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30화 (130/653)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5)

1442년 5월.

로마.

이탈리아.

기원전 8세기, 로물루스가 세운 이 작은 도시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화정 로마와 제정 로마라는 거대한 국가의 둥지가 됨으로서 실로 화려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로마는 비단 광활한 지역을 제패한 국가가 아닌, 시대의 흐름을 쥐고 있었던 명실상부한 지구 최고의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제국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의 위세는 강해졌고 나라의 이름이 기원했던 이 도시 또한 이윽고 어떠한 곳도 대체할 수 없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들어선 후 로마는 5대 총대주교가 착좌한 곳들 중 가장 권위가 높은 베드로의 후계가 앉는 곳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 심지어 예루살렘 또한 로마의 권위와 중요성 위에 있다 보기 힘들었다.

동서대분열과 신성로마제국의 설립, 그리고 기타 수백 가지 불협화음 끝에 서로마의 후예들과 동로마가 서로 고개를 돌렸더라도 로마의 권위는 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높아졌다.

가톨릭이 유럽 사회에 뿌리내리면서 이제는 교황이라고 부르는 로마 총대주교가 있는 로마 교황청은 잃어버렸던 세속적 권위 대신 그를 상회하는 종교적 권위를 가졌다.

중세의 큰 주제였던 십자군은 교황의 그러한 엄청난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였다.

그러나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을 시작하게 된 대가는 컸다.

십자군의 패배 이후 교황의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자연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세속 군주들의 힘 또한 이제는 작지 않았다.

그동안 교황의 위세에 억눌려 있었던 유럽의 군주들은 이제 도저히 성령의 말씀으로만 다스리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고, 후대의 교황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가진 힘들 왕들에게 내놓아야 했다.

아비뇽 유수와 서구 대이교는 이러한 교황들의 수난을 상징할 것이었다.

그래서 깨어있는 주교들은 언젠가 이러한 로마의 영적 독재가 무너질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예견하고 있었다.

* * *

지중해와 로마를 잇는 항구, 포르투스항에 기항한 협저선.

위에 달린 깃발은 고려의 깃발이 아닌 푸른 바탕에 백색 십자가 달린 누벨 오를레앙의 깃발이었기에, 정박은 몹시 쉬웠다.

마티외의 누벨 오를레앙 주교 신분은 여전히 교황청에서 공고했으며 프랑스 성녀의 존재를 아는 자들도 많았다.

“성녀께서 로마로 돌아오셨다!”

“정말인가?”

“어디에 계시나?”

성녀가 로마로 되돌아왔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부두는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그동안 주변의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던 잔은 몰려드는 귀찮음에 깊숙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빨리 가죠.”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는 참 오랜만이네요.”

“오 년도 더 넘었지요. 그러나 저에겐 그동안의 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북려대륙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다시금 이 땅을 밟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오 년은 의외로 짧았다고 해도 좋다.

게다가 북려대륙에서 겪어 왔던 상황들이 매 순간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체감적으로도 더더욱 짧았다.

그들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다시 검문을 받고 로마로 들어섰다.

‘으음.’

잔은 저번에 보았던 창양의 광경이 떠올라, 일약 로마의 모습에서 부족한 점을 여럿 찾을 수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영험한 기운이 있는 도시였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

외곽 지역의 빈곤함과 더러움을 지나치면 로마의 중심부가 나오고, 로마의 중심부에서도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드디어 교황이 기거하는 곳이 나온다.

테베레강을 건너 성모 대성당에 도착한 잔은 교황에게 알현 신청을 했다.

“파발이 사실이었군요.”

성녀가 로마에 왔다는 소식에 성모 대성당에서 궁무처장 알폰소 데 보르자가 나와 그들을 반겼다.

독특한 사람이다.

얼굴의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교황께서는 지난주에 아비뇽으로 가셨습니다.”

잔과 마티외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소리.

“…뭐라고요?”

대답 대신 알폰소 궁무처장은 주변을 손짓했다.

“이 성당들의 꼴을 보세요. 아니 성당들 말고도 로마의 꼴을 보세요.”

잔과 마티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하께서 머무르시기에는 너무 환경이 좋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은 다시금 로마로 돌아왔는데 기존에 기거하던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몹시 낙후되어 있었다.

화재가 난 후에도 제대로 보수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니 나무 썩는 냄새와 곰팡이가 사방에 가득했다.

당연스럽게 교황의 체면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교황들은 성모 대성당과 성 마리아 트라스테베레 성당 등에 기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성당도 낙후되었기에 여전히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

펠릭스 5세는 몹시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따라서 로마의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 당대의 명망 높은 건축가들과 전문가들을 불러 거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후대에도 교황의 엄청난 권위를 돋보일 수 있을 만한 궁전을 짓자.’

펠릭스 5세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질 작업이었고, 이제 첫 삽을 뜨기 시작했으니 자신의 임기 내에서는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신뢰하는 자신의 궁무처장인 알폰소를 로마에 남겨 공사와 기타 일에 대한 총괄을 맡기고는 자신은 아비뇽으로 향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아비뇽은 교황의 고향 사보이아와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실로 끔찍한 선택이었다.

마티외의 평정심도 깨졌다.

“그러한 일을 겪은 이후에도 다시 그 빌어먹을… 죄송합니다, 아비뇽으로 향하셨다 합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제들의 반발이 그리 심했는데도 강행하셨으니 뭐, 다른 뜻이라도 있으셨겠지요.”

알폰소는 약간은 조소하듯 얼굴을 씰룩였다.

“덕분에 저는 다행이지요.”

“……?”

