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31화 (131/653)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6)

군중이 수런거렸다.

이번 군중들은 면죄부를 처음 접한 것인지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그런가?”

“아, 글쎄 사제님께서도 저렇게 긍정하시지 않는가?”

미리 심어놓은 바람잡이들이 군중 안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지저분한 갈색 머리, 코가 빨간 부두 노동자가 물었다.

“그래서, 가격이 얼마요?”

“오분의 일 플로린! 다른 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싼 가격에 코가 빨간 부두 노동자가 나지막하게 욕을 뱉었다.

그럼에도 이 멍청한 우민들은 자꾸만 마음이 솔깃한지 흘깃흘깃 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볼품없게 생긴 상인이 뒤이어 물었다.

“고려 주화는 얼마나 받소?”

“1원이 2플로린이니, 1환을 받겠소.”

“환이 은전이던가?”

상인은 품을 뒤적이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은화를 꺼냈다.

그리고는 망설이며 염소수염 사내에게 다가갔다.

“나 말고, 사제분께 가져다드리십쇼.”

“크흠.”

여전히 일반 평민들에게 사제란 높디높은 사람이다.

그가 사제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하자, 병사 하나가 은전을 빼앗듯 넘겨받아 모금함에 집어넣었다.

사제는 상인과 함께 간이 고해성사 비스무리한 것을 하더니 꽤나 커다란 종이에 무어라 열심히 적은 뒤 상인에게 내밀었다.

복잡하고 화려한 라틴어가 빼곡하게 쓰여진 증서를 받아든 상인이 후련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두 주자가 나서자 다시금 몇 명이 나와 비슷하게 주화를 내고 고해성사와 면죄부를 받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가 빨간 부두 노동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염소수염 사내에게 조그맣게 되물었다.

“정녕 그… 면죄부라는 것이 효과가 있소?”

그의 눈은 새삼 떨리고 있었다.

불안함.

염소수염 사내는 그 자의 눈동자를 슬며시 훑어보았다.

‘네놈은 뭔 일을 저지른 게냐?’

살인?

이렇게 불안해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중죄를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강간이나 다른 입에 담기도 끔찍한 중죄들.

염소수염 사내 또한 그에 못지않게 좋지 않은 성품을 지녔기에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다.

“무슨 죄요? 아무도 모르게 나한테만 알려주시오.”

“크흠, 흠.”

코가 빨간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염소수염 사내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풍기는 심한 입 냄새에 염소수염 사내가 일순간 표정을 살짝 구겼다.

“…….”

하지만 귓가에 들리는 사내의 말은 악취보다도 더욱 심했다.

이자가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염소수염 사내조차도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눈앞의 다른 잠재 고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여기서 이 짐승을 내쫓는 것은 실적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결정을 내린 염소수염 사내는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그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오!”

자자, 염소수염 사내가 다시금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이 면죄부라는 것은 말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저자들의 주머니에서 어떻게 금화를 더 갈취해 낼 수 있을까.

조금 강한 발언이 먹히지 않을까.

밑바닥 하층민들의 도덕적 타락은 이미 익숙한 일.

이들에게 면죄부의 강력한 효과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판매는 부진할 것이다.

방금 전 코가 빨간 사내가 저지른 죄의 잔상이 기억에 남았는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염소수염 사내가 파격적인 말을 내질렀다.

“…설령 그대들이 오를레앙의 성녀를 범한다 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소!”

충격적인 말에 군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차.

염소수염 사내는 이윽고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이곳은 마르세유, 프랑스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성녀를 욕한다고?

당연스럽게 몇 명이 크게 화를 내었다.

병사들의 할버드(자루가 긴 도끼창)가 그들을 제지하고서야 염소수염 사내는 놀란 속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군중들 중 대다수가 화를 내며 돌아갔지만 예상외로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염소수염 사내의 파격적인 말은 그들의 뇌리에 효과적으로 박혔다.

남은 군중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앞다투어 줄을 섰다.

“끄응….”

혐오감이 드는 상황을 바라보던 마티외가 신음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분노가 일었지만, 일단 그는 본능적으로 저 피라미들은 이 사건의 오직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르세유는 아비뇽의 코앞.

교황청의 권위가 막강한 곳에서 사제가 저렇게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성하의 묵인이 있지 않다면 말이지.

