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1화 (121/653)

고려―카스티야 전쟁(5)

[해가 지는 석양에서의 침공은, 기존의 유럽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안락에 대한 파괴이자 기존의 모든 관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AD 1511.

니콜로 마키아벨리.

고려사 논고에서 발췌.

십자군 함대는 패퇴했다.

수많은 함선들이 동예 부근에서 침몰했다.

코그선들은 마치 양 떼와 같았고, 고려의 함선들은 늑대였다.

주님의 가호를 받아 이곳에 무사히 도달한 수송선들은 다시는 이 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할 양치기, 십자군의 카락들 또한 늑대의 이빨에 갈려 나갔다.

함대를 이끄는 제독은 분전하다 죽었고 남아있던 선장들이 서둘러 바다로 도망갔다.

살아남은 숫자는 기껏 절반.

고려 함대들은 굳이 수평선 너머까지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기에 한동안 존재하지도 않은 그림자와 싸워온 십자군 함대는 돌고 돌아 도착한 카스티야의 항구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살았다!”

과달키비르강을 거슬러 올라 세비야에 도착한 선원들이 생존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동안, 한 선장은 대표로 원정군 사령부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대대적인 규모의 본대를 조율하고 있던 알폰소는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온 선장에 반색했다.

“그래! 마침 궁금하던 차였다. 선봉대는 어찌 되었나?”

그 앞에서 참담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선장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흐느끼듯 울어대었다.

“말을 해라! 말을!”

“서… 선봉대가… 전부….”

마치 포로를 취조하듯 입을 열게 한 알폰소가 동생의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에 빠졌는지 비틀거렸다.

“엔리케가….”

알바로 데 루나에게 붙잡힌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흥정이 가능한 정치 싸움이 아닌, 십자군으로서 이교도에게 포로로 붙잡힌 것이 아닌가.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

그의 동생은 아마 죽을 수도 있었다.

알폰소는 이 시대의 사람으로는 꽤나 드물게 형제간의 우애에 대해 진심으로 믿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엔리케는 항상 미안한 존재였다.

암살 기도가 있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알바로를 축출하는 것에 동조한 것도 그 일환이겠지.

알폰소가 절망에 빠질 때쯤, 마치 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 두 번째 전령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테네리페가 공격당했답니다!”

* * *

테네리페에 휘날리는 고려의 깃발을 감상하는 것은 시간을 두고 해도 되는 일.

육분의와 시계를 이용해 최단 거리 항로를 택한 고려군은 꽤 먼저 출발한 십자군의 잔존 함대의 꽁무니를 쫓기보다는 카스티야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을 때 격차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 함대의 꽁무니를 발견했을 무렵 근위함대는 그들에 대한 추적을 단념해야만 했다.

세비야는 내륙의 항구도시였다.

즉 과달키비르강을 통해야 한다는 것.

물론 내륙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고.

십자군 본부는 고려의 함대가 너무 빨리 온 탓에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인지 대응이 느렸다.

직접 독촉하며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가긴 무리겠나?”

제독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을 끼고 방어하는 전략은 수도에 이보다 훨씬 더 길고 큰 강을 끼고 있는 고려도 익숙했다.

“아무리 아국의 함대라 해도 강기슭에 매복한 대포에 피해가 누적된다면 큰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상민은 별 미련 없이 기수를 돌렸다.

“남하하라. 적당한 항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작전계획상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었다.

* * *

카디스(Cadiz)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매우 오래된 항구였다.

세비야의 규모가 워낙 커서 그렇지, 예전부터도 꽤 이름 날리는 항구였고, 대양의 시대가 밝아온 지금은 세비야보다도 더 큰 입지의 이점을 누리며 서서히 그 위치를 넘보고 있었다.

모양도 다소 특이하다.

상당히 큰 만 두 개 앞, 발달된 사주와도 같은 반도 지형 위에 세워진 도시는 양옆으로 매우 길쭉했다.

육지와는 정말 길고 얇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거의 200미터 정도의 너비밖에 안 되었다.

만약 이곳을 틀어막는다면, 육지의 공격은 몹시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바다?

스스로 나와준다면 감사할 일이지.

항구는 테네리페보다도 훨씬 더 방비가 잘 되어 있었다.

옛 역사에선 건축술 역시 유럽이 동시대 최고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상민은 기다란 해안가에 나란히 정렬하고 취약지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일제 포격을 퍼부은 다음 균열이 생긴 성벽을 통해 상륙전을 감행했다.

물이 튀기는 곳에서의 전투가 총병에게 좋을 리 없어, 처음부터 근위군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네놈들이 왜 거기서 나와!”

