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개천 166년(CE 1441). 2월 12일.
푸카라 픽추 요새 앞, 고려군 숙영지.
북부 타완틴수유.
깎아질 듯한 거대한 산.
그 산세의 봉우리들은 거의 적도에 도달해있는 위도에도 불구하고 녹지 않는 눈들이 쌓여 있었다.
그 중턱에 건설된 최고도의 요새.
푸카라 픽추 요새는 타완틴수유 건축 기술의 절정이었으며 잉카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요새 구조의 건축물들은 위기가 올 때 비로소 처절하게 빛나는 법.
그러나 타완틴수유는 이번 위기를 넘기지 못할 듯싶었다.
상대는 앞마당에 자리한 제국이었다.
분명히 그들은 남쪽 평원에 있는 미개한 것들 사이에 있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끝도 없이 팽창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평야를 집어삼키고 그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들어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맥의 힘을 규합하기도 전, 팽창하는 흐름을 끊어버리는 고려의 원정 덕에 타완틴수유는 빠르게 몰락해갔다.
불과 사십 년이 되기도 전에, 타완틴수유는 고려에 정복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떨어졌다.
아마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 파차쿠티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쿠스코가 함락된 이후 원정은 바로 끝이 났겠지.
어찌 되었든 사십 년은 국가의 입장에서나 짧은 시간에 불과할 뿐, 병사들 개개인에겐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교대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 콰앙!
아련히 들리는 포성에 고려군 막사에서 총기를 손질하고 있던 김안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루 종일 쏴 재끼는구만.”
막사에 누워 있는 후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찌 효과는 있답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생고생을 해서 토산을 쌓아 놨는데 효과가 당연히 있겠지.”
안섭은 투덜거렸다.
이 높은 고도에서 땅을 파 토산을 만들어 적의 요새를 타격할만한 포대를 건설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안섭은 상비군 소속의 병사이기에 징집군마냥 직접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지만 푸카라 픽추 안에서 발작하며 튀어나오는 놈들과 부대끼는 당사자였기에 그 피곤함은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삽을 쓰던 징집군들은 그 고생을 인정해주는 상부 덕분에 내방으로 긴 휴가를 가기도 했으니까.
아, 차라리 나도 땅이나 농사지으며 살걸.
안섭은 약간은 후회되는 생각을 했다.
“김 상등님?”
“왜.”
“이번 정벌이 끝나면 뭘 하실 겁니까?”
이번 물음은 그 둘 모두 약간 피부에 와 닿았다.
저 거대한 토산에서 하루 종일 쏘아지는 포탄은 그 난공불락이라는 푸카라 픽추의 사람들을 진절머리나게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스물네 시간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쏘는 포탄은 고려군조차 조금 짜증이 나니까.
당하는 사람은 신경쇠약에 죄다 죽어버릴지도 모를 정도.
이제는 저항의 기미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글쎄. 난 고향에서 농사나 지을까 생각 중이야.”
“농사 말입니까? 김 상등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왜?”
“피칠갑을 한 채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야인의 머리를 총검에 높이 꽂아 웃고 계시는 걸 저뿐만 아니라 옆 동네 연대 애들도 다 아는데, 무슨 농부는. 김 상등님은 그냥 천성 군인입니다.”
안섭은 그를 노려보았으나 반박할 논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근위군은 편제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제복을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새로운 제복?”
“예. 보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생겼는데?”
안섭이 흥미가 동하는 듯 물었다.
“붉은색으로 염료를 칠했는데, 그 색깔이 대단히 화려하답니다.”
“붉은색? 그런 값비싼 염료를 근위군에게 모두 지급한다고?”
“예, 이곳에서 어떤 벌레를 생산하는데… 아 그 이름이 뭐였더라. 깍지벌레랑 비슷한 뭐시기였는데?”
“연지벌레.”
막사를 들추고 고개를 빼꼼히 내민 군관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충(忠). 아 연지벌레, 연지벌레가 맞던 것 같습니다.”
후임이 손바닥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본 안섭이 상관에게 말했다.
“정 부위님 오셨습니까?”
“그래.”
― 촥
막사의 천을 마저 열고 들어온 정 부위의 옷은 과연 후임이 말한 것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정 부위의 자세가 의기양양하다.
“근위군으로 발령받으셨습니까?”
“그래, 지원하기도 했고. 어찌 뽑히게 되었다.”
붉은 제복.
안에는 백색의 제복을 입은 뒤, 겉에는 붉은 두루마기를 입는다.
