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카스티야 전쟁(1)
유럽은 예전부터 바다에 몹시 익숙했다.
옛 그리스와 로마 시절의 지중해도 그랬고.
유럽의 바닷가를 공포에 떨게 한 노르드인들 시절에도 그랬다.
북해와 지중해는 배로 오가며 상업을 하기엔 지구의 어떠한 지역보다도 편했다.
상인들은 상선에 물자를 싣고 이곳저곳을 왕래했으며 소문과 혁신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고려의 대양 진출 이전에도 유럽은 이미 충분한 해양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고려는 분명히 이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단순히 그 작은 바다를 넘어 끝도 없이 이어질 정도로 큰 대양 너머에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많은 나라들이 가능성이라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부유함의 가능성.
예전에는 인도의 후추가 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려대륙의 적후추와 향신료들, 고려의 기호작물들, 그리고 수백 금을 주더라도 사 가져 올 수만 있다면 수천 금의 이득을 본다는 알파카의 모직물.
일확천금의 기회는 항상 야심가들을 유혹한다.
바다에 익숙한 유럽의 상인들은 빠르게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였고, 질 좋은 오크나무(참나무)들을 이용해 조선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용골의 문화야 고려와의 만남 이전부터 원래 유럽의 주된 조선 방법이었다.
단지 그 구조를 원양항해에 맞추어 크게 만드는 것은 자금을 넉넉히 투자한다면 언젠가는 성공할 문제였다.
카락과 캐러밸은 이베리아에서 시작했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거쳐 북유럽에게까지 천천히 전파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세계의 바다에 뛰어들 정도의 역량을 보유하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이른 순간에 그들이 마주친 것이 고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 * *
세비야.
카스티야.
본디 이곳에는 카스티야 함대 소속 22척의 카락(나오)이 있었다.
수송용으로 개조된 카라벨라 28척까지 합치면 불과 50척에 불과하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카락 15척이 합치니, 꽤 그럴듯한 함대가 마련되었다.
다가오는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며 크게 늘린 항구가 가득 찰 정도로.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알폰소 5세가 일차로 몰고 온 함대는 예상보다도 더 많았다.
18척의 카락선.
지중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본다면, 이 정도의 카락선은 상당히 많은 축에 속했다.
병사들과 선원, 용병들과 관리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항구에 알폰소 5세가 발을 디뎠다.
주변의 인파들은 마치 썰물처럼 그의 앞에서 갈라졌다.
고개를 들고 오연히 그 모습을 바라본 알폰소 5세는 망토를 움켜쥐고 세비야에 차려진 십자군 원정 본부에 다가갔다.
“아라곤의 왕이시자, 발렌시아와 마요르카의 왕이시며 또한 나폴리의 왕이시며,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왕이시고, 바르셀로나의 백작이시며 또한 드라곤 기사단의 일원이신 알폰소 폐하께서 드십니다.”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는 겸용왕의 소개답게 십자군 원정 본부에 있던 자들이 하나같이 일어섰다.
그들의 예를 받으며 입장한 알폰소 5세는 주변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상석에 위치한 자신의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엔리케! 직접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구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엔리케는 큰형의 호의에 감사했다.
겸용(도량이 넓은)왕이라는 이명답게 상당히 호탕한 그의 큰형은 형제들의 사이도 돈독하게 만들었다.
작위에는 욕심이 없는 것인지, 자신의 사후 아라곤과 발렌시아는 둘째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막내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인 페르디난도에게는 나폴리를 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엔리케의 유배 소식을 들었을 때 몹시 안타까워했던 알폰소는 그가 카스티야의 섭정공이 되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드디어 본래의 목표에 거의 도달했음을 느꼈다.
트라스타마라의 이름으로 서지중해를 지배한다는 것.
“둘째 형이 올 줄 알았는데 큰형님이 직접 오시다니요.”
“추안은 아라곤의 내정에 바쁘니까. 짐이 직접 오는 것이 맞지.”
그는 시종을 시켜 와인을 가져오게 한 다음 동생에게도 고블릿을 건넸다.
“나폴리의 일은 좀 안정이 되셨습니까?”
“이제서야 조금 평화를 되찾았다. 페르디난도가 그 일을 다 처리할 거야.”
“아직 어린 나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조카에 대해 걱정이 있어 그리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니까 이번 기회에 미리 영역에 대한 통치를 해 보는 게지.”
“…설마 원정을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뭐, 안 될 일이라도 있느냐?”
엔리케는 큰 형의 적극적인 지원은 몹시 감사했으나, 그래도 직접 원정을 떠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
“형님께선 네 왕국의 주인입니다. 그런 존귀하신 분이 직접 멀고 고된 길을 떠나신다니요.”
“또한 주님의 기사이기도 하지.”
그는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믿음을 증명하러 가는 길에 이 형이 빠질 수 있겠느냐?”
“과연 주군이십니다!”
주변에서 기사들이 큰 목소리로 호응했다.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자 엔리케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산티아고 기사단 또한 감격스러운 얼굴로 알폰소를 쳐다보고 있기에.
‘돌아버리겠군.’
성품이 좋고 우애가 돈독한 형이라 할지라도, 엔리케는 자신이 선포한 십자군의 주도권을 내주기는 싫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알폰소 5세가 그러한 계산을 하고 온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엔리케는 형에게 통솔권을 양도해야만 했다.