그래서 마티외는 지금 이 순간을 조심스럽게 넘어가고자 했다.

조금 더 주변의 상황을 살피고, 배후를 확실히 지목한 뒤 정치적, 종교적 압박을 넣는 순으로 진행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받은 모욕이 일평생 프랑스를 위해 싸워온 여기사의 도덕적 한계치를 파괴해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저 더러운 인간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

마티외가 자신의 옆을 돌아보며 말을 건네었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잔은 이미 염소수염 사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폼이 그녀 자신이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평소 점잖고 예의 바르며, 성격이 온화하고 관대하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가끔은 엄청난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마티외는 잔이 저렇게 분노하는 광경을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조제프 사제의 머리가 촘판틀리에 걸려 썩어가고 있었을 때.

다짜고짜 오는 잔을 알아보지 못한 병사들이 창을 겨누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는 상태였지만 아주 얇디얇은 이성의 끈을 붙잡고는 있었는지 잔은 그래도 프랑스인임이 분명한 병사들을 위해 검집에서 빼지 않은 검으로 그들을 두들겼다.

“으억!”

― 퍼억

그녀는 아무래도 여성이라 에티엔과 질, 장과 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 사이에서 특출난 전투력을 과시하진 못했다.

그러나 잔 또한 엄연히 무예를 업으로 삼는 기사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 동안 훈련을 하고 있는.

수가 많더라도 일개 병사들.

당황한 자들이 내지르는 할버드 정도야 가뿐히 막아낼 수 있었다.

삽시간에 한 병사가 후두부에 강격을 맞아 정신을 놓고, 다른 한 명이 탈구된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나머지 세 병사들은 사제의 눈치를 보다가 한꺼번에 돌격했다.

잔은 날렵하게 피한 후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할버드의 윗대를 잡고 당겼다.

무구를 들고 있던 병사가 날의 무게에 더해진 잔의 힘에 앞으로 넘어지며 다른 두 명의 병기가 움직일 공간을 방해했다.

“으아악!”

덕분에 동료의 몸에 긴 상처를 남긴 다른 동료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잔은 아직도 잡고 있는 할버드의 끄트머리로 아군에게 상해를 저지른 자의 명치를 세게 찔러 그의 잘못을 질타했다.

나머지 한 병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창을 떨어뜨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굳이 쫓아갈 생각은 없어서 잔은 손에 들고 있던 병기를 놓았다.

동료에게 등이 갈린 놈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은 대체로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생명에 지장이 생긴 자는 있었다.

검집의 검은 언제부터인지 뽑혀 있었고 염소수염 사내는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잔은 입술에 그 더러운 피가 튀었는지, 아니면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욕을 몰랐는지 얼굴을 닦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군중들 또한 싸움이 시작되자 도망친 지 오래.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오직 세 명이었다.

잔과 마티외, 그리고 이름 모를 사제.

잔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뽑아 들고 사제를 겨누었다.

노골적인 적의에 사제가 침을 삼켰다.

염소수염 사내가 그 적의의 일부분을 가져간 것이 다행이다.

“당신의 이름, 뭐지요?”

“보… 본인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요한 슈테켈이오.”

“그거 땅에 내려놓으세요.”

요한이 망설이며 품 안에 있는 나무모금함을 품 안으로 더욱 끌어안자 잔이 무서운 얼굴로 닦달했다.

“곱게 말을 해서 안 된다면, 어디 하나는 잘려야 말을 듣겠습니까?”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모금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퍼억

잔의 발차기에 모금함이 큰 손상을 받았다.

검집으로 나무함을 헤집으니 귀금속으로 된 주화들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죽은 자의 말대로, 실로 각양각색의 주화였다.

“미쳤군.”

마티외가 짤막한 심경을 담아 말했다.

“오, 오해요!”

“뭐가 오햅니까?”

“나… 나는 그냥 단지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소!”

“비겁한 변명입니다!”

그녀의 칼이 더 위협적으로 접근했다.

요한의 목에서 살며시 피가 났다.

“보… 보시오!”

요한이 주섬주섬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사제가 암습을 하기 위해 단검을 꺼낼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요한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들거리며 한 손에 이상한 종이를 펼진 요한은 그것을 잔의 눈에 들이밀었다.