머리에는 군관만이 쓸 수 있는 전립(戰笠)을 쓰고 칼을 차니, 이것이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무엇이겠는가?
“와….”
안섭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건 정복입니까, 군복입니까?”
“놀랍게도 전투에 쓸 군복이다.”
정 부위는 평소의 근엄하던 것이 일부 날아갔는지, 약간 신이 난 듯 대답했다.
“정복은 이것보다 더 화려하지.”
“실로 대단합니다.”
자고로 군복이란 남자의 심장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고려는 그러한 면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교들의 복식은 군무부의 회의를 거쳐 내려오는데, 그 꽉 막힌 관료사회가 제안한 것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심지어 멋이 있었다.
심지어 이번 근위군 장교의 복식은 실로 대단했다.
두루마기는 군대의 특수성을 감안해 너무 과도하게 길지 않았고 너무 과도하게 짧지 않았으며 굳이 여밀 필요가 없게 만들어졌다.
모직물로 되어 맵시가 있었으며 빳빳했다.
안의 백색 제복은 몸에 맞추어 치렁치렁하지 않았고, 또한 면으로 되어 활동성이 좋았다.
제복의 깃에는 황동으로 된 계급장이 붙어 있었으며 가슴팍과 어깨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었다.
근위군은 근위군만의 상징을 두는데 발이 세 개인 까마귀의 표시를 달았다.
― 꿀꺽.
지방 상비군 출신으로 근위군을 볼 때마다 약간은 부러운, 혹은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났었다.
그들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대우와 자긍심 그러한 모든 면들 때문에.
하지만 근위군은 가장 정예한 사람들을 뽑는 곳이었다.
자신같이 무르고 여유로운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후임의 말은 음해에 불과하다.
“저도 군관을 꿈으로 두었다면 좋았겠지요.”
“사관이 되기에는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닐세. 그리고 근위대에 들어가면 사관과 병 또한 이런 군복을 지급받지. 별반 차이는 없을 거야. 정복은 못 받더라도.”
그 말을 듣자마자 안섭은 상관의 앞에서 놀란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렇습니까?”
그동안 병사의 복식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통일성을 제외하고는 별로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실용에만 주안점을 두어 보기에 좋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었던 까닭이다.
염료가 보통 가격이 아니었기에.
정 부위가 슬며시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쩐지 음흉한 모습이 보였다.
“그래, 당연하지. 때마침 이번 원정이 끝나고 근위군의 상당수가 나이 문제로 제대를 할 시기가 왔네. 그대는 젊으니 이곳에 서명만 한다면, 이런 윤기가 흐르는 멋진 군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야.”
생각해보게. 고향에 내려갔을 때 동네사람들이 이 군복을 보고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안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장인 어르신은 항상 나를 못마땅하게 보셨지.’
이미 결혼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었지만, 항상 장인의 집에 갈 때마다 은근히 무시받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장인은 황상 폐하를 항상 존경하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냅다 절을 올리시는 분이다. 그러한 폐하를 모시는 근위군에 허튼소리를 할 분이 아니야.’
안섭은 다시금 몽롱한 눈으로 군복을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입대지원서를 집어 들었다.
정 부위가 빠른 손놀림으로 지원서의 여러 곳을 짚었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빠르게 필기도구를 가져왔다.
“자, 자. 서명을 하게. 내 자네를 평소 괜찮게 보고 있었으니 모집담당관이신 정령께 잘 말씀드리겠네.”
* * *
안섭이 돌이킬 수 없는 지원서에 서명을 한 뒤, 붉은 병사용 제복을 받은 이후에도 고려군은 수년간 쌓아 올린 토산 위에서 계속 푸차라 픽추에 포탄을 쏟아부었다.
청동 대포는 화약의 힘을 견디는 내구성이 무척 좋았지만, 너무나도 많이 쏘아대는 까닭에 금세 망가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고려는 코웃음을 치며 고장 난 대포를 더 많은 새로운 대포와 바꾸었다.
[우리의 대포와 포탄은 우리의 병사들보다 값싸니 우리는 적들의 사기까지 화력으로 분쇄할 것이다.]
― 더 많은 대포, 더욱더 많은 화약, 가장 강력한 화력만이 우리 고려군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영토에 비해 빈약한 인력과 매우 풍부한 유황 산지.
또한 아타카마를 비롯한 남려대륙 서해안에 세계 최대의 초석 산지를 가지고 있으며 드높은 태동산맥에 세계 최대의 구리와 철광석 산지까지 여럿 가지고 있는 나라.
위대한 고려.