마티외는 그를 바라보았으나 알폰소는 화제를 돌렸다.

* * *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인 잔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숙소에서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을 때, 마티외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로마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그는 여러 주교들과 사제들을 만나며 정보를 수집했다.

유럽의 동향과 교황청의 동향 모두를.

주교란 신분은 일반인이 듣지 못하는 정보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해상십자군은 솔직한 말로 실패로 끝났다.’

교황청의 재정에는 심대한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튀니스를 점령해 어느 정도의 이득을 본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혜택은 탐욕스러운 베네치아가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성하께서 지을 여력이 있는가?’

라테라노 궁전이 노후화된 것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주교가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찌 되었든 새로운 궁전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펠릭스 5세의 치세에서 착공을 할 필요성은 없었다.

‘성하께선 영광을 누리고 싶으신 건가? 로마 교황청을 부흥시키는 위업을 달성한 교황이라는?’

교황이 되기 전에 펠릭스 5세는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라 불렸다.

성직에 오른 이후에도 세속 군주의 탈을 벗지 못한 영주 출신의 교황은 성직자가 된 후에도 여전한 탐욕을 부리고 있었다.

금전적 탐욕과 더불어 명예적 탐욕까지.

‘여력이라.’

사실 베드로 대성당만 짓는다면 교황청의 재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할지 몰랐다.

아무리 지금까지 중대한 실패를 저질렀다 하나 예전 교황들이 서구 대이교를 결국은 극복해 내었기에.

그러나 마티외는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공사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화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이 지경이라면 금방 소진되고 말 텐데.’

이건 아니야.

무언가가 있다.

마티외는 희미하게 섞여오는 악취에 고개를 찡그렸다.

테베레강의 오물에서 오는 냄새는 분명히 아니었다.

* * *

그리고 그 악취의 근원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아비뇽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금 배를 타고 이번에는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에 도착한 그들은 로마와는 확연하게 다른 도시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항구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실제적인 어둠 말고, 분위기적 어둠을 지칭한다.

“쿨럭, 쿨럭.”

부두의 노동자들은 어딘가 다들 아파 보였다.

기침을 하는 자들, 머리를 감싸 쥔 자들이 종종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 다녔다.

마티외가 잔에게 조심하라 말했다.

“요즘 선원들 사이에서 매독이라는 병이 크게 유행한다 합니다.”

잔도 이 병은 어찌 들어 알고 있었다.

사창가를 통해 급속도로 생겨나는 병이다.

전염병임과 동시에 성병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잔은 그 더러움에 질색했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자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병이니 죄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둠은 매독만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항구 노동자들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으음?”

그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잔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떤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궁금증을 못 이긴 잔과 마티외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건조되다 만 배가 버려진 채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공터.

배 앞에 선 염소수염의 간사해 보이는 남자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의 허락을 받았는지, 사제복을 입은 자와 무기를 지닌 병사들 몇 명이 그 간사한 남자를 둘러싸고 보호하며 감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염소수염의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좌중의 이목이 확실하게 쏠릴 때까지 여유롭게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이윽고 뚱딴지같은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의 화려한 입술이 움직였다.

“여러분이 이렇게 고통받는 이유를 아십니까?”

“…….”

부두 노동자들이 약간은 화가 난 얼굴로 간사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것을 알면 이렇게 살겠냐.

모두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중들을 격동시키는 것에도 한 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모양인지 간사한 남자가 계속 목청을 높였다.

“여러분들뿐만이 아니지요. 여러분들의 살아있는 가족, 여러분들의 이미 죽은 가족, 이 모두가 여러분들에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다.

잔은 그렇게 생각했다.

항구의 노동자들은 그 일의 힘듦과 천함에 몹시 난폭하고 다혈질이 많았다.

게다가 힘도 어느 정도 강했지.

따라서 저 말은 그냥 대놓고 도발이었다.

심지어 망자까지 운운하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두 노동자들은 평상시보다 진득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삶은 연옥입니다. 피해갈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평소에 저지르고 있는 죄 때문에!”

“…….”

“또 그대의 죽은 가족들의 삶 또한 지옥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무서운 고통 속에서 신음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전에 저질렀던 죄 때문에!”

“……!”

노기에 가득 찬 사방의 시선을 받던 간사한 남자가 갑자기 짐짓 경건한 태도를 보여 보였다.

그 위선적인 모습에 잔이 허리에 찬 칼을 빼어 들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대들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역겨운 위선은 부두 노동자들에게 통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하지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그대들은 여전히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합니다.”

마티외의 손이 떨렸다.

그것이 앞으로 저자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두려움과 노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곁에 있는 잔이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이 지옥에서 썩을지, 연옥에서 썩을지, 혹은 완전히 없어질지는 오직 여러분들의 행동에 달렸지요.”

사람들의 눈이 간사한 사내가 아니라, 그 뒤의 사제에게 향했다.

사제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전!”

염소수염의 사내가 말했다.

“오직 이 동전 하나면 다 됩니다. 어떠한 종류도 상관없습니다. 플로린, 두캇, 솔리두스, 디나르, 하다못해 저 먼 고려라는 나라의 주화까지!”

그 말에 반사적으로 몇몇 부두 노동자들이 품에서 동전을 찾는 것이 보였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모금함을 흔들었다.

나무 모금함 안에는 이미 동전들이 적지 않게 있는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절로 들렸다.

무거울 텐데, 저 호리호리한 체구로 참으로 잘 흔들어대는군.

“찰랑! 이 소리가 들린다면 그대들은 모진 보속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벌(暫罰)은 모두 즉시 사라지게 되니, 그 순간부터 그대들은 진정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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