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카스티야 전쟁(3)
― 까악 까악
머리가 멍하다.
피치니노 용병대 휘하 지휘관 페데리코는 문득 눈을 떠 다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글게, 둥글게 하늘을 오가는 까마귀 떼가 다가올 포식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끔찍한 순간은 이미 지나갔다.
뜨거운 열과 피부에 맞닿는 육편의 조각들의 느낌 또한 이제는 과거의 일이다.
자신의 몸 위를 누르고 있는 정체 모를 육신의 주인을 확인하는 것도 지금은 귀찮았다.
단지 이렇게 그냥 조금씩 숨을 내뱉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쿨럭, 쿨럭.”
페데리코는 진흙과 핏물이 뒤엉킨 토사물을 뱉었다.
옆에 꽤 익숙한 얼굴의 부하가 멍청한 눈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해 줄 필요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 눈을 대충 감겨주고 페데리코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시신을 조금씩 조금씩 치웠다.
후, 하.
맑은 공기.
하지만 둔감해진 코에도 비릿한 피 냄새와 시신이 죽어가며 싸는 똥오줌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역겨운 고기 타는 냄새가 찔러들어왔다.
“여기 포로가 있다.”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니 저 멀리 시체들을 뒤집고 있던 고려군이 그를 발견했다.
‘젠장.’
조심했어야 하는데.
온몸에 힘도 없고 정신도 없어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
앉아서 조금 쉬고 싶었다.
단지 그뿐인데.
그에게 다가오는 병사들이 뭐라 이야기를 나눴다.
고려어에는 조예가 없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랐다.
페데리코는 중얼거렸다.
“지독한 놈들….”
그들은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마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멍청한 십자군은 사자의 입 안에 발을 디뎌 놓고, 마치 맹수를 잡은 것마냥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냥 단 한 번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끊어질 운명이었는데.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는 항상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
그러나 이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 철퍽
고려 병사들이 시체를 치웠다.
품 안에 단검이 만져졌다.
아마 휘두른다면 한 명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힘은 조금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페데리코는 그 끔찍한 광경을 떠올렸다.
단검을 쥔 손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사실 저항할 의지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 * *
처음 시작은 평범한 회전이었다.
십자군은 온주에 도착했다.
고려는 그들보다도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연기가 치솟고 있는 동예의 두 번째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군은 빠르게 회전을 결정했다.
모든 것은 다 갖춰져 있었다.
안에서의 호응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이탈리아 용병들.
그리고 백년 전쟁과 이베리아의 레콩키스타에 단련된 병사들.
방패를 든 자들과 창을 든 자들이 활과 석궁, 핸드캐논과 머스킷을 든 사수들을 보호하며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
후열에는 포병의 보호가 있었다.
카스티야의 포병대는 당대 유럽 최고의 포병대 중 하나인 알폰소의 포병대의 영향을 크게 받아 나름대로 괜찮은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우익과 좌익에는 기병대들이 따른다.
십자군의 고전적인 진형은 충분한 자신감과 충분한 가능성으로 충만해 있었다.
공성을 하고 있던 고려군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아보였다.
아마 십자군의 상륙 전, 급하게 온주를 점령하여 우위를 점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십자군은 고려의 가장 취약한 순간에 들이닥치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놀랄 만큼 동요가 적었다.
천천히 진영을 가다듬은 그들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십자군들과 대치했다.
절차와 명예.
십자군과 고려 모두 그 쓰잘데기 없는 것에 집착했다.
페데리코의 상관, 니콜로와 고려군의 총지휘관은 말을 타고 넓은 벌판의 한가운데에서 마주했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지금 이루어지는 셈이 되겠지.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다.
― 뿌우우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십자군은 천천히 다가갔다.
붉은 제복(Abrigo Rojo)을 입은 저 고려군들의 모양새가 이제는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조금 뒤엔 양측 모두 활과 머스킷의 사거리 안에 들어올 것이다.
고려군은 창도, 칼도, 방패도, 활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머스킷만으로 이루어진 부대.
긴 머스킷 끝에는 날카로운 창날이 붙어 있지만, 근접전으로 들어간다면 저것은 칼보다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젊은 페데리코는 그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십자군은 고려의 본대와 마주치지도 못한 채,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 콰쾅
빠른 투사체가 날아왔다.
