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끝(1)
볼로냐(Bologna).
북이탈리아.
노인 두 명은 벽난로 근처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몸단장을 한 듯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비싸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의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공통점이라고는 둘 모두 약지에 반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
에우제니오 4세는 자신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볼로냐에서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던 사보이아의 아메데오를 보고 체념했다.
“이제는 펠릭스 5세라 불러드려야 하오?”
"그저 부끄럽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은 얼굴이다.
"하지만 미력한 이 몸이나마 교단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해야만 했을 일이었습니다."
가식을 떠는 펠릭스 5세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맴돌고 있었다.
누가 과연 그가 교황청의 주인이 되리라고 믿었었는가?
'빌어먹을, 저주받을, 주님의 실패작 같은 공의회 놈들.'
에우제니오 4세는 불경한 욕설을 속으로 내뱉었다.
교황 수위설과 공의회 수위설.
이 둘 간의 신학의 싸움은 사실 무의미했다.
이것은 교황과 지방의 주교들간의 돈과 권력에 대한 논쟁이었으니.
결론은 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지.
에우제니오가 물었다.
“십자군은 어떻게 할 게요?”
펠릭스 5세는 다소 경건한 얼굴을 해 보였다.
“주님께 맹세코, 십자군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모습이 여전히 고까워 에우제니오 4세는 계속 빈정거렸다.
“교황청의 빈약한 자금으로 감당할 수 있겠소?”
에우제니오 그 자신은 상당히 소탈하고 검소한 교황이었으나, 일신의 검소함과 교황청의 재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중세 기독교 사회를 이끌기 위해서는 황금은 필수였다.
수많은 일을 결정하고 행하기 위해서는 황금만큼 편리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메데오가 펠릭스 5세에 오른 이상, 교황청이 부과한 세금은 일부분 철폐되고 여러 주교들로 분산될 것이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십자군은 정말이지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고려와의 무역 또한 단절되었으니.
에우제니오 4세는 지금에 와서야 약간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선 순위는 오스만이 맞았다.
다소 강압적인 힘을 쓰더라도 잔은 신성로마제국으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후회는 항상 결단 이후에 찾아오기 마련.
안타까움에 발을 구를때 쯤, 이미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항상 뜻이 있으셨지요.”
- 휙.
에우제니오 4세는 어떠한 대답 대신 약지에 낀 어부의 반지를 던지듯이 건넸다.
"이걸 받기 위해 친히 오신 것 아니오?"
".....!"
펠릭스 5세가 날아오는 반지를 피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젊은 추기경 하나가 한 손으로 그 반지를 받아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우제니오 4세가 의자에 있던 담요를 끌어올리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 늙은이는 이제 교황청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없으니, 그만 나가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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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5세는 흰 수단(Soutane)을 정돈하며 마차에 올랐다.
볼로냐와 로마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추기경이 공손히 물었다.
“피렌체.”
짤막한 대답을 한 그가 마차에 오르고 이윽고 눈을 감았다.
추기경 또한 문을 닫고 마차 맞은편에 앉았다.
침묵이 그들을 맴돌았다.
마차가 출발하며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이 한창 그 침묵을 두드릴 때 쯤 펠릭스 5세가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
추기경은 특정한 주어를 언급하지도 않는 교황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녕 대단해. 이 고려라는 나라 말이야.”
푹신하고 부드럽다.
십자군이 일어나기 전, 고려에 의해 들여온 단 한 대 밖에 없는 이 교황청의 마차는 실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몹시 안락했다.
마차의 골격 밑에 구부러진 판들을 겹쳐 만든 장치로 충격을 일차적으로 흡수한다.
또한 바퀴에 둘러진 저 고무라는 것도 이차적으로 남은 충격을 해소했다.
안의 구조는 저들이 말하는 적강목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져 부드럽고 단단하며 품격이 있었다.
나이가 든 교황은 이것들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가격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거의 마차 무게만큼의 은을 지불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에 따라 장식해준 교황청의 문양과, 천사들의 조각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그래, 모든 것은 결국 돈이다.
세속 영주 출신의 펠릭스 5세는 전임 교황이 말한 화두에 깊이 공감했다.
또한 그의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나, 반대로 공의회에 의해 제약된 교황으로밖에 기억되지 않을 것이었다.
‘돈이 필요하다.’
