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34화 (134/653)

종교재판(2)

“여기, 이 편지를 꼭 보르도의 주교님께 전해 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마티외는 인쇄된 문서들을 수많은 인편을 통해 기독교 사회 전역으로 뿌렸다.

보르도뿐만 아니라 랭스와 푸아티에, 툴루즈와 앙주의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제삼자가 보면 꽤 대단해 보였겠지만 그는 겨우 자신의 인연이 닿았던 동료들에게만 이 서신들을 보냈었을 뿐이다.

동료들의 지원을 얻어 잔을 어찌 석방시키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으니까.

애초에 청렴했던 그는 이 시대의 성직자치고는 가진 자산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 일 이후에는 거의 시장에서 구걸을 하는 거렁뱅이보다도 금전적 여유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세력이 개입했다.

다시 한번 유럽으로 오게 된 정보총국 이창언은 진급하여 이제는 정말 책상물림이 되기 전, 자신의 마지막 작전이 될 것이 분명한 일을 완벽하고 꼼꼼하게 처리하기 위해 고심했다.

시중께선 어떠한 판단을 내리셨을까.

비록 상관의 행동을 지레짐작하여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나, 사전에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면 상황은 달라지기 마련.

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선, 그는 혼자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 국장, 명심하시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저들 사이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임을.

시중께선 이번 임무를 배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의도적으로 잔에 대한 언급은 피했으니, 어쩌면 그분께선 그녀의 죽음까지도 예상 안에 넣으셨을지도 몰랐다.

거의 이백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괴물.

제국의 건국자이자 모든 이들의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종류라도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 통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그녀의 죽음이 이곳의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하는 것이 맞겠다.’

창언은 상인들에게 웃돈을 더 주어 더욱 많은 곳에 방문하도록 했다.

지난 작전의 후유증 덕분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직 명맥이나마 남아있는 자체적인 유럽 정보망을 가동했기도 했고.

따라서 마티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49개조 반박문은 창언의 재량으로 조금 더 인쇄되어 런던과 디종, 리스보아와 비야돌리드에 퍼져나갔다.

브라반트와 룩셈부르크, 위트레흐트를 비롯한 저지대와 보헤미아와 뮌스터,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와 브레멘, 외스터라이히 같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많은 구성원들 또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것을 받을 것이다.

앞으로 거대한 혼란이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급부로 잔의 목숨은 더욱 위험해지겠지.

하지만 창언이 누구인가.

명실상부한 정보총국 역대 최고의 유능함을 자랑하는 요원이 아니던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건대, 그녀의 죽음보다는 생존이 이곳의 혼란을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를 원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중의 본모습을 알고 언제든지 알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로서, 그는 시중이 이번 일을 계획할 때, 상당히 사적으로 갈등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랐다.

그녀에게 성적으로 끌리셨을지도.

혹은 무장과 무장 사이에서 어떠한 동질감을 공유하셨을지도 모르겠고.

항상 그러하듯 자신과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리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철혈의 재상에게 실망했냐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국가의 번성함에 반비례하여 점점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있는듯한 주군의 그러한 갈등을 보며 창언은 오히려 그러한 감정을 품고 계시는 것이 기꺼웠다.

‘목표치는 높게 잡는다.’

해낼 수 있었다.

그는 고려의 요원들을 불렀다.

잔과 마티외가 로마로 가기 위해 탔던 협저선의 선원들은 본직이 선원인 자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다 그의 부하였지.

자살 작전과 다름없는 임무에 자원한 인간들은 얼굴이 요상했다.

“만약 하달될 지침보다 상황이 훨씬 더 위급하게 돌아가면 어찌합니까?”

요원 하나가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말했다.

이곳의 정보를 담은 서신이 이미 빠르게 창양으로 올라갔었지만 답신이 언제 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하긴 어찌해, 다 죽이고 빼 오면 되는 거지.”

요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미친놈들이다.

“니들은 뒤지러 가는 길이 그렇게 행복하냐?”

“이날을 위해 여태껏 그렇게 훈련한 게 아닙니까?”

― 찰칵

요원 하나가 독특한 모양의 팔목 보호대를 절그럭거리며 대답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요원이 괜히 핀잔을 주었다.

“거 조심해. 괜히 칼 빼다가 어떤 멍청이처럼 손가락 잘리지 말고.”

“…잘린 게 아니라 베인 거라니까.”

요원들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창언이 박수를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저것이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혼내지는 않았다.

괜히 자신의 판단 때문에 이들을 전부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이 아닌지 뒷맛이 씁쓸했다.

“거금을 들여 아비뇽 교황청의 설계도를 구했으니, 작전 날까지 배수로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모조리 암기하도록. 각자 개인 건강에 힘쓰고 살기와 군기를 가다듬어라. 이제부터 대련은 오직 서로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로만 실시하라.”

“예,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정예하며 가장 믿을 수 있는 제국의 집행자들이니 그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요원들이 크진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복창했다.

“불멸의 용을 위해.”

“또한 황실을 위해.”

