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카스티야 전쟁(4)
지휘소를 나온 상민은 쉬라는 말에도 아직 쉬지 않고 그를 기다린 사령관에게 물었다.
“고할 것이라도 있는가?”
원정군 사령관은 다소 착잡한 얼굴을 보였다.
“황상의 환후가 더욱 미령해지신 모양이옵니다.”
“그래….”
이미 젊음이 다 지나가 버린 해윤은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앓아 누웠었지.
친정을 자신했는데 정작 자신이 직접 이곳에 와야만 했다.
익숙한 일이다.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반의 근위군은 본국으로 귀환하라.”
“나머지는 원정에 필요치 않으십니까?”
“필요치 않다.”
“함대는 어찌합니까?”
“본관과 함대 또한 이번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올 것인즉, 귀환하는 근위군은 태자 전하를 엄중히 숙위하여 제위에 어떠한 혼란과 혼선도 남겨두지 말라.”
어차피 즉위할 권리와 능력을 모두 가진 자는 현 태자 해광밖에 없다.
예전의 과오를 되풀이하기 싫어 이번 대의 군주 교육은 착실히 시켰으니 그 품성에 대해 딱히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령관이 서둘러 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은 부관에게 물었다.
“포로들은 어떠한가?”
“경상자들은 의원들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기함으로 직진하려던 발길을 돌렸다.
“그쪽으로 가 보지.”
* * *
참혹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우를 받고 있었으나 눈에는 초점이 영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민은 그들을 죽 둘러보았다.
“용병들이 많군.”
“생존성 하나는 탁월한 종자들이지 않겠습니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카스티야 병사들과는 별개로 이탈리아의 용병대는 꽤 많이 살아남았는지 생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
상민은 죽은 자들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꽤 많은 부분 비슷하게 따라온 수석식 소총.
그들이 모자랐던 것은 단지 전술에 대한 개념의 부족, 그뿐이었다.
‘만약 이들의 지휘관이 니콜로라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던 냉병기 위주의 콘도티에로가 아닌 보헤미아의 얀 지슈카였다면 꽤 길고 험난한 전투가 되었을지도….’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정은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쟁취한 승리가 중요할 뿐.
게다가 그들에게는 신기전이 있지 않은가?
상민은 이향이 만든 신무기를 떠올렸다.
예전의 박물관에서나 보았던 그 조그마한 소신기전 대신, 화약을 말 그대로 가득 욱여넣어서 만든 신기전은 중신기전도, 대신기전도 아닌 이상한 무엇인가가 되어버렸다.
사실 들어가는 화약의 양에 비해 폭발량 자체는 조금 초라했다.
개별의 파괴력은 훈련소 때 연못에 던져 본 세열 수류탄이 더욱 강할지도.
효율성은 참담해서 어쩌면 화약을 낭비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그 작은 반도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였다면, 아까운 화약 소모량에 벌벌 떨면서 실전에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초가집의 흙을 퍼내 염초를 얻는 그러한 나라였다면.
그러나 고려는 신기전을 수십 개 동시에 쏘아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십 개의 신기전을 담은 화차가 또한 수십 개였고.
그 수십 개의 화차를 운용하는 부대가 또 여러 개였고.
한순간에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의 규모는 이 시기의 포병대와 감히 비교를 할 수 없겠지.
또한 이는 그냥 헛짓거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전투는 잔혹하지만 끈질긴 시간을 들여 서로의 몸에 칼을 박아 넣어야 했던 전쟁이었다.
유럽의 총병대는 아직 상대방의 전열을 박살 낼 정도로 강력한 일제사격을 할 역량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꽤나 긴 시간 동안의 혈전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동시다발적으로 선사해 준 이 화끈한 한 방은 적들의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Morale)과 규율(Discipline)까지 한 번에 박살 내고야 말았다.
저 눈동자들을 보라.
마치 바다에서 잡힌 지 시간이 꽤 오래 지난 생선의 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지도자는 누구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고려군 군관이 말을 흐렸다.
