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악연
펠릭스 5세가 각혈하고 쓰러졌을 때의 일이다.
아비뇽 교황청은 하나의 큰 요새였다.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거의 5km에 달하는 외성이 안의 구조물들을 감싸며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행여 공성전이 벌어진다면 어느 정도 농성이 성립할 수 있을 정도.
외성의 바깥에는 한 무리의 경비병들이 주기적으로 오가며 순찰을 하곤 했다.
특히 일반적인 출입구라 볼 수 있는 남쪽과 동쪽의 경계는 확실히 삼엄해 이곳을 통해 아비뇽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 같았다.
아무리 그들이 숙련된 전문가라 하더라도 위험 요소는 확실히 줄여야 했다.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밤.
아비뇽 북부와 서부, 그리고 프랑스 본토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론강 너머 야음을 틈타 검은 두건과 복면을 뒤집어쓴 자들이 움직였다.
‘확실히 다행이군.’
전술을 지휘하는 조장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수장이 사경을 헤매는 상태, 그와 더불어 교회가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사방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나오자 성직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참이었다.
이러한 수뇌부들의 혼란은 근무를 서는 병사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쳤고 어딘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강 너머까지 느껴졌다.
고려인들은 도강을 준비했다.
달빛도 어두운 밤, 흑색의 복장으로 통일을 한 덕에 잘 들키지 않으리라.
프랑스 남부, 7월 말의 날씨는 무척이나 따뜻하다.
도강하는 곳 바로 옆의 아비뇽 다리(생베네제 교)만을 경계하는 병사들은 강 한가운데에 얼굴만을 내밀고 수영하는 고려인들을 보지 못했다.
강가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젖은 옷을 조심스럽게 털며 무구를 점검했다.
“비반사처리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라.”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인 나머지 요원들이 장비를 모두 점검하는 사이 조장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도강 지점 부근에도 성벽은 꼼꼼하게 건설되어 있었다.
다만 주변보다 월등히 높은 하나의 자연적 바위산이 있었다.
이 암벽 성채, 로쉐 데 돔(Rocher des Doms)은 높이만으로 충분히 자연적 성벽의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인공적 건물들은 지어지지 않았다.
순찰대의 배치도 다른 곳보단 허술했다.
그러나 인공적 성벽과는 다르게 표면이 매우 불규칙적이라 어쩌면 도전할 만한 지형이라는 것이지.
숙련된 등반가들에게는 괜찮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고려인들은 천천히 암벽을 올랐다.
아무리 잘 훈련받았다 하나 사람인 이상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
게다가 소리를 내지도 않아야 했고, 들키지도 말아야 했다.
― 타탁
가장 먼저 최상층에 거의 도착한 조장이 발을 디디다 풍화된 부분을 밟았는지 디딤돌이 부서지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는 꽤나 커 위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초병의 귀에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
병사는 고개를 내밀고 한동안 절벽 밑을 살펴보다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자 다시금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에 몸을 밀착한 고려인들은 제각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돌을 밟았던 조장은 다시금 천천히 올라갔고, 마침내 초병의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손목 보호대의 칼날을 뽑았다.
― 푸욱
“끄흑.”
단단한 돌을 붙잡고 있는 힘껏 도약하여 올라간 조장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병사의 목에 칼날을 꽂았다.
피거품이 묻은 칼을 빼내고 대충 그 시신을 근처의 풀숲에 숨겨놓은 조장은 밑의 동료들에게 밧줄을 던져 조금 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배려했다.
검은 그림자가 모두 암벽을 올랐다.
조장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니 정신 단단히 차리도록.”
피를 본 이상 모래시계는 거꾸로 뒤집혔다.
언젠가 다른 병사들이 초병의 부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부터는 속전속결로 행동해야 했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인 데다가 유럽 건축양식이라는 것이 참 미로같이 복잡하기 그지없어 범인들이라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사전에 숙지한 정보를 토대로 꽤나 빠르게 길을 구별하며 나아갔다.