* * *

명분이 없었다.

성녀는 이리저리 찔러봐도 허점이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펠릭스 5세가 선택한 그녀의 죄목은 아주 사소하며 미묘한 트집에 불과했다.

남장.

교황은 이 성녀의 죄목으로 남장을 꼽았다.

바지를 입었다는 것이다.

일견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사항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 시대의 통념상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 것은 종교적 범죄로 취급당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잔은 그것이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했으나, 펠릭스 5세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객을 가장한 사람 수 명을 보낸 것과 동정심 많아 보이는 수녀를 이용한 것은 당연스럽게도 그 자신이었기에.

물론 억지인 것은 세간 사람들도 알았다.

종교계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싸늘했는지는 이단심문관으로 있던 주교들 중 두 명이 진저리를 치며 사임한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교황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죄명을 확정 짓고는 혹독한 고문을 준비하도록 했다.

과연 그 신념이 육신의 고통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상황은 그보다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성하!”

젊은 사제 하나가 자신에게 달려왔다.

품위 있는 모습은 아니었기에 한마디를 하려던 펠릭스 5세는 그의 앞에 서서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사제를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카디스에 있는 마티외 주교가 쓴 글로 인해 여러 지방의 수많은 사제들이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항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는 사제가 자신에게 바친 문서를 바라보았다.

유려한 필체로 적힌(혹은 찍힌) 문서의 라틴어 제목은 [면죄부의 권능과 효력에 대한 논쟁].

듣기만 해도 뒷골이 땅겨오는 제목을 본 펠릭스 5세가 고함을 질렀다.

“이… 이놈이!”

그년에 그놈이라고!

한참을 부들거리던 펠릭스 5세는 마티외 주교를 공식적으로 파문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젠장, 잉크가 어디에 있느냐! 채워 놓으라고 했….”

“거기, 왼쪽에 있습니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은 그가 편지로 쓸 흰 종이를 집는 순간, 그의 집무실에 꽤 높은 지위의 대주교가 찾아왔다.

대주교는 교황의 서신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보게.”

대답은 교황이 했다.

“…무슨 일이오? 한시가 급한데.”

“성하.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제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뒷걸음질로 조용히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

“지방의 사제들이 시끄러운 것?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오. 단지 그 마티외라는 놈을 파문하면 그뿐!”

“그 사실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대주교는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잉글랜드와 포르투갈과 부르고뉴가 이번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뭐라?”

펠릭스 5세의 펜이 멈추었다.

“카스티야 또한 이번 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해상십자군의 해산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다시금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어나가고 있었다.

교황청은 아직 관계가 좋은 아라곤과 시칠리아, 나폴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과 협조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사이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삼국은 항상 유럽의 일에 어딘가 소외되는 경향이 있거나, 혹은 주변의 적들에게서 한 몸 건사할 동맹이 필요한 처지였다.

교황청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악연이야 설명하는 것이 입이 아프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에서 독립을 꿈꾸는 만큼, 잉글랜드와 손을 잡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고.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가문과 혼인 관계였다.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부르고뉴는 흔히 일컫는 신성 동맹의 위협에 맞서 자신들만의 동맹을 결성하기로 했다.

화가 나는 일이나, 펠릭스 5세도 어느 정도 그 흐름을 예상할 수는 있었다.

‘쭉정이 같은 놈들!’

잉글랜드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없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사실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무역으로 엄청나게 성장했으며, 부르고뉴 또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으니.

게다가 카스티야의 배신은 뼈아팠다.

카스티야는 후안 2세가 정계에 복귀한 이후,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모양인지 험악했던 고려와의 관계 개선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에 관련하여 긴급한 소식도 있습니다.”

“또 뭔가!”

“런던에서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 성녀를 변호하기 위해 오고 있답니다.”

위협 섞인 외교적 언사뿐이면 어찌 뒷수습을 할 수 있는데, 동맹을 결성한 잉글랜드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헨리 보퍼트 추기경.

잉글랜드 전체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주 고위급의 추기경이었다.

심지어 교황조차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미친 건가? 그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던 프랑스의 성녀를 변호한다고?”

“외교적 관계에 영원한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는 프랑스의 기사도 아니지요, 오히려 교황청을 골탕 먹이고 있는 상황이니.

대주교는 교황의 결정을 촉구했다.

“보퍼트 추기경이 오기 전에 재판을 속결하는 것은 위엄과 절차에 큰 흠집이 날 것이나, 일을 매듭지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펠릭스 5세는 말이 없었다.

“보퍼트 추기경과 다른 사제들이 온 이후에는 재판이 지금보다도 더욱 지지부진해질 것이니, 아마 결국 그녀를 석방하는 것으로 귀결될지 모릅니다.”

교황이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마른 입을 떼었다.

이미 이것은 자신과 잔 사이의 악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면, 자신은 면죄부라는 행동이 그릇된 것이라 인정하는 셈.

교황무류성은 훼손된다.

“그것은 불가하네.”

대주교는 계속 독촉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펠릭스 5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진작 루비콘강을 건너 반대편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화형을 준비하라.”