“저 청년이랍니다.”
“음?”
젊은 이탈리아인 장수, 페데리코를 가리킨 고려군 군관이 변명하듯 말했다.
“어려 보이지만 신분이 나름대로 귀하고, 이미 이탈리아 용병대 내에서도 꽤 높은 서열에 있었다 합니다.”
“그래. 알겠다.”
상민은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멍한 얼굴로 가면 쓴 남자를 바라보던 페데리코가 움찔 놀랐다.
“네가 이 남은 자들의 수장인가?”
“…그렇습니다.”
페데리코는 알아들을 만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가면의 남자에게 대답했다.
이미 의욕이 별로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지금은 불분명했다.
보통의 용병들이 한탕주의에 물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위에서 뛰노는 자들답게 성정이 대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눈앞의 이 패잔병들의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에 빠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찌해야 할까.”
페데리코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를 다 죽일 수 있으시겠죠.”
“고려는 항복한 자들을 굳이 도살하는 그런 나라는 아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노예로 파시겠습니까?”
“마침 다행인 줄 알게. 그 옛 관습은 이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질 것이니.”
“…….”
페데리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상민은 팔짱을 꼈다.
“이들을 수습할 수 있겠나?”
페데리코가 자신의 동료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큰 충격에 빠져 있지만 살아남을 놈들은 살아갈 것이다.
“…많은 세월 동안 전장에 있었던 놈들입니다.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겠죠.”
상민은 사천 명의 포로라는 군식구를 얻게 되었음에도 슬쩍 웃었다.
“좋아.”
상민은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주화를 그에게 튕겼다.
날아오는 금화를 받아 든 페데리코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콘도타(Condotta, 계약)를 받게 젊은 콘도티에로여.”
황금의 가치는 교황청이 건넨 것과 내가 건넨 게 별반 다를 건 없지 않던가?
페데리코는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포로도, 노예도 아닌 다시 풀어주어 용병 계약을 맺으려는 이 사람에게 얼이 빠진 그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괜히 악마 부대의 선봉에 서서 가문과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들이 적어도 이슬람의 군주들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 * *
카나리 제도는 카스티야령이지만 포르투갈 상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실로 대서양과 아프리카로 뻗어 나가는 유럽의 관문이라고 할 만한 이 제도는 조그마한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창출하는 부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따라서 그들의 방어 체계 또한 나름대로 견고했다.
항구에서 망을 보고 있던 카스티야 병사는 눈을 비볐다.
어제 밤새도록 노름판을 벌인 탓에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 헛것이 보이는 걸 거다.
그렇지 않다면 저 수평선 가득 메운 것들이 배라는 소리니까.
하나, 둘, 셋, 넷….
“……이런 미친.”
감시병은 계속 눈을 비볐다.
그러나 수평선의 점들은 조금씩 더 많아졌고, 더욱 커졌다.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 그가 서둘러 종을 쳤다.
― 땡 땡 땡!
요란한 종소리에, 밑의 병사들이 책망하듯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감시병은 목청껏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적 함대 발견!”
“뭐라고?”
밑의 병사들이 다소 놀란 듯 떠들었다.
해상십자군이 떠난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았는데.
카스티야 기사는 의례적으로 간을 보려는 바르바리 해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투덜거리면서도 되물었다.
“적의 규모는?”
감시병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 셀 수가 없습니다!”
― 콰과광
누범선 여러 척이 일자로 도열하여 불을 내뿜었다.
매캐한 화약 연기에 일순 시야가 흐려졌다.
“그나저나, 중범선에 타서 관찰하니 누범선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였는지 알게 되었군.”
“선미루와 선수루가 높은 까닭에 근접 백병전의 방어는 강할지라도 한쪽으로 침몰하기가 쉽습니다.”
“그래. 높은 파도와 강한 풍랑을 만나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누범선 몇 척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다소 어이없게 침몰해 버린 사고도 있었지.
그 이후 상민은 다음 세대 군용 범선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었다.