용변을 보기 전과 본 후가 다르듯, 그는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공의회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십자군은 이 복잡한 문제의 열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을 위해선 또 돈이 필요한 것인데?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이를 끊기 위해선 자신의 가문인 사보이아의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또한 가문의 돈은 최후의 수단이기에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자산이다.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끄으응...”
그 소리를 들은 추기경이 가볍게 잠긴 눈을 떴다.
“성하, 고민이 있으십니까?”
눈 앞의 추기경은 자신의 충실한 종복이었다.
아라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에는 자신을 제외하곤 어떠한 뒷배도 없었다.
“그대의 가문은 고려와의 무역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지?”
“그렇습니다. 발렌시아에 있었던 덕분에 카나리와의 무역에서 이득을 취했지요.”
펠릭스는 뒤이어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으나, 추기경은 선을 그었다.
“그러나 제 가문은 성하의 근심을 풀어 드리기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네.”
무언의 압박을 해 놓고, 애써 부정하는 교황을 보며 추기경이 가볍게 웃었다.
돈에 미친 늙은이.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성하의 근심은 오직 한 사람, 혹은 한 가문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펠릭스 5세는 뒷이야기를 어서 하라는 듯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과 여러 가문이 힘을 합치면 되겠지요.”
헛웃음이 나왔다.
“알맹이가 없는 말이로다.”
“성하, 이 유럽에는 수많은 주님의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자된 도리로서 조금씩의 양털을 깎아 모아 겨울을 대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세금을 늘리자는 것인가? 안그래도 교황청의 재력을 제한시키고 싶어하는 공의회와 다른 군주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걸세.”
펠릭스 5세는 언짢은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멍청해서 세금을 증가시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교회는 신도들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고 있었다.
세금을 늘린다면 다른 세속 영주들 또한 반발할 것이 분명했으니.
자신의 이 미약한 권위로는 이를 진압할 수 없다.
‘쓸모가 있는 놈인줄 알았더니, 기껏 하는 생각이라곤.’
하지만 추기경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금은 내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기에 세금이라 부르지요.”
“...뭘 말하고 싶은 겐가?”
“그들의 자발적 성금을 걷을 수 있다면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까?”
펠릭스 5세의 귀가 쫑긋거렸다.
“무슨 명목으로?”
“우르바노 2세의 일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십자군 성금을 말하는 것인가?”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펠릭스 5세는 눈 앞의 추기경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빠져들었다.
"사도 베드로의 후계로서, 그들의 벌을 사해주시면 됩니다."
"...돈을 받고서?"
“모두가 가진 죄로, 모두에게서 '성금'을 걷으시지요. 저지른 죄가 없다면, 원죄에게서 걷으시옵고, 원죄에서도 걷으셨으면 앞으로 벌일 미래의 죄로부터도 걷으시면 됩니다.”
펠릭스 5세는 그 말에 아연실색했다.
그가 아무리 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 어찌 그러한 선택을 할 수가 있겠는가?
"성금으로서 그들의 죄는 사해질 것이니, 이를 성하의 관용(Indulgentia; 면죄부)이라 이름 붙이지요."
“듣기 싫네!”
그는 화가 난 듯, 마차를 세우고 추기경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대는 먼 거리를 걸어오며 그대가 말한 그 사특한 말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할 게야!”
- 쾅
마차의 문이 닫혔다.
더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 마차는 황급하게 달려나간다.
그 모습이 교황의 조급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추기경은 조소했다.
'피렌체도, 나폴리도, 롬바르디아도.'
이탈리아 어떤 곳에서도 당신을 그리 쉽게 도와주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존귀한 분을 이곳에서 이슬을 맞게 할 수 없으니 시종 몇 명이 근처의 민가로 향했다.
추기경, 알폰소 데 보르자(Alfons de Borja)는 슬쩍 웃었다.
데 보르자 가문 출신으로 그는 돈과 친족이라는 것이 신앙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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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유럽은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처음의 계기는 십자군의 실패에서 나타났다.
그 후 저 아득히 먼 동방에서부터 일어난 한 유목민족, 즉 몽골로 인한 파괴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앞의 두 위기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이었던 재앙, 전 대륙을 집어삼킨 흑사병 이후 유럽은 폐허 속에서 조금씩 다시 꽃을 피워나가고 있었다.
햇살 줄기들이 비치는 곳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중세 말기 자유도시들은 그들의 시대를 열었다.
지방 봉건 영주들이 아닌, 군주의 직속으로 들어간 도시들은 심지어 군주들로부터 헌장을 얻어 자치권을 보장받기도 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드리라(Stadtluft macht frei).
