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2화 (122/653)

고려―카스티야 전쟁(6)

길게 펼쳐진 해변.

십자군 쪽에서 백기를 든 기마병들이 선두의 백마를 따라 카디스로 향했다.

고려의 총병들도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침울한 얼굴을 한 알폰소와 몇 명의 기사들이 상민이 마련한 회의장에 발을 디뎠다.

그들의 표정를 관찰하던 상민이 입을 뗐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구려.”

네놈들의 예법이 이거라지?

공식적인 유럽의 군주와 처음으로 대면한 상민은 악수를 청했다.

물끄러미 가면의 남자를 바라보던 알폰소가 눈을 질끈 감더니 손을 맞잡았다.

악력이 천천히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범인이라면 아프다고 질겁했겠지만, 상민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다.

그는 조금 더 세니까.

조심해, 아예 손의 뼈를 다 으스러뜨려 버릴 수 있어.

자신이 들인 힘 이상으로 고통이 느껴지자 땀을 흘리던 알폰소는 이윽고 유치한 장난을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엔리케는 잘 있소?”

“멋진 풍경이 보이는 장원에서 호화로운 침대에 자며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지. 받는 대접이 저지른 행동에 비해 너무 과분하지만.”

알폰소는 얄미울 정도로 빈정거리는 이교도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대외적으론 그들이 보이는 행보가 나름대로 상식적이라 이곳까지 친히 거동했다지만 사실은 강 하류에 있는 자신의 함대와 이곳에 있는 군대 모두 이미 싸울 의지를 거의 잃어버린 상태여서였기도 했다.

나름대로 상식적?

오히려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는 유럽과 중동의 군주 혹은 영주들 평균치를 생각해보면 고려의 행동은 신사적이라는 것을 넘어 두려움까지 심어주고 있었다.

알폰소는 군주 된 입장에서 이를 생각해보았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하나. 실로 확고하며 엄청난 체제이다.’

봉건제의 끄트머리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는 동시대의 절대왕정 중 가장 압도적인 관료제와 가장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고려의 체제 자체에 극도의 공포심을 품었다.

그리고 일말의 부러움도.

“무엇을 원하시오.”

앉으라는 말도 없었지만 알폰소는 창백해진 손을 주무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표정이 실로 좋지 않아 보여 상민도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답 대신 간단히 지도를 가리켰다.

알폰소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카나리를?”

고려가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카나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

“그는 카스티야인이며, 카스티야의 국왕에 의해 적법하게 공위를 얻은 카스티야 공작이오!”

알폰소가 버럭 화를 냈다.

“호오, 내 듣기로는 첫 번째 카나리 대공은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던데?”

또한 그 선조들의 적법한 공위를 몰수한 것은 그대의 동생이었고.

고려의 재상은 마치 유럽 사회에서 한 백 년은 살았던 것마냥 봉건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봉건제에서 하위 귀족의 작위를 아무런 이유 없이 몰수하는 것은 몹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카나리 공 산초 1세의 작위 압류는 사실 명분이 없었다.

알바로와 결탁했다지만, 결탁을 다 같이 했던 다른 귀족들은 멀쩡하거나 오히려 엔리케 밑에서 호의호식하는데 산초 1세만 두들겼다?

그냥 가진 돈이 탐나서 그런 거지.

알폰소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충분히 해줄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카나리는 아라곤의 땅은 아니다.

게다가 그의 동생이 한 일들도 있으니, 뒤처리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기도 했다.

패배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많지가 않다.

“카디스 항구에 대한 개항, 그리고 카디스를 고려에 100년 동안 ‘조차(租借)’해 줄 것.”

알폰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차? 조차가 무슨 뜻이오?”

“빌려준다는 뜻이오. 100년 동안 카스티야의 카디스라는 항구는 고려의 항구로서 기능할 것이고 아국의 주권과 아국의 법에 의해 통치되겠지.”

“…….”

알폰소는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이 조차에 대한 사전 관념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행위의 여파를 쉽사리 짐작할 수는 없었다.

땅을 빌려준다라.

“군대의 주둔은 허할 수 없소.”

“물론, 카디스에는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용병대가 주둔하며 치안을 확보할 것이오. 어떻소?”

“그놈들?”

알폰소는 배신자들에게 이를 갈았지만, 돈에 배신하는 너무나 고전적인 이탈리아의 용병다웠기에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도 않은 종자들.

그래도 고려의 붉은 제복들보다야 백만 배 나았다.

‘백 년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차피 남의 땅이다.

고려는 딱히 배상금을 청구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미 두 항구를 가짐으로써 얻는 이익은 그것보다 많기도 했고, 배상금이라는 것 자체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가하는 압력이 충분할 경우에만 성립되는 경우.