자신들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 뒤로 떨어지는 무언가가 포탄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불운한 몇 명의 병사들이 육중한 탄환에 몸이 꿰뚫려 비명횡사하겠지만, 그 틈을 누군가가 메꾸겠지.
사거리상 먼저 맞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십자군의 포병 또한 이제 시작할 것이다.
“……?”
하지만 기대했던 폭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희미한 대포 몇 문의 소리만 튀어나왔지만, 그것들은 고려군의 진영에 어떠한 흠집도 내지 못했다.
페데리코는 등 뒤로 시선을 돌려 살펴보고 싶었으나, 진형에 시선이 가려져 관찰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중간 지휘관이라,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억지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페데리코는 고려군의 대포 또한 그 이후 침묵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대체 왜?’
적어도 두 번의 쏠 기회가 남아있었을 것인데.
페데리코는 어찌 되었든 좋은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머스킷을 손에 쥐었다.
계속 걸어 나간 결과 이제는 선두와 선두가 제법 가깝다.
활과 머스킷의 사거리는 이제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할 것이다.
몇 번의 총성이 오가고, 진영이 뭉개지며 냉병기의 싸움이 일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된다.
그러나 페데리코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쉬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 혹은 괴상한 휘파람 소리.
생전 처음 듣는 정체불명의 소리 이후,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날아오는 화살들이 보였다.
다소 두껍고 다소 괴상한 생김새의 그 화살들은 상식 밖의 먼 거리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막으려는 선두의 병사들과는 다르게 후미의 병사들은 다소 멍청하게 그 화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 콰앙
그리고, 페데리코는 화끈한 소리와 함께 고기 타는 냄새가 사방에서 자욱하게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 번의 폭음 이후,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 삐이이
마치 누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그는 바닥에 엎어졌다.
폭음인가?
바닥이 조금 떨렸다.
무언가 바닥에 튀겨 입 안에 들어왔다.
돌과 모래, 그리고 피.
고개를 들지 마.
페데리코는 자신의 내면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냐.
페데리코는 적당히 타협해 고개만을 빼꼼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 폭음 이후 진영은 마치 치즈마냥 사방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찌어찌 서 있는 자들 또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 붉은 제복을 입은 고려군 보병대에서 흰 화약 연기가 쏟아져 나올 때쯤, 요란하게 바닥의 돌이 튀기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까지 서 있는 자들도 끈 떨어진 인형마냥 바닥에 몸을 뉘었다.
“병신같군.”
자신이 내뱉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덮어쓰고 있던 시신이 총탄이라도 맞았는지 들썩였다.
페데리코는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 * *
AD 1441(개천 166년) 8월 4일.
온주의 항구.
고려군 지휘소.
고려군 지휘소에선 유창한 카스티야어가 오갔다.
“한잔하겠나?”
“…사양하지.”
“뭐, 그럼.”
상민은 엔리케에게 건넨 음료를 대신 마셨다.
맞은편의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땅에 떨구었다.
진흙투성이에, 수염은 마른 핏물로 말라비틀어져 있다.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은 실패를 겪는 그 순간을 경험한 이후라 하더군.”
상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
“자네는 한 번의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 없는가?”
“뭘 말하고 싶은 게냐.”
“알바로를 보며 느낀 것이 없느냐 말이다.”
엔리케는 대답하길 거부했다.
뭐, 딱히 상관은 없었다.
― 후우
전장에서는 이미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사방의 옷에, 천막에 밴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냄새가 느껴졌다.
이 악취는 실로 오래간만이라, 수십 년 전 전장에 익숙한 옛날의 자신 대신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결재하던 자신에게 어떤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전장엔 수많은 시신들이 말 그대로 짓이겨져 있겠지.
불에 타고, 어디 한 곳이 박살이 나고.
절반의 병력에게 압도적인 피해를 입은 십자군은 전투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 둘 다 상실했다.
“당하, 보고드립니다.”
근위군을 이끄는 사령관과 총참모가 다가왔다.
엔리케를 슬쩍 보던 그들은 작전 결과를 간략하게 요약한 문서를 내밀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두들 수고가 많았소.”
이미 나이가 많은 사령관은 별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총참모는 다소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신기전의 화력은 잘 보았소. 총참모. 귀관의 공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오.”
