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9화 (129/653)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4)

마티외 주교는 단체의 지도자와 지도자 간의 독대에 귀빈의 침소로 향했고, 연화는 부부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후 잔은 두 번째로 상민과 조우했다.

역시나 재상의 뒤에선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그 광경에 어째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성스러운 광경인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재상은 놀랍게도 쓰고 있던 얼굴의 가면을 벗어 책상에 두었다.

뭘 의미하는 걸까.

그 의도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손은 멀쩡했으니.

그러나 얼굴에 큰 상처가 있거나 화상이 있을 것이란 짐작은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젊은 재상의 얼굴엔 어떠한 흠도 없었다.

사람이 얼굴이 어찌 저럴까.

잘생긴 외모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젊었지만, 시선은 날카롭다.

표정은 가면을 벗었음에도 도통 모르겠으며, 눈동자는 파도가 달려들 듯했다.

그러나 시선은 고요하다.

야수와 인간의 경계선. 혹은 악마와 천사의 경계선인지.

억눌린 포악함과 재단할 수 없는 신성함이 공존하는 자.

후광은 불안하게 빛났다.

꺼져갈 듯 희미하면서도, 다시금 아름답게 타오른다.

불안하다.

잔은 처음으로 느끼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재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가 여러 번 본인을 만나려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잔은 황급하게 대꾸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본국은 한동안 어떠한 원정도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기는 어려울 듯하군.”

“그렇다면 저를 왜 이곳까지 부르셨습니까?”

“다른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

재상은 다소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고백할 것이 있소. 그동안 본인은 진실된 믿음에 대해 약간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오.”

후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잔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에게 왔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상은 그 예전의 불안해 보이는 모습보다는 훨씬 더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는 솔직히 지금은 모르겠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예언자였던 모세 또한 노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바른길로 들어섰어요. 결국은 마지막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그녀가 던진 말은 어쩌면 자기 최면일지도 몰랐다.

재상이 옳다구나 말을 받았다.

“그러니 나는 교황청과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싶소.”

잔은 경청하고 있었다.

“북려대륙의 화주는 아국의 손으로 들어왔으며 고려의 신자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지.”

“그렇습니까?”

재상의 말에 잔이 화색을 띠었다.

“그렇기에 이번 해상십자군은 교황청의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소. 우리는 진실로 경건한 기독교 제국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소.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서는 충분한 뜸을 들여야 하는 것인데….”

잔은 뒤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으나,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에는 몹시 동의했다.

배 안에서 읽은 역사책을 살펴보니 고려의 적대감이 약간 이해가 되었다.

“따라서 그대가 우리와 교황청의 관계를 개선시켜 줄 수 있다면 좋겠지.”

“물론 저야 영광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저 아즈텍이라는 것이….”

재상이 말꼬리를 잘랐다.

“그대가 교황청에 가 외교적 업무를 수행하면 어찌 지원군을 받아낼 수 있지 않겠소? 해상십자군의 선봉대는 실패했으나 본대는 성공했고, 따라서 성하께선 아직 여력이 남아 있으실 게요.”

“그렇습니까?”

외교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감무소식인 잔은 재상의 말에 무력하게 휘둘렸다.

“아국은 이제 해상 봉쇄를 풀 것이오. 이제 그대들이 자유롭게 유럽을 오갈 수 있게 배려해주겠소. 아니, 속도가 제일 빠른 협저선을 그대에게 주어 교황청까지의 여정을 빠르게 할 수 있게 해주지. 게다가 만약 그대가 아국과 교황 성하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소할 수 있다면, 아국 또한 여력이 생기는 터라 누벨 오를레앙에 대한 지원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요구사항이 있소이다.”

재상은 탁상에 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일단 첫째로, 우리는 단연코 7대 보편 공의회의 결정을 신성하게 여기고 있소.”

“…….”

“그래서 우리 고려의 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은 삼가 주면 좋겠군.”

잔은 신학적 소양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마티외를 찾고 싶었으나, 재상은 주교를 이미 피곤하겠다는 이유로 처소로 들여보낸 이후였다.

사실 그녀는 신앙보다도 사람을 위해 싸웠었다.

잉글랜드가 이단이라 그들에 적대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이 위험하니 싸운 것이지.

지금은 누벨 오를레앙이 위험하고.

“우리는 창양 총대주교좌를 요구하는 바이오. 상당한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과 함께.”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표정을 보아 하건대, 이 사실 자체가 엄청난 파급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걸 잔은 어렴풋하게 느꼈으나 이 자리에서 판단이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나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속 시원하다.

잔은 멍한 얼굴로 재상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녀가 생각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몇 가지 요구사항을 더 쏟아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필요는 없소. 우리의 요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니, 나머지 생각은 교황청으로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시구려.”

재상은 할 말을 다 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구사항이 적힌 두루마리를 집어 든 잔은 무력하게 처소로 돌아왔다.

머리가 아프다.

* * *

이후 재상은 그녀와 만나주지 않았다.

공무가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잔은 어딘가 서운했다.

그러나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딱 하루 동안 정녕당에 머무른 뒤 다시금 짐을 꾸렸다.

향기롭고 푹신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들이 그녀를 유혹했으나, 그녀 또한 상민과 마찬가지로 절제력이 뛰어났고 어깨에 올린 짐이 무거웠다.

그녀는 일정을 재촉했다.

또다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여의나루에서 배가 빠르게 출발했다.

이번에는 유럽으로 향하는 까닭에 재상의 기함을 탈 수는 없다.

본래 모르고 있던 것을 누리면 그다음부터는 기준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배 안에서의 생활은 원래 이런 것이었으나, 특별한 대우를 누려왔던 잔은 로마로 향하는 배 안에서 예전의 새벽호를 아주 조금 그리워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마티외는 이 손녀 같은 여인이 가져온 요구사항을 보며 기함했다.