감옥은 로쉐 데 돔의 바로 옆에 있었다.
탈출하려는 자를 막기 위한 시설이라 침입하려는 자에 대한 방비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감옥 외부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 네 명을 동시에 암습으로 처리한 요원들이 지하 감옥의 문을 열었다.
― 끼익
횃불 하나를 뽑아 들고 경계하며 내려온 그들은 곧 다소 황당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그들의 대장, 창언은 놀랍게도 감옥의 복도 한가운데 있는 감시용 탁자에서 다른 죄수와 체스를 두고 있었다.
감시하는 간수 네 명은 사살당한 뒤 그 시신이 감옥 안에 넣어져 있었고.
“늦어.”
요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다가도 투덜거렸다.
“…또 교관 시절이 생각나신 겁니까?”
창언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저희들이 오늘 오지 않았으면 어찌하려고 하셨습니까?”
대장 대신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조장이 그동안의 짬처리에 분노했는지 계속 불퉁거렸다.
“오늘은 그믐이다. 너희들이 오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도 아니라 내가 교육을 잘못 시킨 게지.”
이길 수 있었는데.
창언은 아쉬운 듯 체스판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눈앞의 죄수에게 열쇠 뭉치를 던졌다.
“기권도 나의 패배이니 약속대로 열쇠를 주지.”
죄수가 창언의 눈치를 보며 감옥 안의 자물쇠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창언은 주변의 감옥에서 다소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오는 죄수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대들의 목숨은 구해줄 수 없으나, 적어도 어디서 죽을지 결정할 자유를 줄 순 있소.”
― 으하하.
―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지만, 그거 좋지!
온갖 혐의로 끌려온 죄수들이 숨죽여 웃었다.
농부, 어부, 사냥꾼과 목수, 상인 혹은 학자와 대장장이와 기술자들.
직업들은 다양했다.
이들은 무도한 자들이 아니라 무고한 자들이다.
술김에, 혹은 홧김에 이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을 뿐인.
감옥생활 동안 몸은 병들고 곪았더라도 교황청에 대한 응어리진 분노는 활활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기약 없이 지내다 불타 죽나 난리 치다 창칼에 찔려 죽나 똑같은 죽음이다.
오히려 후자가 속이 더 시원할 것이다.
그들은 고함인지 환호성인지 모르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죄수들과 헤어진 고려인들은 잔을 찾아 나섰다.
죄수들을 풀어주긴 했으나 딱히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병사들이 제대로 대응을 하면 금방 진압될 게 뻔했다.
― 와!
죄수들이 병사들과 싸우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릴 때쯤, 그들은 창언이 파악해 놓은 잔의 감옥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화형대에서 내려온 뒤 다시 수감된 독방은 일반적인 죄수들을 수용하는 공간과는 달랐다.
수감자의 건강을 위해서인지 침대도 나름대로 따뜻했고 용변을 보는 곳도 청결했다.
원래라면 이 계단을 오른 뒤, 바로 오른쪽에 병사 두 명이 번을 서고 있을 것이다.
계단을 숨죽여 오른 뒤 단도를 날리려던 창언은 가까스로 자신의 팔을 제어해냈다.
“…….”
그곳의 문 앞, 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의 옆에는 기사로 보이는 자들 다섯 명이 시립해 있었고.
저 나무 문 뒤의 독방에 있을 잔이 어떠한 상황인지는 몰랐기에 창언과 부하들은 다짜고짜 공격하기보다는 탄식을 삼키며 노인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노인은 입을 떼었다.
“그녀는 화형대에서 내려진 이후 지금까지도 의식이 돌아오진 않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육체는 건강하네.”
창언과 부하들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거리를 살폈다.
하지만 저 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급소를 충실히 보호하는 경번갑 비슷한 갑주는 별로 둔해 보이지 않았으며 무구 또한 성안에서의 싸움에 대비하여 짧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유럽의 기사는 고려의 무사들만큼이나 천부적인 냉병기 싸움꾼들.
두 부류 모두 밥만 먹고 무예만 수련하는 종족들이다.