흔히 범선의 시대라 불리는 대항해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배라고 볼 수 있는 중범선 갤리온.
뭐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군함과 군함과의 전투, 그것도 원거리 포격전을 상정하고 만든 까닭에 육중할수록 미덕이라는 배였다.
육중하기 위해서는 안정성이 필요하니까, 선체가 낮아지고 앞뒤로 길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모난 선미가 참 매력적인 이 배는 남자의 로망을 충실히 자극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카락보다 대체로 덩치가 커진 만큼 실로 엄청난 목재가 소요된다.
가격도 장난 아니게 비싸고.
청해 함대는 자신의 기함 새벽호를 제외하고는 아직 건조를 할 엄두를 내고 있지 못했다.
유럽에서의 작전이 한두 푼이었어야 말이지.
군무부 또한 맛보기로 건조를 해 근위함대에 배속시켰으나 아직 제대로 쓸 생각은 없어보였다.
해양 라이벌이 등장해야 하는데, 지금 보다시피 저 라이벌 비스무리했을 뻔한 것은 고려군의 포탄 세례를 맞고 있지 않는가?
항구에서도 포탄이 날아왔으나 어림도 없는 거리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 전부였다.
망루가 박살이 나고 특유의 구부러진 철제 투구를 쓰고 있는 병사들이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으아아아!
저항의 기미가 사라졌다.
빠릿빠릿하게 행동하지 않았기에, 근위함대는 마치 성질이라도 내는 듯 몇 차례 대포를 바다에 난폭하게 쏘아 보냈다.
테네리페에서는 이윽고 백기가 휘날렸다.
상민이 약간 어색한 듯 발을 디뎠다.
처음으로 유럽에 직접 오게 된 것인가.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아프리카니까.’
피레네 이남은 북아프리카라는 명언을 남겼었다는 나폴레옹 시대 전이라도 카나리는 분명한 아프리카의 땅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어도 딱히 불만은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놀라운 사실은 이곳을 점유해도 우리의 불쌍한 병권이 죽음을 맞이했던 독도는 최동단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여러 생각을 하던 상민이 항구로 끌려온 테네리페의 총독을 만났다.
벌벌 떨며 심지어 오줌이라도 지린 듯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자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상민이 꾸짖듯 말했다.
“뭣 하는가? 고려인들을 풀어주지 않고?”
“예, 예! 그래야겠습죠. 마땅히 그래야 하지요!”
오줌 지린 총독은 엎어진 그대로 정신없이 품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그것을 총독의 손에서 빼앗은 병사 두 명이 카나리 거주 고려인들을 수용한 감옥에 가는 것을 바라보던 상민이 다시금 물었다.
“베텐쿠르―테네리페 가문의 후계는 어디 있나?”
* * *
고려의 호의를 얻었던 카스티야 귀족 가문의 후예는 몰락한 처지를 나타내듯 빈한한 장원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배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어촌 젊은이는 하루 종일 항구에 울려 퍼지는 폭발음에 집 안 구석에 숨어있다가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고려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끌려 나왔다.
“저는 아무런 잘못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남편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까 구석에 숨어 있던 젊은 여인과 아이들 또한 아버지를 잡아가지 말라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아빠! 죽지 마!”
신파극을 찍고 있던 광경을 바라보던 상민이 그를 자신의 앞에 꿇렸다.
기분을 좀 내보자.
청년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붉은 수실이 달린 날카로운 도가 그의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자 마치 혼절할 듯 겁에 질린 청년은 이윽고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의문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핏줄에 흐르는 혈통에 의한 근거로 그대를 적법한 이 제도의 주인으로 다시금 임명하니, 만약 이 뜻에 따르겠다면 마땅히 그대의 새로운 주군이신 고려의 황제 폐하께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조아려야 할 것이다.”
상민의 카스티야어는 흠결이 없었고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깔린 천 위에 엎드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작위를 빼앗기고 단순히 어촌 청년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그는 다시금 이 땅의 공작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실권은 없겠지만.
고려의 이 ‘상식적인’ 행보는 유럽에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