이향은 입술을 씹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무기의 시연회를 통해 책상 앞에서는 알 수 없던 개선사항과 일반적인 전투의 전술을 공부하기 위해 왔던 젊은이는 자신의 상상이 완벽한 현실로 된 광경을 보고도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차라리 기꺼운 상민은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가서 쉬는 것이 좋겠구려. 회전 준비를 오래 했다 들었으니.”
사령관과 이향이 물러나자, 엔리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니콜로가 이미 시체로 화한 이상, 십자군 선봉대의 모든 권한을 쥔 사람은 엔리케였다.
상민은 보고서를 넘기며 의자에 기대 앉았다.
“죽이지는 않을 걸세. 자네는 나름대로의 고귀한 피가 흐르지 않는가?”
못돼먹은 놈이지만 쓸모가 있는 피였다.
고려는 포로로 잡힌 군주를 처형하진 않았다.
적당한 예우를 갖춰 주긴 했다.
타완틴수유의 군주, 위라코차 또한 여생을 평안하게 마무리했었다.
엔리케 또한 파차쿠티와 같은 저항군 지도자가 아닌 엄연히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족이기에 이용할 건덕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엔리케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네놈들은 우리가 이곳까지 오길 기다렸던 건가?”
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긍정을 찾아볼 수 있었는지 엔리케는 계속 중얼거렸다.
“대체 왜?”
“교황청은 우리를 머리에 산양의 뿔 두 개가 달린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것 같네만.”
상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국은 잠재적 고객들에게 그러한 불편한 관념을 심어 주는 것을 딱히 바라지는 않네.”
상민은 그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숫자를 죽여놓았다.
살아남은 십자군은 불과 이 할.
사천 명에 불과했다.
엔리케는 그 말을 듣고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본대가 온다면….”
“달라지겠나?”
“…….”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본 상민이 근위병을 불러 그를 연금하라 시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이곳에서 자네가 할 일이 많아. 현지 음식에 조금 적응을 해 두는 것이 좋겠네. 잠자리와 입을 것, 먹을 것 모두 모자람이 없게 해 주지.”
“나를 이용해 무언가 획책할 생각이라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십자군은 일개 장수를 포획했다고 끝나는 종류의 전쟁이 아니다.”
엔리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형 알폰소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이게 십자군이었던가?”
상민은 피식 웃었다.
“고려, 카스티야 전쟁에 용병이 조금 껴들은 것 같네만.”
엔리케는 당혹한 얼굴을 보였다.
“뭐라고?”
“전쟁을 걸어 패배를 했으면 마땅히 잃는 것도 있는 법. 우리는 이 전쟁을 십자군으로 한 번도 규정한 적이 없다.”
공격하는 주체를 찾을 수 없는 병신같은 전쟁 논리를 들이밀지는 말라.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 모든 책임을 묻고자 지중해까지 가 사코 디 로마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불가능하기도 했고 얻는 것도 적으니까.
전 기독교 사회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임자는 벌한다.
적대감은 최소로, 두려움은 최대로.
펠릭스 5세의 처분은 새로운 교황이 할 것이고.
한정된 피해자는 오로지 카스티야가 될 것이었다.
“너희는 우리에게 토해낼 것이 많아.”
유럽의 관문은 이제 고려의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의 땅을 밟은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상민의 말 이후, 엔리케는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고려군 사령관이 드나들며 생긴 문의 틈 사이 어마어마한 수의 함대가 보였다.
“저게….”
“그래.”
거대한 규모의 함선은 수많은 누범선과 수많은 협저선, 그리고 수송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역사에 등장한 함선.
중범선(重帆船, Galleon)이라는 함선은 상대적으로 낮은 선미루와 선수루를 가지고 있었으나 본래의 덩치 자체가 애초에 누범선조차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다.
십자군의 함대를 간단히 요리한 그들은 별 피해조차 입지 않고 옛 번국의 항구가 낡고 좁아터졌다며 불만을 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청해의 함대는 고작 제국의 근위 함대의 이 할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럼….”
“제국은 그대들과의 전쟁에 모든 전력을 투사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
단지 그동안 우리도 우리만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
상민은 동전을 튀겼다.
“너희들은 우리가 카스티야에 갈 명분을 제공했다.”
엔리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러니 달게 받도록.”
차가운 상민의 말 이후 근위병 두 명의 감시 아래에서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목에 매달린 십자가를 쥐었다.
따뜻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