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18화 (118/653)

고려―카스티야 전쟁(2)

말이 나온 김에.

툭툭, 니콜로가 습관적으로 자신이 가진 지휘봉을 자신의 불편한 다리에 안마하듯 휘둘렀다.

그리고는 영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본 십자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누에바 갈리시아를 공격한 이교도에 대한 징벌이지.”

알폰소 5세가 즉답했다.

“핍박받는 기독교인에 대한 보호입니다!”

한 명의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기사와 주교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중세의 후기가 끝나가는 것을 상징하듯 유럽의 귀족들은 열심히 딴청을 피웠다.

용병들은 그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돈이지.”

끝도 없는 고려의 부유함.

그것의 줄기를 틀어막아 그 이득을 누리는 것.

이탈리아의 용병들은 이 전쟁의 목적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사방의 어수선함을 특유의 잔혹한 미소로 제압한 니콜로가 입술을 씰룩였다.

“결국 우리는 고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 그들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것이 목적이지요.”

예루살렘에 대한 십자군조차 이슬람을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해상십자군으로 고려의 수도, 창양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은 니콜로가 계속 말했다.

“거인을 제압하기 위해선, 일단 놈의 동맥을 압박해야 합니다.”

“남려 동해안의 항로를 제압하자는 것인가?”

니콜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언했다.

“10년, 고려가 10년 동안 북부로 뻗어가지 못하면 그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북려대륙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월경지의 통제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여 그동안 능력 밖의 먼 거리에 배를 보내 세력을 투사했지요.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때입니다. 동예와 협력하여 해안가의 항구에 요새를 쌓고, 그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연죽곶과 이 마제도라는 섬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면 저들로선 큰 위기에 봉착할 것입니다.”

“그대의 전술은 허점이 있소. 고려의 동맥을 끊기 위해선 저들의 두 함대를 제압해야 하는데, 가능한 일이요?”

“황실 함대는 어찌 행동할지 아직 모르나, 청해의 함대는 내려오지 못할 겁니다.”

엔리케의 지적에 니콜로는 단언하듯 말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소?”

알폰소가 큰 기대감을 내보이며 독촉했다.

“우리가 그동안 바르바리 놈들에게 많이 당한 것이 있지요.”

니콜로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설마.”

“예상보다 더 많은 숫자의 선박이 모였습니다. 카라벨라를 따로 편성하여 난폭한 선원들을 골라 태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칼리나해에 흩뿌려 놓는 것이지요.”

카라벨라 함대들은 분산되어 고려의 정착지를 약탈할 것입니다. 불태우고, 죽이고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니콜로의 말에 알폰소와 엔리케, 그리고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예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치를 떨 만큼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래. 확실히 칼리나해는 지중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짜증 나는 지형을 가지고 있지.”

갈리시아에 있었던 당사자 엔리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선단들은 잘게 쪼개야 할 거요. 청해 함대를 제대로 만나는 즉시 고기밥이 될 것이니까.”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튀어나온 엔리케의 조언에 니콜로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스트에 모두 삼각돛을 달고, 또 노를 저을 수 있게 개량한다면 지벡(Xebec) 못지않게 연안에서 저들의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저들에게 약탈한 공로에 비례해 섬을 주는 것도 동기부여에 나쁘진 않겠지. 잡은 고려인들과 약탈한 보물들에 대한 소유권도 말이야.”

“누에바 갈리시아와 동예령 기주 또한 호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 의견들이 삽시간에 범람했다.

알폰소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되물었다.

“저들이 만약 그 모든 날파리 떼를 무시하고 우리에게 직진한다면?”

니콜로는 막힘이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선봉대의 역할은 미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륙에 앉아 본대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 본대가 어디에 상륙을 할지는, 본대를 직접 이끄시게 될 알폰소 폐하께 달려 있지요. 선봉대가 저들을 묶어 놓을수록 저들의 약점은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날 겁니다.”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육지에서 일어날 회전의 승리에 달렸다는 게지.”

알폰소가 손뼉을 쳤다.

“동예의 그 여왕이라는 사람은 믿을 만한 거냐? 엔리케?”

엔리케는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불안에 떨지는 않았다.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려와 절대 같은 행보를 걸어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적의 적은 가장 믿을만한 동기가 되곤 하지요.”

니콜로의 두둔에 엔리케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 수송선들은 원양 항해에 적합해 보이나?”

알폰소의 마지막 질문에 니콜로는 처음으로 다소 말문이 막혔다.

코그선이 대양 항해를 버틸 수 있는지의 문제는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엔리케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뒷골이 당길만한 말을 잘도 지껄였다.

“견고한 배들을 골라 징발했으니 폭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주님의 가호가 우리의 선단에 함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많은 기사들이 호응했다.

니콜로는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

‘많이 변질되었긴 하지만 그래도 성전이라 이건가?’

어쩌면 도박과도 같은 작전.

논리와 이득 대신 신앙으로 치르는 성전.

니콜로의 성격과는 정반대의 전쟁이지만, 가끔은 이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도살업자 출신의 미천한 그는 젊음이 다 꺼져가는 시점에 오히려 야망에 불타 이러한 도박과 같은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

만약 이것만 성공할 수 있다면, 니콜로는 북려대륙에서 평생의 숙원인 그만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단 한 번, 육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만 하면 된다.’

* * *

혹시나 있을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고려인들이 부르고뉴와 포르투갈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후였다.) 몇 번의 교란작전을 실행한 그들은 유럽의 관문 카나리에서 남하하여 푸에르토리코를 거쳐, 드디어 남려대륙의 동해안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했다.