성벽 위에 있던 카스티야군들이 고려의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탈리아 용병대를 바라보며 비명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페데리코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받은 첫 콘도타의 중압감과, 실패했을 때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찌 나름대로 잘 지휘를 해 나갔다.

니콜로의 총애하는 제자인 그는 스승이 죽은 것에는 딱히 슬픈 감정을 품지 않았다.

“보니파시오! 스테파노! 망루를 겨냥해라!”

원래부터 페데리코를 따르던 부하들은 제각기 계급이 올라 용병대를 이끄는 중견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동료들을 통해 지휘를 하는 그는 유럽의 공성전에는 자신이 있다는 듯 서서히 중압감을 떨쳤다.

칼을 뽑아 직접 맨 앞에서 돌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의 칼에 찔린 자가 원망 섞인 눈으로 페데리코를 바라보며 피를 흘렸다.

“대체 왜…?”

“우리도 어쩔 수 없어.”

게다가 용병은 다른 무엇보다도 받은 돈에 의해 움직이거든.

그는 찌른 칼을 다시금 뽑아내었다.

그들의 옛 수뇌부들은 아직 십자군 원정의 대가를 전부 지불하지 않았다.

선입금은 탐욕스러운 니콜로가 전부 챙겼을 뿐.

그 많은 금화들을 전부 노잣돈으로 쓰지도 못할 거면서, 왜 항상 그렇게 끌어안고 가는 걸까.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죽은 동료들의 유가족에게 금화 한 개라도 쥐여주기 위해선 악마라도 손을 잡아야 했다.

이 시대의 낭만파 콘도티에로인 페데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했다.

‘믿어야지, 그의 약속을.’

* * *

용병대에 의해 선착장이 점령되자 붉은 근위군이 바다로부터 쏟아져 들어갔다.

― 타타탕

이탈리아 용병들과 부대끼면서도 고려군에게 석궁과 활, 그리고 머스킷을 겨냥하던 카스티야 병사들이 함선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산발적인 사격 몇 번 만에 선착장을 점거한 고려군 병사들은 붉은 제복에 물, 혹은 피조차 별로 묻지 않은 채 가뿐하게 발을 디뎠다.

이탈리아 용병대는 무엇에 쫓기듯 항구의 시가지를 서둘러 정리했다.

근위군이 할 것이라곤 정리된 항구를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불규칙하게 지어진 카디스의 이층, 삼층집들은 중세 특유의 더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악취도 좀 난다.

아예 부숴버리고 새롭게 지어볼까.

상민의 다소 과격한 생각을 읽었는지 붉은 제복을 입은 침략자들의 눈을 피하며 여인들의 떨리는 손길이 창문을 서둘러 닫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고려 상인과 다소 빈번하게 접촉한 테네리페의 주민들은 고려인에 익숙했고 심지어 점령군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고려어를 배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자신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할 터.

교황청의 선동에 놀아난 자들만이 가득할 것이다.

두려움은 이해가 가지만 창문을 닫는 의미는 없었다.

고려인들이 야만의 종족이라면, 가벼운 나무판자를 발로 차고 들어가 아낙네의 머리채를 잡고 제압을 한 다음 강간을 할 것이고 욕구를 푼 이후에는 불을 지른 뒤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즐겼을 테니까.

그러나 근위군은 마치 얼음장도 같은 규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다.

평소의 훈련과 군의 기강이 잘 잡혀 있다는 것이 첫 번째일 것이고.

뒤에 그 무시무시하다는 고려의 재상이 보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일 것이고.

애초에 카스티야인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 전우들을 잃어 본 경우가 적다는 게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분노를 유발할 거리가 별로 없는 셈.

조금 잔혹하지만 솔직한 말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입장에선 감정이 별로 없는 법이다.

심지어.

입이 튀어나온 근위군 사관이 이탈리아 용병대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상민의 귀에 들렸다.

“저놈들이 우리 군공을 다 빼앗아가는구만.”

병사 하나가 그 옆에서 무심결에 주억거리다가 옆을 보고 입을 쩌억 벌렸다.

“쉿, 김 참교님! 옆을 보십시오!”

말을 꺼낸 근위군 사관이 그 말에 옆을 돌아보고는 비명을 삼켰다.

“흡!”

‘이런 젠장!’

하늘보다 높다는 연대장도, 근위대장도, 심지어 원정군 사령관도 아닌 제국의 시중이 바로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도 근위군으로 오자마자 갑자기 마주치는 계급의 평균이 월등하게 높아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제국의 최고 실세 옆에서 이렇게 말실수를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시중은 제식에 따라 발 맞춰 걸으며 안섭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찰을 슬쩍 보는 것 같았다.

뭐 됐다.

“김안섭 참교?”

“예! 참교 김안섭!”

행군하는 부대의 보폭은 꽤 빠르다.