실제로 유럽 원정을 떠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는 영 허무맹랑한 소리가 틀림없었다.

다만 그들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듣는 알폰소가 어이가 없어 할 만큼.

“카스티야 전 국왕, 후안 2세의 공식적인 복위를 요구하는 바요.”

“…귀하는 지금 짐이 카스티야를 대리하고 있는 이 순간 자체가 그에 모순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시오?”

알폰소는 아라곤과 나폴리 그리고 기타 수많은 왕국들의 왕이지만, 카스티야에 대한 권한은 없다.

다만 카스티야 섭정공이라는 그의 동생의 지위를 대리하여 처분할 뿐.

만약 이 고려가 말한 대로 후안 2세의 본격적인 정계 복귀가 이루어진다면, 고려와 이 아라곤 왕 간의 조약은 어쩌면 효력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민은 태연했다.

“그대들에게 들이민 아국의 대포와 후안 2세에게 들이밀 아국의 대포는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대포라오. 걱정할 사항은 아닌 듯하군.”

“…….”

생각을 해 보지.

알폰소는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 얼굴이 몹시 붉어진 채로 선실 밖으로 나갔다.

상민은 피식 웃었다.

10분.

10분 내로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상민은 그가 말한 것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후안 2세는 이미 정신적으로 붕괴되었고, 이미 살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고려의 요원들이 천천히 투여한 약은 그의 정력을 돋구지만 그의 육신의 체력 자체는 빠르게 소모시킬 터.

‘마침 임신도 했다지?’

그리고 후안 2세의 후예는 오히려 알폰소보다도 고려에 친밀하게 될 것이니.

― 달칵.

정확히 팔 분 십오 초군.

알폰소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동생을 안전하게 풀어주시오.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겠소.”

* * *

고려가 요구한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테네리페를 포함한 카나리 제도의 양도.

뭐, 조약이 성사되기 이전에 이미 고려는 이곳에 잔뜩 물자를 실어놓고 테네리페의 시가지를 자신의 입맛대로 꾸미고 있었다.

두 번째, 카디스의 99년 조차.

세계사 속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조차지(租借地, Concession)의 개념은 상당히 독특했다.

이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개념이니 앞으로 수많은 나라들에 의해 쓰일 것이 자명했다.

마지막으로 후안 2세의 복위.

이는 곧 엔리케가 가진 카스티야 내에서의 모든 영향력을 말소한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래도 목숨보다는 귀할 리 없었기에 알폰소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후안 2세는 아이가 없다.

알폰소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빠르게 처리할 수만 있다면 여파는 적을 것이다.

고려는 일단 요구사항이 관철되는 듯하자 카나리 점령 직후 미리 테네리페에 데려온 엔리케가 쓴 근황 확인용 서신을 알폰소에게 건네주었다.

알폰소는 그 서신을 확인했다.

과연 엔리케의 글씨체가 맞았다.

서신은 대체로 평이한 논조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다는지.

별 특이한 것은 없었다.

고려인들이 꼼꼼하게 검토했으니, 그들의 입맛에 어긋나는 내용은 담기지 않았겠지.

하지만.

‘어휘가… 조금 이상하군.’

동시대의 귀족 예법에 통달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조그마한 이질감.

게다가 같은 가족으로서 알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표현들.

엔리케의 성정, 좋게 말하면 칠전팔기의 의지와 나쁘게 말하면 뒤끝이 구린 성정을 익히 알고 있던 알폰소는 동생의 서신에 담긴 뜻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이 구절과 이 구절은 왜 성인의 말을 인용한 거지?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데.

알폰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그 옆에 쓰인 숫자들을 바라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성경책.’

엔리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답게 성경책을 달달 외우고 있는 자였다.

어디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알고 있는 놈.

동생은 숨겨진 뜻을 읽어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알폰소는 정신없이 그 서신을 해석했다.

* * *

다음 날.

알폰소가 십자군 지휘소에서 다시금 회의를 소집했다.

고려와의 마지막 조약 이행을 확인할 자리였다.

기사들은 여론이 갈렸다.

“아직 교황청의 허락도 받지 못했는데, 성급히 결정하는 것은 안 됩니다.”

“시간을 더 끌면 엔리케 공이 위험합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시지요.”

알폰소는 굳은 얼굴로 지휘부를 둘러보았다.

“엔리케가 서신을 보냈소.”

“……?”

“짐에게 준 편지, 오직 짐만이 해석할 수 있는 편지에는 고려의 함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방책들이 적혀 있었소.”

제장들이 기대하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백병전을 유도하는 것.”

바로 반론이 나왔다.

아라곤의 해군을 지휘하던 늙은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곳은 지중해가 아니었다.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백병전을 유도하기 전에 이미 대양으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카디스 항구에서 멀어질수록, 승산은 형편없이 떨어질 겁니다.”

