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끝(2)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가장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도시.
가장 부유한 도시.
수많은 미사여구를 붙여도 모자란 이곳.
베네치아.
그 가운데에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아홉 명의 위원들을 두칼레 궁전에 소집했다.
“존경하는 베네치아의 원로들이여.”
인원이 훨씬 많은 대 공의회도, 시뇨리아도 아닌 단지 가장 권력 있는 자 열 명만이 모인 10인 위원회를 소집한 까닭은 그들이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하는 종류의 담화이기 때문이었다.
“…….”
모인 위원들은 아무 말 없이 도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십자군 때문이오.”
그 말을 들은 몇 명의 위원들이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몇 명의 위원들은 괜시리 손에 낀 반지들을 매만졌다.
다른 몇 명은 앞에 놓인 잔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프란체스코는 슬쩍 그들의 행동을 살폈다.
그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의 파편들이 느껴졌다.
당대 최고의 상업 공화국을 이끄는 자들답게 모두가 표정관리에 능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옛날의 십자군의 일이 못 박혀 있었으리라.
― 선대의 죄악.
물론 그들은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을 세워 동로마에 비수를 꽂음으로써 동지중해와 레반트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얻었을 정도니까.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동쪽의 방벽이 부서지고 오스만이 성큼 다가오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들을 성토하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들이지만 그렇기에 세속 군주들, 교회의 평판, 민간의 여론을 모두 고려해야 했다.
“본인은 이 십자군의 의미를 예전에 여러분들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소.”
위원들이 다소 회의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올 말은 이미 예전에 들었다.
십자군이 성공한다면 베네치아는 금전적 지원의 대가로 카스티야로부터 칼리나해의 섬들을 양도받을 것이다.
몰려오는 동쪽의 이슬람으로부터 다소 안전한 땅.
새로운 시장과 피난처.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말한 ‘방주 이론’은 설득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이탈리아반도를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제약이었다.
그들의 영원한 숙적, 제노바였으면 가능했겠지만.
결국 그들이 이 십자군에 참석하는 이유는, 추후 제노바 정복을 구상하겠다는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게 호의를 주는 것 정도였다.
현재의 금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것.
그것이 숙적을 영원히 끝장낼 수 있다는 기회라 할지라도 사실 상당한 모험이며 기약조차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면, 도제는 그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공화국의 위원들은 도제를 물어뜯을 그때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정작 지금 프란체스코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때 본인은 위원 여러분들께 본인의 모든 계획과 구상을 말씀드리지 못했소이다.”
이 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하노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구려.
프란체스코는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보였다.
위원들은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으나, 어찌 되었든 뒷말이 궁금했기에 대충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본인의 예상대로 이 십자군은 시작부터 잡음이 끼기 시작했소.”
프란체스코는 깍지를 끼며 여유롭게 웃었다.
“더 이상 교회는 예전처럼 대규모의 십자군을 조직해 잡음 없이 통솔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소. 다른 분들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실패를 겪었으니까.”
“…….”
그 과거에는 그들의 치부까지 있었다.
위원들은 굳이 그 일을 들추는 도제의 심중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패할 십자군을 성공할 십자군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요.”
의기양양한 도제의 얼굴은 확신에 찬 것처럼 보였다.
“보여드리겠소. 베네치아가 나아가야 할 길을.”
그는 손을 들었다.
회의장을 경호하던 자들이 질서 있게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나눌 담화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오.”
다른 아홉 명의 위원들 뒤에 서 있던 자들도 제각기 모시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나간 호위가 회의장의 문을 잠갔다.
안에서 희미하게 나오는 말의 꼬리가 잘리고, 외부에는 극도의 적막만이 흘렀다.
* * *
토르데시야스 궁정.
비야돌리드.
카스티야.
“카이저께서 추가적인 지원을 철회하셨습니다.”
― 쾅!
흉갑에 산티아고 기사단 특유의 성 야고보 십자가가 도드라지는 흉갑을 입고 있던 엔리케가 탁자를 내리쳤다.
“뭐라고?”
“보헤미아의 불온한 움직임이 계속 남아있어 어쩔 수 없다 하셨습니다.”
“…미치겠군.”
엔리케는 머리를 감싸쥐며 천장을 보았다.
신성로마제국의 금전적 지원은 본디 다섯 차례에 걸쳐 오기로 했는데, 두 번에 해당하는 금액만 도달했을 뿐이다.
“한 가지 더….”
엔리케는 홱 고개를 내렸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소식을 들고온 기사를 향했다.
기사는 다소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프랑스의 군주께서도 약속된 지원의 절반만 해 줄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뭐!”
“카스티야가 먼저 성과를 가지고 와 주님과 십자군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옳다, 그리 덧붙이셨습니다.”
“이… 이… 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으아아아!
― 챙그랑
사방으로 집기와 가구들이 날았다.
화분 하나가 벽에 던져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고려의 청자였다.
이제 구하기도 힘든 값진 물건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샤를! 네놈이 정녕 우리가 프랑스에 베푼 은혜를 잊어버렸단 말이냐?”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단장님이 아닌 후안 폐하와… 그 간신 알바로의 호의였지요.’