그것을 굳이 따라오는 시중은 끊임없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아쉽나?”

“아닙니다!”

사관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똥을 밟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근위군은 역시나 멋진 부대답게 권리도 많았지만 그에 비례하는 의무를 요구했다.

매일 아침 행군과 제식, 그리고 오후의 사격 및 전술 연습과 정신교육.

특히나 원정을 앞두고는 숭무감에서 나온 군관들에게 잘게 쪼개져 단기간에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담컨대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그 시절들은 차라리 아름다운 시간들이라 칭할 수 있으렷다.

머리가 녹아내릴 듯한 표정의 김안섭을 바라보던 시중이 말했다.

“느껴지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도시의 증오가 느껴지느냐 이 말이야.”

그는 고갯짓으로 아직까지 빼꼼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가리켰다.

“저들의 시선을 보라. 우리를 두려워하나, 증오하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 악명은 페데리코가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

안섭은 항상 그렇듯 말을 뱉어놓고 후회하는 성격을 가졌다.

“저들이 증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아국의 군대는 능히 저들을 정벌할 수 있습니다.”

“대낮에 정정당당히 오면 그렇겠지.”

“…?”

“저들은 한밤중 야음을 틈타 몰래 나룻배를 타고 와 성벽을 넘어 초병의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네.”

저들의 도시니, 저들이 더 잘 알겠지 않은가?

“…….”

“또한 몰래 우물에 독을 탈 수도 있겠고.”

“…….”

“묻지. 귀관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싶나?”

“……아닙니다. 저는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을 전부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해 주지. 넉넉한 정착지원금도 함께 주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의 연대장이 푸르딩딩한 얼굴을 한 채 시중의 곁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본 안섭이 드디어 올바른 말을 꺼냈다.

게다가 아무리 근위군이라지만 이곳에 복무하고 싶진 않았다.

만약 가족을 이곳으로 데려와도 문제였다.

사실상 내륙이라, 저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곳.

차라리 카나리가 백만 배는 나았다.

전투가 가끔은 생각날지라도 매번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함대는 항상 이곳에 정박해 있지 않을 것이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 * *

카디스를 집어삼키고 며칠이 흘렀다.

꽤 크고 유서 깊으며 실제로도 중요한 내륙의 도시를 꿀꺽 먹은 후 잠잠한 고려.

오히려 몸이 달아오른 것은 십자군이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선봉대는 박살이 났고, 지휘관이자 아라곤의 왕족은 포로가 되었으며, 심지어 본토 내륙의 항구까지 고려가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나 대항할 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함대 대신 육지의 병사들을 빠르게 움직여 카디스의 진입로 앞에 도달했지만, 이미 저들은 확고한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처처척

붉은 제복은 그 수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따라서 고려군의 화력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무리들이 호언장담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저들 스스로 땅에 발을 디딘 지금이 절호의 기횝니다!”

“당연히 뚫을 수 있지요!”

“저들은 신성한 카스티야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십자군의 기마들이 돌격했다.

히네테(Jinete)라 불리는 기병은 이베리아 특유의 구릉지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훌륭한 경기병이었다.

“죽여라!”

“건방진 고려 놈들!”

창과 칼을 휘두르며 꽤나 자신감 넘치게 해변의 관문을 내달린 그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본디 기병은 너른 들판에서 총병을 요리한다면 특유의 기동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전략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전열보병의 시대가 조금씩 밝아와도.

그러나 이 좁은 해변, 오로지 총구를 바라보며 말을 내달리는 것은 그냥 절벽으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총탄을 피하고, 심지어 함대에서 쏘아지는 포탄도 피하며 대열에 끝에 도달한 소수의 인원들도 고려인들이 아닌 꽤 익숙한 라틴계 남성들이 치켜든 창에 꿰여버렸다.

도무지 답이 없어 보였다.

일단 이 좁은 해변가는 임시로 설치된 간이 방해물만 존재했으나 마치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마냥 견고해 보였다.

게다가 저 고려인들은 무슨 총탄을 기계처럼 저렇게 빨리 장전하고 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숙련된 총병들의 집합이 이렇게 무서운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도 꽤 많은 전쟁을 다닌 군주.

느릿한 보병대를 저기 들이밀어봤자 어떠한 결과가 도출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저곳을 돌파한다 치더라도, 함대를 이용해 줄행랑을 칠 것이 뻔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동생 엔리케는 어쩌고?

알폰소는 화친을 청하기로 했다.

이미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선봉대를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심지어 패퇴하는 함대의 꽁무니를 득달같이 쫓아와 이곳을 함락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이 원정이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우울한 얼굴로 저들의 함대를 쳐다보니 마침 대서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이 세상이 어찌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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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하는 페데리코의 풀네임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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