“교황 성하의 권위를 아예 부정하는 처사입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걸 말씀이시라고.”

마티외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이도가 인정할 만큼 인품이 올곧고 상당히 모범적인 성직자 중 하나였지만 아직 동시대의 성직자들처럼 유연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후우… 제가 생각하기엔 이 조건들은 성하의 앞에서 꺼내지조차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논의 자체는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에우제니오 성하께선 그러셨겠죠.”

마티외 또한 펠릭스 5세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대체 유럽이 지금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어떠한 정보조차 알 수 없는 그들은 좁아터진 배에서 한숨을 내쉬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한동안 아내가 아무도 쓰지 않는 지하실을 꾸미느라 고생 좀 했다.

유럽 원정에서 막 돌아온 덕에 물품들을 구하는 것은 딱히 힘들지 않았다.

카디스의 주교에게서 받은(약탈한) 꽤 상태가 좋아 보이는 라틴어 성경도 이럴 때 쓰임새가 있었다.

‘흐음.’

고려에 카톨릭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화주, 그리고 앞으로 낼름 삼킬 예정인 누벨 오를레앙까지.

게다가 상민은 인구의 흐름 자체를 외부에서 유입시키는 것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놈의 피임낭.’

상민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개발한 이 원시 콘돔은 한동안 자신만 누려왔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사람은 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

고무의 발달로 피임낭이 발명되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

게다가 풍토병인 매독은 이 피임낭의 확산에 몹시 큰 일익을 담당했다.

의원들은 이 피임낭으로 매독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었으나, 민간의 소문이란 다소 허황되게 전해지기 마련.

그 질이 조악해도, 어쨌거나 임신 확률은 감소한다.

따라서 그의 대계에도 아주 조금의 흠집이 만들어졌다.

‘좋게 생각하자.’

물론 출산율에 치명타라 볼 수는 없었다.

약간 감소했을지언정 아직 농업 위주의 사회.

노동력은 가문의 재산이다.

대평원의 평야도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확장된 타완틴수유의 땅들은 적극적인 사민정책에도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

여전히 고려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외부의 인력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지.

골고루 잘게 쪼개어 내방에 분배해 살게 하고, 충분한 동화과정을 겪게 한 뒤 이 내방의 인원들을 사민으로 올려보내는 것이다.

이런 순환동화정책은 내무부의 가장 근본적인 정책기조였다.

집단촌 형성을 막고 서로 최대한 통혼하게 하는 것.

사람은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초기에는 다소 불협화음이 있겠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일정한 임계점을 넘는다면 동화는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게다가 고려는 이미 건국부터 수많은 피들이 섞여 왔다.

상민은 문득 지도에 있는 조그마한 반도를 바라보았다.

먹기 딱 좋은 그곳.

비슷한 문화와 비슷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자들.

한반도에 있는 순박한 조선인들을 납치하는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그들이 충분히 환멸을 느끼고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데리고 오는 편이 편하다.

상민은 조상들이 가진 그 땅에 대한 집착적 태도와 유교적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창양에선 너무 멀기도 하고.

태평양 횡단은 대동양 횡단과는 격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유럽은 항로상 가까우며 이미 인구 포화 상태에 서서히 도달하고 있었다.

야금야금 빼먹기만 하면 되는 것.

게다가 봉건제가 무너져 내리면서 도시로 이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신분적 혼란기였기도 했다.

인구 수급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동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스럽게 종교가 꼽힐 것이다.

예전에 한 번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항상 그래왔듯, 고려는 불교와 더불어서 기독교도 포용할 예정이었다.

인류에 있어서 진정한 종교 해방은 종교의 자유 이후에나 가능하다.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교회를 두들겨 팬 소련도 결국 러시아 연방으로 바뀐 이후에 다시 정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람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당연하게도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자신은 그 예상을 대충 백 년 뒤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유럽의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는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기존의 고려인들에겐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상민은 지금의 고려인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생각과 사상을.

자신의 아내에게 협조를 구해, 저들을 기만하기 위해 카톨릭의 제례를 어찌 숙달시켰지만, 연화는 도통 신앙을 가질 생각을 잘 하지 않았다.

평범한 일반인인 연화도 그러니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세계 일주와 오현제 치세를 통해 생겨난 선민사상은 이럴 때 엄청난 효력을 가져왔다.

고려인이라는 극도의 자부심.

카톨릭이 변화하지 않는 한, 이들은 고려인의 영적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

종교개혁과 브레스트 회의가 있기 전, 상민의 요구사항은 교황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류의 화두였다.

그러나 상민은 재치권을 얻지 않는다면 카톨릭 자체를 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대의 개신교마냥 중앙 교단의 어떠한 통제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었다.

머나먼 땅에 있는 교황청에 복종하는 카톨릭 성당과 후대에 난립하여 기업화되는 개신교 교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지 않는가.

‘안 되면 되게 하라.’

만고의 명언이다.

튀니스에서 거둔 나름대로의 승리를 최대한 포장하고 있던 펠릭스 5세는 교황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을 이미 저지른 상태였다.

돈도, 위신 문제도 아니었다.

수장 자체가 가지는 모순점.

교황청의 세속군주화.

그래서 상민은 재치권을 요구했으나, 한 발짝 더 나아간 권리를 받아올 것이었다.

재치권 요구는 따라서 다른 속셈도 있었다.

유럽 사회에 불이 붙은 도화선을 던지는 것.

‘너희들이 우리를 베드로의 신성함으로 공격했다면, 우리는 너희들을 그 후계들의 부정함으로 공격할 것이니.’

폭탄을 실은 배가 이미 로마로 떠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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