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전(2)
창언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거렁뱅이 꼴을 한 요원이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왔구만.”
― 커헉, 커흡, 큭, 컥!
음식에 집중하던 요원이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창언 또한 은밀함이 기본으로 내재된 요원 출신이라, 등 뒤로 접근해 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다.
물론 이 요원 또한 고도로 훈련받은 자이니 외부에서는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었겠지만, 안전가옥에 와 있는 이상 다소 풀어져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방으로 음식물 파편이 튀자 민첩하게 한 발짝 뒤로 움직여 가볍게 피한 창언이 혀를 찼다.
“좀 천천히 들게.”
“예, 국장님.”
부하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다 다시금 입 안에 밥과 김치, 구운 고기를 한꺼번에 집어넣는 것을 바라보던 창언이 탁상 맞은 편의 의자를 꺼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취조하는 분위기다.
“그리 맛있는가?”
“맛있습니다. 그간 먹었던 것들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말입니다.”
“…고생이 많았군.”
과연 정면에서 보니 요원은 아주 핼쑥해 있었다.
“자네가 가장 멀리 있었지만 가장 먼저 보고를 올리는 셈이네.”
“다른 놈들은 모두 임무 중인 모양입니다?”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
“예, 그냥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생존을 위한 식사임이 틀림없을 정도의 게걸스러운 만찬이 끝나고, 그가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의 숨을 고른 이후, 요원은 다시금 현장에서나 보여줄 법한 냉철하기 그지없는 업무적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고드립니다, 보헤미아의 일은 완료가 되었습니다.”
“약속은?”
“지금까지 고려로부터 계속된 지원을 받았던 이상, 보헤미아의 형제단은 우리의 호의를 잊지 않겠답니다.”
“신의가 있는 친구들이군.”
창언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의자에 허리를 기대었다.
“좋아, 바젤 공의회가 실권을 잡은 이상, 후스파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겠지.”
“휴전 협정일 뿐입니다. 교황청은 물론이고 이 공의회라는 것들도 성직자치고는 참으로 속이 좁아 언제든지 협약을 파기할 수 있는 놈들이지요.”
창언은 품에서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더니 세필로 무엇인가를 빠르게 적어내렸다.
“그대가 보기에는 타보르파의 현 지휘관의 역량은 어떠한가?”
“이 시대 최고의 장군이었다는 얀 지슈카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그 또한 상당한 인물임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보헤미아 후스파의 지도자이자, 불세출의 명장.
그 이름은 과거 대양 너머에 있는 고려에게까지 닿을 정도였다.
비록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부흥시킨 후스파는 타보르파를 중심으로 규합되어 보헤미아의 백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후계자인 대(大) 프로코프{Prokop Holý; 동명이인인 소(小) 프로코프도 동시대의 타보르파 장군이었다.}는 온건파까지도 다시금 타보르파에 흡수하여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장님, 그들은 유럽 대륙의 내부에 있어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후스파가 없었으면, 신성로마제국은 십자군에 단지 금전적 지원이 아닌, 인적 지원까지 했을지도 모르지.”
“턱 밑에 오스만이 있는데 그러기야 했겠습니까?”
“시중의 뜻이니, 나 같은 범인은 감히 헤아리기 힘들다.”
“…예 그건 맞지요.”
요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양 너머의 탁상에서 천하를 오시하는 분께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지는 그와 같은 실무자들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있기도 전, 이미 고려는 꽤 오랜 시간 전부터 후스파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
“임무가 끝났으면 정기 연락선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가게.”
“더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이미 계획은 실행 중이야. 굳이 개입해서 혼란을 줄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요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불멸의 용을 위해.”
창언은 들고 있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예를 받았다.
“또한 황실을 위해.”
* * *
창언은 두아르트로부터 프랑스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조언을 받았지만, 그 조언은 별달리 쓸모가 없었다.
이미 고려는 또 다른 계책을 실행 중이었다.
요원 한 명은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에 있겠지.
그의 업무는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쉬울지 몰랐다.
부르고뉴 공국(Duché de Bourgogne)은 현 선량공 필리프가 다스리고 있었다.
디종에 위치한 그의 궁정에선 연일 친프랑스파와 독립을 주장하는 파벌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귀족들이 일어나 말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이 언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주군, 필리프가 결단을 내릴 때까지는.
“이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발루아 가문(La maison de Valois)에서 분리된 주군께서 주군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입니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La maison de Valois―Bourgogne)의 가주 필리프는 그 주장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선량공이라는 그의 이름과는 사뭇 다르게 필리프는 상당히 야심이 많은 자였다.
필리프의 아버지였던 장 1세 전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 암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도팽(태자)이었던 샤를 7세에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양보받은 그는 주어진 자치권과 여러 특혜를 넘어 독립국의 지위를 넘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
이것은 공작들이 가지는 필연적인 야망이니까.
마침 프랑스의 군대가 십자군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필리프는 맥동하는 자신의 심장을 느꼈다.
안 그래도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프랑스는 샤를 7세의 통치하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병든 사자에 불과했다.
‘그 성녀라는 것이 일 드 프랑스 공성전 때 콱 죽어버려 아직까지도 백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포로로 잡히기만 해도 얼마든지 고통스러운 최후를 선사해 줄 수 있었는데.
그런 기회는 떠나갔다.
