 보지 말아야 할 금서였다.
* * *
1442년 12월.
청해.
고려.
청해는 많은 동해안의 도시들이 그러하듯 드넓은 해수욕장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도시의 기반시설 자체도 워낙 잘 되어 있고 기후 또한 일 년 내내 몹시 쾌적하니 문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칭송받는 것은 당연했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은 모두 청해에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이 소망이라 한다.
지금은 교통이 혁신적으로 발전되지 않아 휴양도시의 개념은 아직 없었지만 먼 미래에 이곳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될 것이었다.
청해의 주인답게 사유지에 거대한 해수욕장을 가지고 있는 상민은 오랜만에 들른 자신의 해수욕장에 간이 해침대(썬배드)와 차양막(파라솔)을 설치하고는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휴가 때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연화와 그녀가 낳은 두 명의 아이들은 저 앞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대동양의 파도는 꽤나 거세어 무릎 이상 차오를 물속으로는 들어가지 말라 미리 말을 했었지.
아직 딸아이들의 키가 자신의 허리 부근에나 올 정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발만 담그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다소 아쉬워하던 딸들이었지만 상민은 몹시 단호했다.
그래도 모래성을 지으며 즐거워하는 가족을 바라보던 그가 거북열매즙으로 만든 음료를 홀짝였다.
사방에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만 요란했다.
예전 해제의 치세 때 갔던 본의 아닌 휴가 이후 거의 십 년 만의 휴가였다.
유럽 원정이 끝나고 꼭 휴가를 가야겠다 다짐했던 상민은, 적당히 일이 마무리되자 모든 것을 때려치고는 몇 주 동안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마음먹었었다.
― 후
진짜로 살 것 같았다.
상민은 백번 천번 생각해봐도 자신이 태조 시절, 아들 해진에게 양위를 한 행동을 다행으로 여겼다.
계속 궁정에만 있어야 한다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게다가 상민은 동시대 장수하는 축에 속하는 인간보다 거의 네 배에 달하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으니 더더욱 멘탈을 추스르는 것이 중요했다.
왕들이 죄다 어딘가 괴팍한 구석이 있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닐까.
조선 임금들이 왜 그렇게 온천이 있는 온양에 가기 위해 신하들을 졸랐는지 이젠 아는 것을 넘어 격하게 공감 가능했다.
물론 자신은 건강에 아무 하자가 없기에 온천보다는 경치가 좋은 곳을 가길 원했지만.
‘마음 같아선 유우니 사막이나 이과수 폭포를 보고 싶은데… 너무 내 욕심이겠군.’
고려에서 절경이라 꼽히는 수많은 지역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두 지역은 도보로 이동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한쪽은 사막이고, 한쪽은 열대우림 기후라 볼 수 있어 휴양의 목적으로 갔다가 고난의 행군을 하고 돌아올지 몰랐다.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는 건 덤이고.
뭐, 지금 당장은 이 해변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광경에 어떠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유리정으로 된 안경(초기형 선글라스를 말한다)을 끼고 다시금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려는 찰나, 뒤에서 수발을 들고 있던 하녀 한 명이 상민에게 아뢰었다.
“당하, 추밀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으음. 이 국장인가.
“들라 하라.”
* * *
“…….”
졸지에 상민과 비슷한 포즈로 옷을 다 벗고 해침대에 누워 있게 된 창언이 머쓱한 얼굴을 하며 괜시리 거북열매즙을 들이켰다.
상민은 재밌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저게 상관과 사우나를 같이 가는 부하 직원의 표정이란 말이지.
창언은 상민의 웃음기가 가셔지자 이번 일에 대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황상께서는 이번 일에 관해 대부분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
“다만, 기존 불교계의 입장을 고려하여 수도에 창양 총대주교좌를 설치하는 대신 청해에 총대주교좌를 설치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사륜을 내리셨습니다.”
해광은 성년이 되었고 이도의 딸, 정의와 결혼했지만 당연하게도 정치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래도 거부권과 같은 몇 가지 군주 권한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상민의 정책에 무언가 불만을 가지면 가끔 저렇게 직통으로 황제에게 올리는 경우가 있긴 했었다.
물론 해광은 자신의 스승이자 할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예전에 상민이 중세 유럽의 클라비코드(Clavichord, 피아노의 조상)를 참조해 만든 건반악기에 한창 빠져있었다.
“밥그릇 빼앗길까 봐 황상에게 직접 로비를 한단 말이지?”
“…….”
창언은 로비와 같이 이제는 시중이 불쑥불쑥 말하는 단어들의 뜻을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아니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고.”
그래도 불교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의 공존에 있어 상당히 유화적인 종교였다.
다른 종교였으면 아마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을 텐데.
아직도 불교의 개혁은 진행 중이라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대들기엔 내부의 목소리가 정돈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마티외 주교에게 청해 총대주교좌를 내리실 예정입니까?”
“장소는 별 상관이 없으니 황상의 사륜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창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고려의 ‘독자적인’ 교회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민은 미소를 띠었다.
“성스러운 공교회, 즉 성공회(Episcopal Church)라 부르도록 하지.”
마티외 주교가 새로 만들 교회, 앞으로는 성공회라 불릴 이 종교는 교리상으로는 가톨릭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다만 지방의 교회들에게 상당한 재치권을 주었다.
물론 그들이 지방 정부에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었지만.
수장권은 애매했다.
고려의 현 황제 해광은 어떠한 종교도 믿고 있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종교로 인해 동굴에서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무리 상민이라도 그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해광은 선조의 뜻에 따라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 성공회 신자들은 제국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면 고려의 주권이 닿는 땅에서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권리도 침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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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는 Anglican Church라 불리고 영국이 아닌 지역의 성공회는 Episcopal Church라 불립니다.
이 시대에선 전자는 등장하지 않겠군요.
오히려 Korean Church가 성공회의 대명사가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