무려 네 왕국의 왕이자, 트라스타마라의 당대 가주이다.
자신의 카스티야가 강대국이라 하나 국왕도 아닌 섭정공으로서는 그 말에 감히 거스를 순 없었다.
“형님, 지휘권은 혹시….”
알폰소는 꿀꺽꿀꺽 와인을 마시다 말했다.
“음? 아아, 지휘권을 행사할 사람이라면….”
알폰소의 대답이 나오기 전, 지휘본부의 문이 다시금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하하하, 역시 이베리아는 날씨도 좋고 여인들도 아름답단 말이야!”
“와인 또한 명품이지!”
“시간만 있었으면 이곳의 여인들에게 내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이것 참 아쉽구만.”
성전을 수행하러 온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태도에 귀족과 기사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돈에 미친 놈들이군.”
“명예도, 신의도 없는 추악한 놈들.”
― 탁
마지막 말은 다소 컸는지 선두에 선 자가 제 자리에 섰다.
그 뒤를 따르던 용병들도 일사불란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듣기 심히 거슬리는 말이 들리는군, 내 앞에서 다시 그 말을 읊을 사람이 있는가?”
그 말은 상당히 날카롭고 선명하여 주변에서 잡담을 나누던 귀족과 기사들이 죄다 입을 닫았다.
선두에 선 자는 등이 굽고 발을 절고 있어 상당히 형편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좌중은 그런 그에게 압도당했다.
니콜로 피치니노(Niccolò Piccinino).
교황청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자, 당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능력 있고 용맹하며, 유명한 콘도티에로(용병대장) 중 하나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능력에 비례하는 잔인함과 교활함,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 또한 대단했다.
그동안 교황청과 기나긴 전쟁을 했었던 그는 전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현 교황 펠릭스 5세와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며 상당한 보수를 받고 해상십자군의 교황청 군대를 이끄는 일을 따내었다.
“…없는 모양이군. 명예도, 신의도 없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
니콜로는 조소를 흘리며 걸어갔다.
절뚝이는 뒷모습을 비웃는 자는 없었다.
그는 알폰소와 엔리케가 있는 상석까지 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는 의자를 빼 앉았다.
“십자군의 지휘권은 누가 가지게 되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그의 물음에 엔리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명하기는 하나, 한낱 용병대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몇 번 니콜로와 마주해 그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알폰소는 그저 호탕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 사람, 피치니노를 총지휘관으로 추천했네. 아우의 생각은 어떠한가?”
알폰소는 엔리케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딱히 출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 니콜로는 수많은 전장을 겪은 뛰어난 콘도티에로.
게다가 교황청이라는 뒷배가 있으니, 그보다야 훨씬 지지받는 것이 많을 터였다.
기사들과 귀족들의 시선이 엔리케에게 쏠렸다.
알폰소의 시선은 담담했지만 시험하듯 고요하다.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온전한가?
‘결국 기사와 병사들 또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지휘관을 원하기 마련.’
뒤에서는 경멸할지라도, 앞에서는 따른다.
엔리케는 니콜로보다 더 잘 군대를 이끌 자신이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만약 십자군이 조금 더 지원을 받아 다원화되었다면, 그들에 대한 중재의 대가로 통솔권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사방에서 쏘아지는 무언의 압박에 다소 무능력하게 지휘권을 뺏긴 엔리케가 상실감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바라보던 니콜로가 입을 열었다.
“선봉대의 규모는 이게 전부입니까?”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가 틀림없었다.
카락 55척, 카라벨라 61척, 작은 코그나 다우와 같은 선박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직 합류를 안 한 베네치아의 함대를 포함하면 소선으로 바다를 메울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니콜로의 말은 엔리케를 자극했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네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규모가 축소된 것을 질타하는 것마냥.
“본대는 함대의 건조가 끝난다면 아직 소집하지 않은 병사들을 태워 보낼 것이네. 지금으로선 이것이 선봉대의 전부라 할 수 있지.”
적대적인 엔리케의 침묵 대신 알폰소가 아쉬운 듯 말했다.
다 합쳐보았자 선봉대는 이만가량의 병사들만 보내는 셈이 된다.
수집한 정보로는 고려는 십만에 가까운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그 전력에 겁먹지 않았다.
징집군으로만 숫자를 채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 명의 무장병(Men at arms)이 농기구를 쥔 스무 명의 농노를 수월하게 도살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고려의 실제 인구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그들은 잉글랜드보다는 인구가 많은 모양이지만, 분명 프랑스와 카스티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그들은 숫자에 현혹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니콜로의 말에 알폰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을 수행했다면 재정적 압력은 상당할 터. 또한 그들이 그 넓고 험한 산맥… 이름이 뭐였지?”
“태동, 태동 산맥입니다.”
“그래,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군. 그 태동 산맥을 넘어오는 것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예와 고려를 오갈 때 그들은 육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요. 또 그들 사이엔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킬 만한 가도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지리도 험하니 말이 같은 대륙이지, 그들의 거류지는 결국 월경지(越境地, Exclave)에 불과합니다.”
“단일한 전장에서 쓸 수 있는 병력의 규모는 우리나 저들이나 결국 수송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군.”
“예. 때문에 그들 또한 최대한 정예한 병력을 뽑아 수송할 것입니다.”
고려의 군 편제에 대해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그들 또한 상비군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상비군은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니, 단 한 번의 회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취할 수 있다면 십자군은 본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