기사와 무사들이 검만을 다룰 줄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무기술의 대가들로서 전쟁터에서 쓸 수 있는 무구라면 어떠한 것들도 별 어색함이 없었다.
여의국의 요원들은 침입과 암습에 숙달되어 있는 암살자들이지, 이렇게 정면에서 대놓고 싸우는 것은 기사들에게 밀릴 것이다.
“오해하지 말게.”
노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네. 단지 의사를 불러 건강을 살펴보았을 뿐.”
창언은 약간 안도했다.
죽거나 욕보여지진 않은 모양이다
노인은 두 손을 거머쥐며 자신이 내뱉은 말에 한숨을 쉬었다.
“물론 아쉬운 일이지. 그녀가 오를레앙에서, 랭스에서, 일드프랑스에서 우리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면 큰 모욕을 준 이후 잔혹하게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게야.”
그는 잔을 단 한 번도 성녀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노인에게 있어 잔은 오직 천박한 농민의 딸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우리는 고려를 감히 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네. 우리는 용기와 오만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저자는 자꾸만 자신들과 교황청을 구분 짓는 말을 한다.
창언은 노인이 지금까지 한 말들과 노인이 입고 있는 추기경 의복으로 그의 정체를 추측해낼 수 있었다.
“헨리… 보퍼트 추기경.”
노인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의 재상이 저 자빠져 있는 교황에게 쓴 그 무시무시한 편지, 나도 읽어보았네. 어쩌면 우리는 서로 통하는 점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군.”
헨리 보퍼트가 약간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역시나 창언은 그에게서 두려움의 잔재를 얼핏 간파해낼 수 있었다.
“고려인들이여. 그대들의 성녀를 데려가게나.”
추기경의 말에 이은 손짓에 잉글랜드의 기사들이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느릿하게 좌우로 갈라졌다.
문이 보였다.
창언은 그들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제공하는 호의를 거절하진 않겠다.’
어떠한 일에서도 임무가 우선이다.
창언과 부하들은 적의 어린 기사들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내며 빠른 속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잔은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마치 시체 같았지만, 그래도 호흡은 고른 모양.
‘의식이 없군.’
손목의 맥을 잰 그가 가장 체격이 좋고 힘이 센 부하를 시켜 그녀를 업게 했다.
고려인 무리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땐, 잉글랜드 기사들을 비롯한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가자.”
그리고 그 이후 마치 청소라도 한 듯, 교황궁의 복도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힘들 터, 많은 희생까지도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추기경의 힘은 꽤 큰 모양이었다.
그들은 발길을 재촉했다.
“난리를 치는 사람들을 잡으러 간 모양이다. 빨리 론강으로 가자.”
나갈 땐 봐두었던 수로로.
론강에 다다른 그들이 나룻배를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강에 올랐을 때에도 추적은 달라붙지 않았다.
* * *
해가 뜰 무렵, 고려인들은 아비뇽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교황청 내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이름 모를 서책을 읽고 있었다.
추기경 곁에 서 있는 잉글랜드 기사들이 이를 갈았다.
그 앞에서 그나마 발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기사가 헨리 보퍼트에게 말했다.
“저 빌어먹을 년을 이렇게 보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퍼트는 아무 표정이 없었으나 평소 그를 잘 아는 자들은 그 또한 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헨리 보퍼트도 누구보다도 잔 다르크를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많은 잉글랜드인이 저 마녀에 의해 죽었는가.
얼마나 넓은 적법한 잉글랜드의 땅이 프랑스의 샤를에게 빼앗겼는가.
감히 일개 천박한 농민의 딸로 태어난 주제에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허언을 떠벌리다니.
만약 그녀의 뒤에 저 거대한 나라가 있지 않았다면, 아마 잔은 이 자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죄를 대충 펠릭스 5세에게 떠넘기고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간다면 속이 다 후련하겠지.
그러나 희망 사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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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보퍼트는 사실 잔 다르크를 화형시킨 위인들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