그녀와 함께, 자신에 대한 적의의 시선 또한 모조리 불태워 버리리라.

* * *

상황이 긴급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 고려인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고려인들이 무구를 갖추고 카디스에서 마르세유로 출발하려 할 때, 마침 기다리던 창양에서의 서신 한 통이 창언에게 전달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자신들에 대한 지침은 아니었고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이걸 교황에게 전하라고?”

창언은 의외의 말을 들었고, 곧이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받았다.

어떤 생각을 하신 것인지는 몰랐지만 몹시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 적어도 그의 부하들은 멀쩡할 수 있겠다.

입술을 깨문 그가 적어도 자신의 눈으로나마 그녀의 최후를 보기 위해 아비뇽으로 직접 향했다.

아비뇽에 오자마자 창언이 본 것은 아비뇽의 교황궁 앞에 쌓여있는 나무들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본 것은, 아비뇽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잔이었고.

교황은 몹시 초조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창언 또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몸수색을 하고 사절로서의 신원을 확인받은 후 교황에게 안내받는 것 또한 몹시 시간이 길었으니, 잔이 나무에 매달릴 지경이 되어서야 창언은 교황을 대면할 수 있었다.

펠릭스 5세는 이교도 고려인을 마주하기도 싫다는 듯 그를 귀빈실로 내쫓고는 고려의 재상에게서 받은 편지를 뜯었다.

재상은 말한다.

[너희들은 기억하는가?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도나우강을 넘어 황제를 죽이고 너희들의 보석을 범한 것을.

또한 너희들은 기억하는가?

게이세리크가 지중해를 건너 바다로부터 로마를 공격해 불태우고 약탈한 것을.

그리고 너희들은 기억하는가?

토틸라의 동고트가 너희들의 자긍심을 거칠게 유린했던 것을.

마침내 너희들은 기억하는가?

로베르 기스카르가 저질렀던 카노사의 복수를.]

끔찍하고 끔찍한 역사들.

펠릭스 5세는 분노에 손을 떨었다.

그러나 마치 포효하는 듯한 라틴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자의 시선에서 눈을 뗀다면 곧바로 잡아먹히겠지.

[들으라.

너희들이 ‘우리’의 성녀를 마침내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성녀?

펠릭스 5세는 이 표현과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

교황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벌을 아직 받지 못했다.

고려는 그것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잘못으로만 한정하고 있었지.

그러나 마침내 그 앞까지 온 단죄의 검은 그의 악몽 속에서 자주 보였듯 여전히 날카롭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의 로마를 불태울 것이다.

주춧돌 하나, 반석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테베레강에는 물 대신 피가 흐를 것이며, 성스러웠던 교회 앞에는 그 신도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일 것이다.

비명과 신음, 그리고 절규가 메아리칠 것이고.

하늘에서는 까마귀가, 땅에서는 들짐승들이 포식을 벌이리라.

모든 남성은 죽을 것이며,

모든 여성은 끌려갈 것이다.

기필코 로마는 정복될 터.

너희들이 카르타고에 저질렀던 것처럼.

로마에서는 새로운 새싹이 꽃피우지 못하리라.]

펠릭스 5세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 끔찍한 광경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흉부가 급격히 아파온다.

마치 거대한 손아귀가 그를 쥐어짜는 것처럼 온몸에 경련이 들며 구토감과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다.

“크흐흑.”

교황은 무릎을 꿇었다.

고통에 그리한 것이었으나, 공교롭게도 겉보기엔 마치 신성한 계시를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저, 마저 읽어야만 했다.

[로마의 총대주교여, 이 편지를 받는다면 다만 기억하라.

분노에 의해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늦은 후회는 불타버린 것들을 되살려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VAE VICTIS, 패자에게는 오직 슬픔뿐이리라.

그대들에겐 오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으니.

부디 현명하게 선택하라.]

펠릭스 5세는 서신을 떨어뜨렸다.

거대한 공포가 물밀 듯 몰려들었다.

어찌 사람이 서신을 보고 이 정도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가?

어찌 사람이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가?

어찌 사람이 저렇게 분노에 차 있을 수가 있는가?

숨을 헐떡이던 펠릭스 5세가 쥐어짜 내듯 사람을 불렀다.

황급히 달려온 사제가 물었다.

“성하! 괜찮으십니까!”

“당장! 당장… 중지시켜라! 화형을 중지시켜!”

펠릭스 5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하는 말에 사제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마치 떠미는 듯한 억센 손길에 사제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교황의 눈동자에 담긴 거대한 공포가 그에게 옮겨져 버린 탓일까.

“커헉, 커헉.”

― 우웨엑

사제가 떠난 문을 바라보던 교황이 이내 앞으로 쓰러졌다.

땅에 머리를 박은 채로 펠릭스 5세는 기침을 하다 왈칵 토사물을 뱉었다.

보통이라면 오늘 먹은 식사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상황이겠으나 이번엔 달랐다.

새빨간 선혈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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