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불꽃
교황이 쓰러졌단다.
당연스럽게도 용의자로는 창언이 지목되었다.
창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신을 운반한 당사자였기에 창언은 그것에 어떠한 독도 발라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시중께서 의도하진 않으셨겠지.
그러나 고의성이 없다 해도 그분께서 감정을 담아 쓰신 글을 직접 읽는 입장에선 몹시 큰 압박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글의 필체와, 글의 문체와 글에 담긴 내용을 실행할 수 있는 힘.
이 세 가지 요소가 담긴 시중의 글은 명필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로 꼽혔다.
고려글은 물론이고 한문과 라틴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맨땅에서 창업을 한 일신의 비범함도 비범함이지만, 근면함도 따로 떼어낼 수 없었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항상 무엇인가를 배움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분이시다.
유럽과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시중은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셨고, 지금까지도 많은 언어를 직접 배우고 계신다.
연서궁에서 고려는 물론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책들을 탐독하기 좋아하셨고 항상 틈날 때마다 문인들을 불러 대담을 나누기도 하셨다.
그리 살아오셨으니 절정의 경지에 오르셨겠지.
게다가 대체로 유약한 문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기백까지.
무예로 그분을 설명하는 것은 이젠 불필요한 일이겠지.
문무겸전의 가장 대표적 대명사가 바로 그분이었으니까.
창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창언이 예전 막 여의국에 들어와 집행관의 일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파직 명령을 받은 서해안 지방의 탐관오리가 난을 일으켰었지.
그 탐관오리는 꽤나 이름을 날리는 지방의 세력가였고 안 좋은 쪽으로 실력과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집행관들도 임무가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창언이 건넨 시중의 서신을 받고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가, 다음날 덜컥 자살해 버렸다.
무슨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교황 또한 그 탐관오리와 같이 서신 안의 내용을 보고 혈압이 올라 쓰러진 것일수도.
안의 내용은 창언 자신도 몰랐지만, 그는 교황의 비대한 몸과 탁한 안색을 보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는 내심 생각이 들었다.
‘시기가 참 공교롭군.’
당연스럽게도 그의 거처는 따뜻한 양털 침대가 있던 귀빈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교황청의 감옥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에 잔은 없었다.
성별에 따라 감옥 구조가 달리 되어 있는지, 혹은 이번 일의 배후로 두 명 다 의심스러운 것이라 격리를 한 것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그는 프랑스어를 못 하는 척 연기한 뒤 집중해서 교도관들의 말을 들었다.
화형대의 밑에 불이 붙어, 연기로 반쯤 훈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잔은 발바닥에 약간 화상을 입은 것만 빼면 대체로 멀쩡하단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뒤꿈치를 들고서도 바라보지 못할 좁은 쇠창살 너머로도 소란스러움이 느껴진다.
교황청은 큰 혼란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언은 눈을 감고 기대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열두 걸음 후 우회전. 그리고 다시 열 걸음. 내려가는 계단 총 서른두 칸. 계단에서 내려와 두 걸음 후 좌회전. 스무 걸음.’
눈을 감은 채로 그는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올 동안 기억한 아비뇽 교황청의 지형지물을 되새김질했다.
구조 자체는 청사진과 비슷했지만 내부 치장물로 통로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린다면 그의 부하들이 데리러 오겠지만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해보기로 했다.
아까부터 쇠 맛이 비릿하다.
그는 혀 밑에 숨겨놓았던 철사를 꺼냈다.
돌돌 말려 있던 것을 쭉 펴니 꽤 길었다.
교도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한동안 자물쇠를 만지작거린 그가 이윽고 달칵 소리를 내며 잠금을 해제했다.
* * *
펠릭스 5세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뒤, 주교들은 전문가를 시켜 고려의 편지를 면밀히 분석했다.
“으음….”
사슴 가죽 장갑을 낀 고문기술자(독의 전문가이기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용을 제외하고는 독이나 다른 위험한 것은 딱히 발견되지 않았다.
“정녕 사특한 말이로다.”
주교들은 의견을 모은 끝에 이 고려의 서신이 악마적인 내용을 담았기에 교황이 읽다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선언하기로 했다.
사실 편지의 내용은 실로 험악하고 무시무시한 말이 잔뜩 쓰여져 있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군중들 사이에서의 소문은 달랐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지.
이번 일에 대해선 교황청이 다소 억울할 수 있겠지만, 이미 그들의 신뢰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많이 무너져 있었다.
“언제까지 그 보이지도 않는 고려인들을 들먹이는가?”
“범인이 잡혔다고? 대충 어디 항구에 있던 고려인 상인을 잡아 놓고 덤터기를 씌운 것이겠지!”
“성녀를 화형에 처하려 했기에 주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닌가!”
“교회와 성직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아비뇽과 인접한 프랑스의 영토를 시작으로 소문이 사방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가뜩이나 펠릭스 5세는 아주 색욕과 탐욕이 넘치는 교황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에 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하지만 그것이 펠릭스 5세만의 문제였을까.
사적으로는 청렴하며 모범적이었던 교황도 집단으로서는 타락해 있었다.