흉계가 도달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교황청의 부름을 받아 먼 땅으로 떠났다 한다.
필리프는 아쉬운 듯 침을 삼켰다.
‘이제는 볼 일도 없겠지, 그건 다행이구나.’
충성스러운 측근의 발언이 끝나자 몇몇 귀족들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 사내가 다소 격앙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부르고뉴 공국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수 있던 것은 오직 발루아에 대한 확고한 충성 덕분이었습니다, 주군. 공께서는 프랑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지 마십시오.”
저 샤를의 개 같은 놈.
필리프의 얼굴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프랑스는 아직도 부르고뉴가 그들과 잉글랜드 사이에서 간을 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관용은 없을 것인즉.
친프랑스파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그들 중 몇 명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 수는 적지 않았다.
복잡한 귀족 사회에선 비집고 들어갈 틈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
만약 부르고뉴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저들 중 일부를 구워삶을 수도 있으리라.
‘이교도들의 돈이라.’
필리프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거래의 대가를 가늠해 보았다.
한쪽의 저울에는 선량하다는 명예와 친프랑스파의 호의 그리고 여전히 눈치를 보는 부르고뉴 공국이 올려져 있었다.
나쁘지 않다.
천천히 세력을 기르다 보면, 언젠가 저지대의 많은 땅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다른 한쪽.
이곳에는 평판과 명예가 없다.
야심이 많은 그는 평판마저도 깨끗하길 원했다.
그렇다면 그 모자란 무게에 비례해서 더 무거운 추가 있어야 할 것인데.
로타링기아(Lotharingia).
뇌리에 거대한 추가 떨어졌다.
그 무게와 크기는 실로 놀라워, 머릿속 계산의 균형을 파괴했다.
마법의 단어.
그 사특한 말은 자신의 궁정에 비밀리에 도달한 저 바다 건너의 사절에게서 처음으로 나왔지만, 그 말을 듣는 즉시 필리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재건된 로타링기아의 왕이라.
샤를마뉴의 후예들이 차지할 수 있는 저지대의 땅.
비록 카롤루스 가문은 역사의 뒤로 물러났지만 자신 또한 프랑크의 후손이다.
필리프는 주먹을 쥐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 * *
“원정은 실패할 것입니다.”
“…….”
중년인은 골방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이는 확실히 노인은 아니었으나, 의욕도 야망도 거세된 남자란 결국 노인에 불과했다.
방이 춥지는 않았다.
그의 신분은 적어도 냉골에서 기거하기에는 너무나 높았으니.
대우 자체는 좋았으나, 그를 좀먹고 있는 것은 두려움, 혹은 절망.
그 속에서 위안을 받는 것은 오로지 따스한 체온뿐.
정체 모를 시녀는 폐인의 귀에 속삭인다.
이국적인 여인. 참으로 아름답다.
저 여인이 대체 언제부터 짐의 곁에 있었는가?
언제부터 짐의 곁에서 따스함을 제공해 주었는가?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당최 알 수는 없었다.
“카스티야는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떠난 십자군은 바다에서 모두 죽을 것이지요.”
미동조차 없다.
“…….”
“당신의 백성들은 비탄에 빠져 절규할 것입니다. 또한 손을 들어 원망할 대상을 찾을 것이에요.”
그가 조금 슬픈 기색을 보였다.
그는 무능하고 어리석었으나, 심성이 못된 사람은 아니었다.
“…….”
그들은 어느 누구의 백성도 아닌 바로 당신의 백성입니다.
남성은 알고 있었다.
“엔리케는 마침내 당신을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이 원정이 성공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중년인은 더욱 몸을 둥글게 말고 떨었다.
엔리케는 카스티야의 왕비를 따로 두지 않으려 했다.
그는 꼼짝없이 홀로 여생을 마칠 운명에 빠졌다.
총신 알바로에 이어 그의 사촌 형 엔리케까지.
왜 그를 매번 못살게만 구는가.
중년인은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는 늦고야 말았다.
“…지… 짐은 어… 어떠한 권… 권한도….”
“알고 있습니다.”
시녀는 웃었다.
“다만, 폐하. 적어도 여인을 품으셔야 합니다.”
여인?
남성의 공허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기에, 남성 또한 멍청하게 따라 웃었다.
“어떠한 피도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일개 시녀와 같은 천박한 피도 말이지요.”
시녀는 자신의 품에서 조그마한 단약을 꺼냈다.
중년인은 사뭇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였다.
짐을 죽일 셈인가?
“폐하, 폐하의 적법한 후사만이 이 나라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후…사?”
향긋한 그 약은 여인의 입에 들어갔다.
독약은 아니다.
중년인은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 그녀의 촉촉이 젖은 입술이 중년인의 입을 마주했다.
찰나지간의 침묵.
중년인은 따스한 액체가 자신의 마른 입을 적시고 들어오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지는 끝에서 결국 둘로 갈라지게 마련.”
뒤이어 이어지는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이야기.
뜨거운 숨결이 그의 귀를 휘감는다.
그녀의 손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천천히.
뱀과 같은 손길이 마침내 중심에 파고들자, 후안 2세는 몸을 뒤틀었다.
“당신의 아이는 트라스타마라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인은 반응을 보이는 후안 2세를 요사스럽게 바라보았다.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여.
당신들의 피는 영원히 갈라지리라.
따라서.
에스파냐는 건국되지 못할 것이다.