그러나 알폰소의 표정은 더욱 침울해졌다.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은 그의 본심과는 몹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벌어진다면?”

“…….”

제장들은 침을 삼켰다.

주전파와 주화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주화파의 한 기사가 슬그머니 말했다.

“엔리케 공은 죽음을 결단하신 겁니까?”

“그래. 더 이상 추한 꼴을 보기 싫다는군.”

동생으로서 형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책략 말고도 그 의지력 강한 엔리케가 가진 구구절절한 공포심과 결의도 함께 적혀 있었다.

동생아.

대체 넌 무엇을 보았던 것이냐.

엔리케는 ‘순교자’로서 고려의 침략을 막고 싶어 했다.

그 고결한 행동을 반대하기에는 알폰소 또한 고려에게 큰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노기사가 말했다.

“그러나 폐하, 고려의 함대가 항구를 떠나기 전에 제압을 하기 위해선 빠른 가속력을 지닌 갤리(Galley)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갤리의 대부분은 지중해에 있지.”

그렇군.

노기사의 말을 받으면서 알폰소는 혀를 찼다.

아라곤의 갤리는 애초에 대양 항해에 필요가 없는 배다 보니 전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서 연안을 방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베네치아의 함대 또한 팔레르모에서 교황청의 2차 용병대와 함께 합류해 온다 합니다. 이들과 같이 고려의 함대를 한순간에 들이칠 수 있다면 승산은 충분할지도 모르겠군요.”

노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해에서 고려가 나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 유명한 베네치아의 갤리가 활약할 순간이 오긴 할 것이다.

본대의 지휘관들이 다시금 시끌시끌해지자, 알폰소는 회의감이 잔뜩 든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동생의 죽음은 어떠한 고려 대상도 아닌 듯싶었다.

* * *

“알폰소가 우물쭈물하는군.”

“시간을 끌려는 모양입니다.”

“흐음.”

상민은 생각에 잠겼다.

“뭐, 항구에 있을 때 기습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 방법 이외에 아국의 함대가 위기에 빠질 순간은 없으니까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참모장 이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접전에서 아국의 함대가 약하다… 맞는 말이긴 하지.”

처맞는 말.

상민은 흘깃 하부 갑판에서 병사들이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나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상민의 얼굴에 약간은 공포심 비스무리한 것이 보였다.

‘크흠.’

자신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통 죽지 않는다.

화살이 박혀도 심장과 뇌 기타 주요 장기가 아닌 이상 대체로 빨리 회복할 수 있었고, 일반적인 상처보다도 치사율 높다는 환부에서의 감염 또한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그러나 저 시한폭탄(실제로)은 달랐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터트리는 저 폭탄은 그 무게만큼이나 위력도 확실해 자신에게 회복의 기간을 주지 않은 채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이 무기를 개발한 당사자에게 더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자네는 참모장 말고도 명장이라는 칭호를 달아야 해.”

저번 신기전 자체는 고려의 무관들에게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들어가는 화약이 너무 많으니 차라리 포병대를 늘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조란탄 같은 산탄의 예를 들며, 신기전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이향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어, 신기전의 개량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것이지.

명장을 달 수 있을 만큼.

누누이 말하지만 고려의 ‘명장(名匠)’의 칭호는 기술관료들에게 최고의 찬사다.

육분의를 개발한 정왕(貞王, 태조 해민의 맏아들이자 태종의 형) 해준.

진자 시계를 개발한 유각현.

초기 경선의를 개발한 장영실 등.

일신의 신분에 구애받지도 않았으니까.

“과찬이십니다.”

이향은 겸양을 떨었다.

이제는 확실히 저번 전투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듯했다.

숭무감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향은 동생 이유보다도 훨씬 더 전략에 소질이 있었지만, 야전 지휘관으로서 부임하기는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그가 하루 종일 하는 것은 화약을 만지작거리는 것.

위험한 일이라 이도는 질색했지만 그의 맏아들의 끈기는 대단했다.

신기전과 화차,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동시대 고려국이 가진 화기의 다양성을 크게 늘렸고 이 압도적인 화력우세교리를 직접 야전에서 이행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아니야. 그대의 공은 이미 충분하네. 본국으로 돌아가면 내 필히 그대에게 명장의 칭호를 내려주지.”

“감사합니다. 당하.”

이향도 상민의 진심을 알아차린 듯 더 이상은 겸양하지 않고 슬쩍 웃어 보였다.

‘척탄병을 육성하는 게 또 문제긴 하지만.’

알폰소가 흉계를 꾸미든, 안 꾸미든 상관없이 고려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가 보낸 서신이 그라나다와 페스(فاس)에 도착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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