그리고 그 위대한 화력 앞에 적들은 분쇄되어 버릴 것이다.
무려 15세기의 중반에 나타난 고려군의 괴상한 화력우세교리는 불쌍한 타완틴수유의 마지막 요새를 말 그대로 돌더미로 박살 내고야 말았다.
마침내.
“와아아아!”
막사 중앙의 대로에서 온몸과 손을 구속하는 밧줄에 끌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걷는 적군 수장의 모습에 사방의 고려군 막사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해발 고도가 그리 높은데도 불구하고 햇빛에 탄 자국이 여실히 남아있는 속옷을 걸친 고려군들은 총기를 손질하던 것을 멈추고는 거리에 나와 저마다 욕설을 내뱉었다.
“이 쥐새끼 같은 새끼야! 드디어 잡았구나!”
“네놈 때문에 여섯 살 난 아들이 장성해서 혼례를 앞둘 때까지 고작 다섯 번밖에 보지 못했다!”
“썩을 놈! 이렇게 끌려 올 거면 차라리 콱 자결이라도 하든가!”
“육시를 할 놈 같으니라고!”
“욕을 하는 것과 침을 뱉는 것은 좋으나, 포로를 상하게 하지는 말아라!”
군관들은 돌이라도 던질 정도로 과격해지는 것만을 따로 엄중하게 주의를 줄 뿐, 욕설을 하는 병사들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자신들도 쌓인 것이 많았기에.
* * *
“크윽….”
화려한 동물 가죽을 걸치고 있는 사내가 화려한 복장을 한 노인의 앞에 꿇려졌다.
노인은 대체로 기쁜 얼굴이었지만 만감이 교차하는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랜 세월이었네. 파차쿠티.”
“빌어먹을 고려 놈들….”
파차쿠티가 더듬거리며 내뱉는 고려 욕에 해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저 먼 요새를 바라보았다.
푸카라 픽추는 불타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 났다.
“이자는 어찌하옵나이까?”
더이상 불경한 말을 내뱉지 않도록 입에 재갈을 물린 군관들이 물었다.
“현지의 민심조차 잃은 사내다. 목을 쳐 저 폐허의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파차쿠티가 끌려가도 해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번성하였던, 혹은 번성할 수 있었던 한 나라의 마지막을 이렇게 지켜보는구나.”
“고려에 대적한 이상 저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렇지.”
휙, 해윤이 몸을 돌렸다.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몹시 귀하다는 비쿠냐의 털로 만든 황제의 황금색 두루마기는 우아했으며 금색 실로 수놓아 몹시 고풍스러웠다.
“근위군의 현황은?”
“젊은 병사를 중심으로 모집을 하는 중이며 이미 많은 자들이 자원했다 합니다.”
해윤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도 지휘관 생활에 잔뼈가 굵은 덕분에, 이번의 붉은 제복이 근위군의 지원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후 안씨는 실로 내조의 모범이었다.
황후가 제안한 대규모 연지벌레 농장에서 생산되는 붉은 염료(Cochineal)는 선홍(鮮紅, Carmine)색이라 불렸으며 제국의 재정을 불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제국의 병사들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좋아.
해윤은 시대가 저무는 것을 느끼며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원정에 참여한 그의 측근들도 청년 장수에서 이제는 노년의 장수로 되어 있었다.
이들도 아마 다음 전쟁에서 활약하진 못하겠지.
“기존의 병사들은 많은 세월 동안 짐과 함께한 아이들이다. 이들 모두가 고향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잊지 말라.”
“명심하겠습니다.”
해윤은 이곳을 둘러보았다.
이제 산맥을 떠날 순간이 왔다.
주둔군 일부가 남을 것이지만, 이제 명확하고 구체적인 적대 세력이 별로 없기에 군정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이제 제국의 내방으로 될 것이니, 적어도 10년 뒤엔 정복한 지역 순서대로 민정이 실시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삼가 반드시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해윤은 새로운 편제가 된 근위군을 이끌며 서해안의 해안가로 나아갔다.
가파른 산맥을 내려가면 바다와 접한 요충지가 나왔다.
선홍색의 염료를 운반하는 항구도시였기에 홍진(紅津, Lima)이라 불리는 이 항구에는 이미 많은 수송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역을 앞둔 전 근위군과 다른 병사들은 남쪽으로 천천히 행군해 나아가며 해산할 것이고, 새로운 근위군은 바다를 통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조용하게.
병사의 수는 적다.
하지만 해윤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화약의 양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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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붉은 군복, 레드 코트에 쓰이는 코치닐은 사실 남미가 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