“…이번 달 판매 목표?”

“그렇소. 마르세유 교구의 주교께서 담당 사제들에게 이번 달까지의 할당량을 정해 주신 거요. 내가 이번 달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앞으로의 성직 생활에 지장이 있소.”

“…….”

“나는 억울하오. 이런 빈민가는 돈이 되지 않소. 보시오. 이 모금함도 사실은 수개월에 걸쳐 모은 거요. 주교께선 직접 부유층에게 거두러 다니시니 이 정도의 금액은 며칠 만에 버시겠지.”

“이게 무슨….”

정보를 수집할 필요조차 없다.

요한이 주절대는 정보를 종합한 마티외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로브를 여며 주교라는 것을 감추었다.

새삼 부끄러웠다.

“미쳤군, 정녕 미쳐 돌아가는군.”

잔은 붉어진 얼굴로 고함쳤다.

“사제라는 것들이 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어찌 단 한 번의 저항도 없단 말입니까!”

“…그래서 주님이 진급을 시켜주오?”

잔과 마티외는 성직자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을 거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사제를 쳐다보았다.

* * *

사제를 시켜 주화를 다시 포대에 넣으라 명령한 이후 잔은 끔찍한 표정으로 썩어가는 배의 잔해에 걸터앉았다.

“어찌하실 겁니까.”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누벨 오를레앙에 대한 지원과 고려와 교황청 간의 관계 증진.

그리고 이 끔찍한 꼴을 본 뒤엔 교황의 해명도 듣고 싶었다.

결국은 아비뇽으로 가긴 가야 한다.

그러나 마티외는 거듭하여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엔 교황청에 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죠?”

“교황청의 치부를 논리와 이성으로 지적한다면 저들이 과연 그렇구나 무릎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겠습니까?”

아니면 잘못을 지적한 자를 죽이겠습니까.

마티외는 자신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뭇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사제의 말을 들어보니 이 짓거리가 불과 하루 이틀 전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랜드 마스터께선 현명하게 판단하시지요. 지금 아비뇽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

“제가 콘클라베 추기경단과 여러 주교들의 여론을 모아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꼴에 분개하는 성직자들은 많을 겁니다.”

마티외가 자신의 머릿속 안에 들어있는 명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잔은 입을 떼었다.

“죽음은 제가 플뢰르 드 리스(프랑스 왕조의 백합)의 깃발을 들 때부터 각오해 왔던 일입니다.”

잔의 표정은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그들은 절 감금하고, 심문하겠죠. 그리고 저를 이단자로 몰아 불태울 것이에요.”

“알면서 그러십니까?”

마티외는 애가 타는 듯 계속 만류했다.

“주교님.”

잔의 눈이 이상한 결의에 빠지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흐릿하게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마티외는 몰랐지만 잔은 그 순간에 꿈을 꾸고 있었다.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를 보았던 그 옛날의 꿈을.

“저는 그 실체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설령 제가 순교의 불에 휩싸일지라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끝날지도 모릅니다.”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의 이유에는 응당한 목적이 있는 법.”

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걸쳐 입은 갑옷만큼이나 결심이 단단해진 모양.

마티외의 입은 무어라 말하려다 포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입이 뻐끔거리지만 그조차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이건….”

마티외는 말을 내뱉었으나 매듭짓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주교님, 우리의 동행은 이곳에서 끝날 거예요. 말은 오직 두 필이니, 저는 이 사제를 끌고 아비뇽으로 갈 예정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고려의 재상께 전해주세요. 말씀하신 사항은 지키지 못할 것 같으나 당신의 백성이 될 자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화주의 병사들을 움직여 프랑스인들을 화주에 정착시켜 달라고.”

사제가 포대에 금화를 다 채웠는지 엉거주춤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휘파람으로 말을 부른 잔이 무거운 포대를 말 등에 올렸다.

마티외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브 사이로 아직 순결한 주교의 의복이 보였다.

잔은 그것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전부 다 그릇된 것은 아닐 거예요. 아마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의 손을 포박한 후 그녀는 말 등에 올라 어찌어찌 두 필의 말고삐를 조종했다.

“그럼.”

그녀는 짧게 목례하고 사라졌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