자기 파편이 튈까 몸을 약간 피한 기사가 엔리케의 광분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속의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한참을 광분하던 엔리케가 이윽고 숨을 고르며 두 팔로 탁자를 짚었다.
아직 아라곤과 나폴리, 교황청과 베네치아가 남아있다.
“형님께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셨으니, 믿을 건 그것밖에 없다.”
―후우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나저나, 북려대륙에 간 프랑스 멍청이들은 연락이 닿지 않는가?”
카스티야는 속도가 빠른 다섯 척의 카라벨라를 북려대륙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세 척은 고려의 함대에 걸려 침몰했고, 두 척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에 성공했다.
“누벨 오를레앙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도움은 딱히 안 되었을지라도, 적어도 북쪽에서 상대방을 귀찮게 만들만한 패도 증발해 버렸다.
“고려 놈들이 수작질을 부린 것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그 폐허에는 시신이 한 구도 없다 합니다.”
“뭐, 들개들이 와서 다 뜯어먹기라도 했나?”
기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엔리케는 퉤, 침을 바닥에 뱉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누에바 갈리시아는 어찌 되었나?”
“항구에는 분명히 고려의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던져준 고기를 낼름 삼키긴 한 모양이군. 청해 함대가 칼리나를 방어하는 모양이지?”
그 넓은 해안가와 수많은 섬들을 끼고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카라벨라를 기어코 절반 넘게 침몰시킨 고려의 함대는 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괜히 당대의 선원들이 ‘떠도는 고려인’들을 유령선의 대명사라고 하며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에 미친 놈들.
“일단 카라벨라의 선장은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누에바 갈리시아와 만궁열도, 그리고 마제도까지의 거리는 무척 길다. 본토는 더더욱 그렇고. 아무리 청해 함대라 해도 모든 곳을 방어할 순 없어.”
엔리케는 입술을 씹었다.
“결국 우리가 그 틈을 비집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지.”
기사가 동의했다.
“선발대가 현지에 거점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본대 또한 빠르게 넘어올 것입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해안포대를 이용해 저들을 견제할 수 있다.
물론 현지의 원활한 보급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 여왕이라는 자, 믿을 만하겠지?”
어린 군주 대신 태후나 대비가 수렴청정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대한 무지 덕에 엔리케는 동예의 대비를 여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여인 또한 야심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겁니다.”
그들의 상단 또한 마찬가지지요.
“그래. 맞다.”
엔리케는 냉정을 되찾았다.
“아라곤의 준비가 끝나는 즉시 출병한다. 우리가 먼저 성과를 보인다면, 늑대 무리 또한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 게야.”
* * *
체스는 할 것 없는 중세시절에는 꽤 재미있는 놀이도구 중 하나였다.
또한 가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 상당히 도움이 되기도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군주들이 괜히 체스에 빗대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었다.
‘왕들의 게임이라 했었나. 어울리기는 하네.’
상민은 자신의 앞에 놓인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아군의 진영엔 폰 두 개가 가지런히 땅에 머리를 뉘었다.
‘그대들은 비록 폰이었지만, 그대들은 그대들의 킹을 지켜냈도다.’
파견되었던 요원들이 모두 돌아왔다.
그중 몇 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정예한 요원들이라도 항상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려 했지만 한 명은 바닷길에서, 한 명은 산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한다.
상민은 탄식을 삼켰다.
그들은 충분한 예우를 받을 것이고, 유가족들 또한 금전적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폰의 가치에 둔감해지지 말자.’
반면 적 진영은 퀸과 룩 두 개와 나이트 두 개, 그리고 비숍 두 개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폰과 킹뿐.
‘선봉대는 예정대로 공격을 강행하려는 모양인데.’
카스티야 섭정 엔리케는 갑자기 주춤거리는 동맹국들과 지원국들에 몸이 달았는지 빠르게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십자군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된다면 심어놓은 씨앗이 발아하겠지.
가장 큰 화근 하나는 제거하는 셈인가.
상민은 에스파냐의 황금기를 이끌 위대한 여왕의 치세 자체를 삭제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그녀에 비하면 엔리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민은 성과를 종합한 보고서를 쥐었다.
‘놀랍군.’
그들이 획책한 많은 모략도 모략이지만, 유럽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몇 가지는 심지어 의도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밍기적거리는 베네치아… 그리고 면죄부를 뿌려대기 시작한 교황청이라,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간단 말이야.’
그나저나.
상민은 약간 허탈해진 지갑을 느꼈다.
이번 작전을 하면서 실로 엄청난 금전을 써야만 했다.
고려의 부의 흐름을 움켜쥐고 있는 그조차도 휘청일 정도로.
‘게다가 시간이 촉박했다. 이번 일은 유럽인들도 결국 기억할 거야.’
너무 큰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자기방어적 행동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참작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다음번에는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모략의 난이도 자체는 더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가치는 있었다.
상민은 체스판에서 물러났다.
폰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