자유도시의 성격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표어.
중세의 법률로 인해 1년하고도 하루를 도시에서 버틸 수 있다면 자유민의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도시가 가지는 신분적 역동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도시의 삶 또한 그리 매력적이기만 하지는 않았지만.
뢰번 카톨릭 대학교.
뢰번.
브라반트.
플랑드르.
- 뎅 뎅
하루의 끝을 알리는 교회의 종이 울리자, 사람들은 도시에 드리워지는 어둠을 피해 서둘러 발을 옮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는 자신의 주거지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자들도 있었다.
뢰번 대학교에서 나온 한 사내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약속에 따라 미로같이 복잡하고 더러운 뢰번의 거리를 걸어갔다.
초행이지만 지도를 보며 어찌어찌 도착한 목적지 근처.
바로 옆은 뢰번의 사창가라, 간드러지는 여성의 교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청년은 그 모순에 다소 웃음지었다.
청년이 문을 몇 차례 리듬감있게 두드리자, 평균적인 사람의 신장에 맞추어 설치된 목조 덧창이 열리고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누구시오?”
“흐로닝언의 요한이라 합니다.”
“기다리시오.”
대답을 들은 안의 사람이 덧창을 닫았다.
방문자의 명단을 확인하는지, 청년은 조금 기다려야 했다.
- 끼이익
문이 열렸다.
하지만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문지기는 그를 곧바로 들여보내지 않고 골목과 골목을 살펴보다 미행이 없는 것을 확신한 다음에야 청년의 입장을 허락했다.
현관 뒤에는 평범한 가정집이 있었다.
1층의 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질 나쁜 일을 꾸미는 것처럼 행동하던 청년은 이곳에 와 후드를 벗으며 예의있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청년은 최근에야 뢰번에 왔고, 또한 초대를 받기까지 시간도 걸렸기에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정중한 인사에 먼저 자리해 있던 사람들 또한 고개를 숙였다.
“오늘 처음 오시는 분이 있다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년은 외지인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마음을 놓았다.
“성함이...?”
청년은 문 앞에서 말한 대로 요한이라 대답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가명을 밝히지 않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온 베설, 베설 한스포르트라 합니다.”
-
잠시간의 환담을 나눈 베설과 사람들은 중앙의 탁자로 모였다.
“오늘 읽을 책은... 크흠, 이거 새로 오신 분께 너무 힘든 일이 아닐까 싶군요.”
“무엇입니까?”
주변의 사람들은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 베설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자, 미리 말씀드리는 것인데, 책을 읽다 너무 흥분하거나 또 과격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하세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책일 뿐이고 그 안에 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의 재량에 달려 있으니.”
한 남성이 그에게 상당히 두툼한 책을 보여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이오. 고려에서 건너온 책이지.”
“...고려의 책이라면 저도 조금은 읽어보았습니다.”
“작은 세계의 발견?”
“...어떻게 아셨습니까?”
“쓰여진 지 백 년도 넘은 책이잖소?”
남성이 고개를 으쓱했다.
“물론 그 책 또한 처음에는 이에 못지 않게 반응이 좋았지. 하지만 오늘 그대가 읽을 책은 꿈에서도 나타날지도 모르오.”
“하하하!‘
사람들이 동감한다는 듯 웃었다.
”한스포르트, 하나만 물어보지요.“
”베설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모임의 주최자이자 대학의 교수이며 자신을 초대한 갈색 머리의 중년인의 물음에 베설이 대답했다.
”그대의 앞에 진리로 가는 붉은 문, 그리고 똑같은 세상으로 안전히 돌아갈 수 있는 푸른 문이 있소. 그대는 어떤 문을 선택할 것이오?“
”그야 당연히...“
”기억해 두시오, 붉은 문 뒤에 어떠한 악마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니.“
”......“
베설은 갈색 머리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저 자가 자신을 초대한 이유는 베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을 되뇌인 베설은 책상 앞에 놓여진 책을 집었다.
탁자의 다른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듯, 혹은 응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지를 확인해보니 순수종교비판(Kritiek op Pure Religie)이라 적혀 있는 문구가 있었다.
’저자... 이도라.‘
이상한 이름이구나.
독서회에서 빌려준 서책을 챙긴 베설은 거처에 도착했다.
들뜬 마음으로 침상에 몸을 기대 편한 자세로 표지를 열었다.
미지의 제국에서 쓰인 책.
어떠한 진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