이미 그들은 차곡차곡 장작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태울.
면죄부라는 행위는 이 장작들이 잔뜩 쌓여진 유럽에 불씨를 뿌린 셈.
후스파와의 종교 전쟁은 벌어진 지 불과 십 년도 되지 않았다.
가톨릭과 후스파는 휴전 중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 숨을 가다듬고 공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세속 군주들은 이러한 교황청의 자기파괴적 행위를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왕은 교회의 마수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고려의 발달된 정부조직도는 아주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되는 유럽 군주들의 궁정 시스템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시기, 서양의 관료제는 중원을 비롯한 동양에 비해서도 상당히 형편없었다.
그 동양의 관료제가 혁신을 이룬 것이 지금의 고려 정부조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와 유럽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그 관료제의 공백을 보완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시스템.
기독교인은 태어나며 교회에 신고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간단한 교리 하나가 그들이 전 기독교 사회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왕들이 자신의 봉토를 온전히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고.
유럽의 군주들은 교회의 영향력을 거세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봉건제의 잔재를 치우는 것이라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대왕정이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도시와 공화정의 상인들 또한 변화를 꿈꾸었다.
가톨릭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상인을 단지 얼마든지 갈취할 수 있는 돈줄로 여기기만 할 뿐.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지.
그렇다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지방의 사제들이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이권을 잘 들어줄 군주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어떨까?
마지막, 현 가톨릭 자체에 회의감을 품은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교나 사제였기도 했고, 신학자이기도 했다.
깨어있는 자들은 예전부터 교황청의 모습을 회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마침내 면죄부를 위시한 교황과 교회의 악행에 치를 떨게 되었다.
“창부정치로도 배운 것이 정녕 없다는 말인가?”
마티외의 49개조 반박문은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공감대를 얻었다.
특히나 저지대와 신성로마제국의 북부 지역에서는 그 불길이 어마어마하게 거셌다.
“애초에 교황이란 자리가 저렇게 교회를 더럽히는 원흉이다!”
브라반트의 신학자. 베설 하르먼스 한스포르트(Wessel Harmensz Gansfort)는 교황 비판을 넘어 교회 비판을 주장했다.
“교회가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뜻을 어기는 셈입니다!”
이도로부터 배운 인본주의적 사상은 그의 생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가 사상적으로 완전한 종교 ‘해방’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은 비슷했다.
오직 신 중심이던 교회가 다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 군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브라반트의 뢰번 대학교에선 그가 연설을 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며 그에게 호응했다.
지나칠 정도의 위세지만 부르고뉴 대공국의 군주, 선량공 필리프는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았다.
이 최초이자 전면적인 베설주의의 창시자는 자신의 근거지인 부르고뉴 대공국의 브라반트 지역에서 앞으로 개혁 교회 혹은 개신교라 불리게 될 탈중앙적 교회의 서막을 열었다.
훗날 종교개혁의 시작점이라고 기록될 사건이었다.
* * *
이 모든 일을 초래한 당사자 펠릭스 5세는 기식이 엄엄한 상태로 3주일(유럽 기준) 동안 생존했으나,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대혼란이 찾아왔다.
가톨릭은 유례없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이단의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후스파는 휴전에도 불구하고 그 비열한 성격답게 준동하고 있었고, 롤라드파와 발도파 또한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베설주의는 역사상 어떠한 이단의 세력보다도 강했고 파괴적이었다.
로마에 있는 가톨릭 성직자라면 절로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교황청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그리고 희생양 또한.
알폰소 데 보르자는 궁무처장의 권한을 행사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그의 권한에 의해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그를 경계하는 친펠릭스(혹은 친콜론나) 파벌의 고위 성직자들이 죄다 아비뇽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모험적인 결단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구 대이교 이후 아비뇽으로 직접 걸어 들어간 교황의 행동은 지탄받아야 마땅했고, 콘클라베가 로마에서 열리는 일 또한 표면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알폰소는 의외로 별 탈 없이 교황으로 즉위했다.
새롭게 즉위한 알폰소는 알폰소 데 보르자라는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갈리스토 3세라 불리게 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임 교황의 시신을 로마에 소환하는 것.
그리고는 펠릭스 5세의 썩기 시작한 시신 위에 교황의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혀서 시체 재판(Cadaver Synod)에 세웠다.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을 물어, 타락하고 부패한 전 성직자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펠릭스 5세의 속세의 이름)를 모든 성직에서 파문하노라.”
갈리스토 3세는 펠릭스 5세의 유해에서 축성을 내리는 세 손가락을 잘라냈고 그의 목을 벤 뒤, 테베레강에 던졌다.
교회의 모든 잘못을 과거의 인물에게 돌려 혼란을 종식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후, 능력 있고 야심 찬 갈리스토 3세가 숙청을 시작하자, 가톨릭은 겉보기엔 다시금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는 종교개혁의 불꽃은 시체를 자르고 부패한 일부 사제를 숙청하는 정도로 진화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돈과, 권력과 연관되어 있었고 또한 막을 수 없는 패러다임의 변화였으니.
그 파도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갈리스토 3세는 칼을 빼 들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