해상십자군은 카락의 호위를 받으며 큰 ‘어선’ 정도의 코그들에 보급물자와 인원들을 가득 싣고 대서양을 건너는 결단을 내렸다.

도박은 성공했다.

정녕 가호라도 존재했었는지 항해로 인한 손실은 크지 않았다.

코그 일곱 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코그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기동성이 빠른 카라벨라 수십 척은 마데이라를 거쳐, 무역풍을 타고 칼리나해로 향했다.

그들은 칼리나의 조그마한 섬들을 끼고 고려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었다.

AD 1441(개천 166년) 6월 11일의 일이었다.

* * *

마제도에 정박해 있던 함대는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소식에 다소 혼란에 빠졌지만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남쪽에서의 소식이 끊겼더라도 명령은 미리 주어져 있었다.

제독은 사전계획이 적힌 서신을 곱게 접고는 촛불에 태웠다.

“귀찮게 하는군.”

카라벨라들은 날씬하여 이리저리 잘도 숨었다.

죄다 삼각돛을 달았으니, 역풍만을 골라 숨는다면 골치가 꽤나 아프다.

협저선으로 맞대응할 수 있었으나, 같은 체급의 함선을 쓴다면 승전을 하더라도 손실이 불가피했기에 누범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 손실을 최소로 하라.

흩뿌려진 벌레들을 소탕하기로 결정한 청해 함대는 남쪽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항로가 끊길 것이 분명한데 보급은 어떻게 됩니까?”

제독은 콧구멍을 후비며 선장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가득 챙겨놓지 않았나? 게다가 파남에 가면 서해안을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멍청한 놈들.

제독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 함대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항로에 대한 보호가 아닌 기주의 동예 세력과 누에바 갈리시아에 대한 감시가 주목적이다. 그들이 이미 우리에게 복종의 약속을 했더라도 말이지. 승냥이들 떼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차근차근 사냥하면 된다.”

어차피 그들은 남쪽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 *

하지만 십자군이 고려의 행동을 오판했듯, 고려 또한 사략 함대에 대한 전력을 다소 오판했다.

사냥을 하는 것 또한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놈의 칼리나해는 지형이 복잡하여 항상 원거리 포격전을 가정할 수는 없었다.

물안개와 어둠, 혹은 복잡한 지리와 역풍을 틈타 고려의 분함대에 빠르게 접근한 유럽인들은 백병전을 시도했다.

― 콰쾅!

누범선들의 대포가 황급하게 불을 뿜었다.

긴급한 와중에도 포술은 실로 정확해 칼리나해의 조그마한 섬 뒤에 매복해 있던 카라벨라 몇 척이 포탄 세례를 맞았지만, 마스트만은 멀쩡했기에 이내 이를 악물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해적선들은 대체 무슨 동기부여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악랄하며 용맹했다.

“빨리 건너가, 새끼들아!”

한번 누범선과 붙은 자들은 그 체급과 높이에도 불구하고 칼을 물고 밧줄을 통해 건너왔다.

누범선의 선미루와 선수루가 조금 더 낮았다면, 아마 건너올 때 쏴 죽일 시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쏘아지는 총탄에 몇 명의 유럽인 해적들이 바다로 떨어졌지만, 상당수는 건너편에 도달했다.

― 죽어라!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밧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신기에 가까워, 고려인들은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고려인들이 잘하는 것은 항로를 측정하고 배를 통제하며 포를 정밀하게 쏘는 것이지, 저렇게 괴상망측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좁은 공간에선 총기 사용에 제한이 크다.

권총(拳銃)이라는 물건이 개발되었지만 아직 전면에 보급되진 않았다.

선장과 고위급만 휴대할 수 있었을 뿐.

게다가 총열이 짧아 장전 시간이 소총보다 빠르다 하더라도 가끔은 칼을 써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선장은 곡률이 높은 도를 빼 들고는 적을 공격했지만, 이내 양측에서 협공당하며 정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그가 가진 검술은 꽤 뛰어났지만 상대는 두 명.

게다가 아라곤인, 카스티야인, 나폴리인,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선원들은 그 악명높은 바르바리 해적과 수십, 수백 년간 싸워왔던 사람들이다.

청해의 선원들이 아무리 원주민에 대항해 기초 전투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동물 가죽을 걸친 원주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적절한 체급의 적과의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선장의 허벅지에 상처가 났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피가 제법 났다.

머리가 어지러워 뒤로 물러나는 순간, 배 안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이런 젠장.’

고려의 선원들은 모두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적들은 분명히 근접전에선 우위에 있었다.

‘내 실수다, 섬과 섬을 지날 때에는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어.’

선장이 자책하는 순간, 그의 목을 향해 칼이 날아왔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배엔 다른 자들이 있었다.

머리털이 없는 이 사람들은 짧은 도리깨와 같은 괴상한 둔기를 지니고 있다가 무도한 유럽 해적들이 백병전을 시도하면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그들의 머리를 수확해 주었다.

― 퍽

거북열매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선장을 공격하고 있던 한 아라곤 선원의 후두부가 함몰되었다.

“나무아미타불.”

선장은 서둘러 옆의 적병의 목을 베어버리고는 숨을 골랐다.

이 만종 승려란 사람들은, 하루 종일 몸을 단련하는 괴상한 종족이다.

이미 정상적인 불계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그들은 심지어 계란(무정란이라 한다)과 기타 육류를 섭취하는 것에 딱히 망설이지 않았다.

말로는 이미 죽은 동물의 시체만을 먹는다던데, 그 동물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숨을 고르던 선장이 감사의 표시를 하려 옆을 돌아보자, 그 만종 승려는 어느새 선미루에서 갑판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분명히 멀미로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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